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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가 가져온 은혜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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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크고 작은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 성격적인 것으로 치명적이 단점이 될 수도 있고,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사회생활 하는데 아주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을 보면 일평생 그의 몸에 질병이란 가시가 떠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명석하고, 정말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인데도 육체의 가시가 평생 떠나지 않습니다. 

  가시라고 하면 식물의 줄기나 잎에 바늘처럼 뾰족하게 돋아난 부분을 말합니다. 장미는 정말 아름다운 꽃을 가지고 있는데, 장미꽃을 함부로 따려고 하면 가시에 찔려 고생하게 될 것입니다.  안개꽃에 파묻힌 장미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 아름다운 꽃이라고 해도 그 줄기에는 무수한 가시가 돋아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동물의 몸에는 가늘고 빳빳한 가시가 있습니다.  고슴도치라는 동물은 머리와 온 몸에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시는 물고기의 잔뼈를 가시라고 합니다.  맛있는 생선이라고 하여 조심하지 않으면 목에 가시가 박히게 됩니다.  목에 박힌 가시 때문에 집에서는 아무리 힘을 써도 빠지지 않아 병원에 가서 힘들여 빼는 이들이 있습니다.  적은 가시인데, 찌르는 아픔이란 도무지 상상하기조차 싫습니다. “목구멍에 가시”라는 말은 난감한 고통을 말합니다.

  이사하면서 가구를 운반하다보면 아무리 잘 다듬은 가구라고 해도 뾰족한 거스러미가 있어 조심하게 다루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박히게 됩니다.  손톱 사이에 박힌 가시는 얼마나 아픔을 주는지 모릅니다. 

  이런 가시가 주는 아픔과 고통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우리의 인생살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들은 심히 거칠고 날카로워서 듣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시 돋친 말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가시나무에 가시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사람이 되라는 말이요,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떠나지 않는 육체적인 결함이나 질병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여러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가시가 가져온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사도바울과 같은 열정과 인격과 학식의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13권을 기록하였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업적이었다고 해도 과언 아닙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영적인 체험을 결합하여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영혼 구원에 대한 선교의 열정으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한 세기 안에 전 유럽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사도바울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많은 성도들이 바울의 신앙으로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도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의 일생 떠나지 않는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가시’라는 말을 잘 알아야겠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스콜롭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뾰족한 것”, “뾰족한 막대기”, “말뚝”, “가시나무” 그런 말입니다.  이솝우화에서는 가시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찌르는 가시입니다. 

  사도바울의 초상화나 그의 모습을 보고 만든 동상이 없기에 바울이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고후10:10에는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보낸 편지들을 보면 매우 힘이 있고, 논리가 분명하고 체험적인 신앙을 말씀하시는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직접 대해본 사람들은 편지를 통하여 받은 인상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실망한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몸으로 대할 때에는 약해보이고, 그 말도 시원스럽지 않았다고 합니다.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바울과 데클라의 행적”이라는 신약외경이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외경을 사도행전의 유형에 속하는 외경이라고 합니다.  이고니온에 ‘데클라’라고 하는 헬라의 처녀가 살았는데, 약혼 중에 있었습니다. 이 처녀는 창문을 통하여 들려오는 바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순결의 중요성을 말씀하는 바울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남자와 파혼하고 감옥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에 힘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후에 무라에 있는 바울을 만나서 은혜를 받고, 이고니온에 돌아와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합니다. 

  데클라가 바울의 외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는 키가 작고, 두 눈썹은 거의 맞붙었으며, 코는 매부리코였으나 은혜는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키가 작은 사람들이 큰일을 합니다.  역사를 빛낸 위대한 사람들은 대개 키가 작았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일생 떠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사도바울을 괴롭힌 육체의 가시라는 것이 무엇이겠나 하여 수많은 질병과 고통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육체의 가시로 인한 아픔으로 당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고 했을 것입니다.  갈6:17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이 육체의 가시와 어떤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는 무엇이었습니까? 

  육체의 가시가 안질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여러 서신서를 대필하다가 마지막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6:11)고 했습니다.  그가 일찍부터 안질을 앓아 시력이 약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갈4:15절을 보면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여기서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는 말을 보면 사도바울의 눈이 매우 나빴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였을 때에 시력을 잃고 3일간 앞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시력을 찾았어도 일생 약시로 시달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사도바울은 간질을 앓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런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바울이 수없는 매를 맞았는데,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차례나 맞은 바 있었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죽을 고생을 겪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았는데, 그 날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던져버렸는데, 제자들이 둘러서 보는 중에 깨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음 날 더베라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사도는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가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었으며,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갈라디아4:14에서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안질과도 연결될 수 있지만, 간질을 앓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도 아니하였고, 버리지도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간질환자들은 업신여겼으며, 옮겨질까 염려되어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독신의 은사가 있었던 분으로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악한 사탄은 언제나 사특한 생각을 불어넣었고, 음욕이 일으키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사도바울은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자비량하여 일하다보니 풍토병에 약하여 말라리아와 같은 병에 걸리므로 그런 풍토병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이 마치 찌르는 가시와 같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렇게 비중 있는 주장은 아니라고 봅니다.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사탄의 공격이나, 사람들의 반대, 혹은 복음 전파에 대한 실패로 인한 상실감을 말하는데, 그런 것을 육체의 가시라고 말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고통 중에 복음을 전파하고 보니, 수없는 사람들이 모함하고, 시기하고, 적대시하였으며, 또 육체의 고통은 가시노릇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육체의 가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사탄의 사자’라고 하였겠습니까?  육체의 가시는 사탄이 가져다 준 것이란 뜻이 아니라, 마치 사탄이 자기를 방해하려고 들어온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의 선교의 열정을 훼방하고 가로막았기에 사탄의 공격으로 알고 사탄의 사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놓고, 자기에게서 떠나가기를 세 차례 기도하였습니다.  세 번이란 상징적으로 여러 번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세 차례 기도하였다는 말인데, 그것은 같은 제목을 놓고 일정 기간 간절하게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상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기도를 들으신 우리 하나님은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분명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기도가 “그래라.”, “그대로 들어 주마” 하시는 응답만 응답이 아니라, 거절하신 것도 응답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거절하시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그것이 은혜요, 나에게 더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거절하시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가시가 가져온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깨달아야 하는 은혜입니다. 

1)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합니다.

  육체의 가시는 우리로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합니다.  7절 말씀에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사도바울이 받은 은혜를 간증하면서 제삼자적인 논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그가 이 편지를 쓰기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셋째 하늘로 끌려올라갈 때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자기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끌려올라갔는데, 이런 입신의 경지는 사람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가 간 셋째 하늘은 낙원이었습니다.  낙원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일 때에 스데반이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다고 외쳤는데, 그를 핍박하던 바울도 셋째 하늘, 삼층천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에 그곳에 겪은 일이나 들은 말들은 이루 표현할 수 없으며,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체험을 자랑하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이런 일들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고린도후서에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랑 같지만 자기가 하는 말은 참말이요, 꾸며낸 말이 아니기에 어리석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할 말이 있고, 하지 않을 말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 체험만을 말하면 사도를 성인으로 알고, 주님 다음에 가는 위대한 인물로 숭배할 것으로 생각하고, 교인들이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이 조심스러워 더 이상 자랑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낙원에 다녀오는 체험을 하고도 말하는 것을 자제하고, 그만둔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침소봉대하여 우려먹고 다니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자기에게 낙원을 보여주시고,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엄청난 말씀을 주시면서, 자기에게는 육체의 가시를 주시고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을 것입니다.  수없는 병자를 고치고, 때로는 죽은 자를 살리면서 다니는 대사도가 자기의 질병 하나는 어쩌지 못하고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는 깊은 뜻을 알지 못하여 여러 번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그 뜻을 몰라 방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깨달은 것은 그가 받은 은혜와 계시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7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영적 체험에 건강한 육신, 자신만만한 외모라고 하면 자만이 지나쳐서 교만해질 것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은 겸손하라고 가시를 주셨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얼마나 독똑하고 열정이 많았습니까? 

  그는 남의 잘못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제대로 못하는 마가를 책망하였고, 대사도 베드로가 처신을 잘못한다고 면책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어 그 자신을 낮추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예방하기 위한 처방으로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비우고, 겸손과 낮아짐의 깊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에게 육체의 가시가 떠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시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고 마지막에 가시면류관을 받으면 그것이 제대로 믿은 것이요, 그래야 주의 종의 길을 잘 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그를 믿는다고 하면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실 것입니까?  가시면류관이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신앙이 무슨 신앙입니까?  영광만 바라보고, 축복만의 기독교라면 그것은 사이비 이단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겸손해져야만 합니다.  이렇게 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는 은혜는 가시가 가져온 은혜였습니다. 

2) 기도하는 은혜였습니다.

  8절 말씀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만능의 열쇠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여기 사도바울은 그의 소원을 간구하였지만, 안 된다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것도 응답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감동적인 설교자였습니다.  그가 학식을 가지고 설교한 것입니까?  그가 엎드려 기도하였기에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기도하였기에 끝까지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란 책에서 어떤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며 열심을 내고, 성경을 연구해도 사탄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들의 수고를 비웃고 우리들의 지혜를 조롱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두려워 떤다.”고 했습니다.  악한 마귀 사탄은 우리로 기도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우리로 일에 몰두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사탄이 두려워 떠는 기도, 기도에 성공하면 신앙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 없이 일만 잘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고, 기도의 사람을 원하십니다. 

  요14:12-1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사명을 위하여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겪는 어려운 육체의 가시를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가시는 우리로 기도하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로, 때로 교회 안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제가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해결됩니까?  무엇을 해명하고 다닐 것입니까?  엎드려 기도하면 때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교회가 나의 교회냐, 아니면 네 교회냐?  내가 주인이냐, 네가 주인이냐?”이런 말씀이 저의 귓전을 울릴 때에는 “예 알았습니다.  저는 주의 종입니다. 더 낮아지겠습니다.  제가 담당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평안하면 기도할 것입니까? 찌르는 가시가 있으니 기도하게 됩니다.  가시가 은혜입니다. 

3)  온전해지는 은혜입니다.

  9절 상반절 말씀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약한 사람에게 나타나고,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  나는 심히 약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크게 하십니다. 온전하여진다는 말은 성숙해진다는 말인데, 성숙한 신앙은 가시를 끌어안고 삭이면서 그 아픔을 아픔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시가 찌르는데,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라고 하니, 때로는 약이 오르고,  분함을 삭일 수가 없습니다.  나의 능력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자기가 약하다는 사람에게만 온전히 임하시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약하지 않았다면 그런 엄청난 계시는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약하였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확신과 능력을 주시려고 계시를 받게 하셨습니다.  가시는 계시를 받게 합니다.  가시와 계시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가시를 가진 사람이 계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큰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은혜를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까?  남이 알까보아 부끄러운 일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시면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은밀한 계시를 주고, 가시는 온전한 신앙을 가져옵니다.  온전한 신앙은 가시를 가진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4)  주님의 능력으로 머물게 합니다.

  9절 하반절 말씀에 “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가시를 가진 사람이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약한 것들을 자랑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할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할 것입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능력이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머문다는 말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낱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에피스게노세’라고 하는데 ‘장막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고정된 상태입니다. “장막을 펴고 확실히 함께 산다.”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의 일생에 내 힘으로 살아가지 말고,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머무는 은혜를 가져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10절 말씀에서 사도는 결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 약한 것들, 능욕, 궁핍, 박해, 곤고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분명히 우리로 약하게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때가 오히려 강력한 순간이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때로 피할 길도 주십니다.  나약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우리가 탄 배가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바위에 가로막혀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 거치는 바위를 치우시지 않고, 은혜의 강물로 불어나게 하시어서 배가 파선하지 않고 넘어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가시가 가져온 은혜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숙함이 무엇이며, 온전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선교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가시가 들어왔습니까? 

  시119:71절의 말씀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심히 약하지만, 우리 주님의 능력은 위대하십니다.  육체의 가시가 들어갔습니까?  가시로 인하여 낙심하실 것입니까?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시는 사랑의 침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은 것이 아니라, 버리지 않고 사용하시려고 하는 은혜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 그리스도의 능력의 사람으로 쓰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끝가지 기도하면서 매어달리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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