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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으로 심는 자들 (약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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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말들이 여럿 나옵니다.
13절을 보세요, 지혜, 총명, 선행, 온유가 나옵니다. 
14절을 보세요, 진리가 나옵니다.
17절을 보세요,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나옵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담고 있는 두 글자로 말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말일까요?

제가 ‘이것이 정답입니다.’ 하면 ‘그거 조금 억지 같습니다.’할 분도 있겠고 ‘아, 그렇군요. 동감입니다!’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런 말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힌트 하나 드릴까요? 저희 교회의 비전과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의 비전’에 나오는 말인데 제일 먼저 나오는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경건’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에는 이것 말고 다른 것들이 더 들어갑니다.
기도, 성경 읽기, 교회 출석, 정직, 봉사, 봉헌,  이런 것들이 들어갑니다.
경건이라는 말을 저울에 올려 놀고 무게를 달아보면 그 무게가 아주 많이 나갈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이삿짐 컨테이너와 같습니다.
이삿짐 컨테이너에는 그 집 살림에 필요한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경건이라는 말에는 우리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컨테이너 가운데도 용량이 아주 큰 컨테이너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경건의 여러 덕목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화평입니다. 

17절에서는 화평은 위로부터 난 지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이루느니라” 이렇게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화평, 평화, 평안, 평강, 화목, 그리고 평온은 모두 뿌리가 같은 말입니다.
‘살롬’이라는 히브리말을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신약에는 이 말이 ‘에이레네’라는 헬라말로 나오지만 뿌리는 살롬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시작되어 그동안 잘 진행되고 내일 폐회되는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의 주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화해라는 말은  자세하게 따지면 화평과는 조금 다릅니다.

성경에는 화해라는 말은 두 번 나오는데(눅12: 58, 행 7: 26) 헬라말 원어도 화해는 ‘아펠레라크세이’라고 다르고, 영어번역도 화평은 'peace' 화해는 'reconciling'이라고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화해라는 말은 ‘조정한다,’ ‘법률적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넓게는 화해도 살롬, 화평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형제쯤 되는 말입니다.
아무리 멀게 잡아도 사촌을 넘지는 않을 것입니다.

18절을 다시 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 말은 야고보서 3장의 결론입니다.
이 말은 ‘그렇습니다.’ 하는 설명이 아닙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라! 화평을 심는 자들이 되어라!’ 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보훈에 팔복이 나옵니다.
첫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이것은 ‘그런 줄 알아라!’ 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천국을 소유하여라!’ 하는 명령입니다.

산상보훈의 팔복 가운데 일곱 번째 복은 무엇입니까?
힌트, 오늘 본문과 비슷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 역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아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들,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 문제의 답을 같이 찾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화평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따라서 화평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제일 강하게, 많이 예언하고 있는 성경은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의 별명 가운데 하나가 ‘메시아의 예언자’입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메시아는 화평의 왕입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이버지라, (그 다음 무엇입니까?)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리고 7절에서는 그 정사와 평강이 더함이 무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11장에는 그 메시아가 다스리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로 시작되는 말씀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화평” 두 글자가 됩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수많은 천군이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평화로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기 위하여, 화평 그 자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여섯 글자로 된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힌트 하나 드릴까요?
로마서 5장 1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로마서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다음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화평’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자’ 이런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싶어도 우리 마음대로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삼팔선보다도 더 높고 무서운 담이 있었습니다. 죄의 담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허물어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고 나가서 이웃과도 화평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아까 화평과 뿌리가 같은 말들을 여럿 말씀드렸는데 여기에는 그런 말들이 몇 개가 나옵니다.  어떤 말들인지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십자가의 의미도 화평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까 산상보훈 말씀을 드렸지요. 산상보훈은 기독교 교훈의 황금률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천국 시민의 헌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까 살핀 것 같이 거기에도 화평이 나옵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들 가운데 하나인 야고보가 기록했는데 예수님이 산상보훈을 말씀하실 때 야고보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있지 않았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있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까요.
그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 형님이 집안일은 팽개치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시는 것일까?’ 궁금해서 따라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들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고보는  형님이 하신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반복을 하고 재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 그 아홈 가지 열매가 나오지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그 다음은?)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 22~23a)

산상보훈에도 나오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들어있고, 화평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화평은 성경의 변방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성경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화평을 소홀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평은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인 것을 알고 화평하게 하는 자들, 화평을 심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둘째, 우리의 마음에 화평이 있어야합니다.
마음이 화평한 사람은  주변을 저절로 평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본보기가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 1182~1226)입니다.
프란시스는 여러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대로 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고 절대적인 청빈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위로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애를 바쳤습니다.
프란시스의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화평이 넘쳤고 그것이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프란시스에 대해 여러 분이 여러 번 들어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하루는 프란시스가 전도하기 위해 제자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기만 했습니다.
제자가 전도는 언제 하느냐고 하자 프란시스는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찬 우리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훌륭한 전도라고 했다고 합니다.
프란시스는 사람들과만 평화를 유지한 것이 아닙니다.
프란시스가 설교할 때는 새가 그의 어깨에 내려와 앉았고  그가 숲 사이의 길을 걸을 때는 사나운 짐승들도 그를 호위하듯 따랐다고 합니다.
그의 고향인 앗시시에 있는 프란시스의 동상에는 지금도 새들이 늘 날아와 앉아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신기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33장이 프란시스가 작사한 것입니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금빛 나는 밝은 해 저 은빛 나는 밝은 달
하나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이 찬송가에는 프란시스의 이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의 평화가 밖의 평화를 이룹니다. 그 평화는 전염이 됩니다.
작은 평화들이 모여서 큰 평화를 이룹니다.
여러분, 마음에 평화가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죄의 확신이 있을 때 마음에 평화가 넘칠 수 있습니다.

찬송가 189장 1절 가사를 생각해 보세요.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그 다음 무엇입니까?)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그 다음 무엇입니까? 오늘은 이상하게 ‘그 다음 무엇입니까? 소리를 자주 하게 되네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깊은 평안, 참된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469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가사, 특히 후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신뢰할 때 슬픔과 고통 가운데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찬송가 470장의 후렴에는 “내 영혼 평안해”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이 찬송은 스팻포드(Spafford) 집사라는 분이 선박충돌 사고로 네 딸을 잃고서도 주님의 도움으로 깊은 평안을 체험하고 지은 찬송입니다. 

야고보서는 실천을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사회정의라는 말을 좋아하는 분들은 야고보서를 ‘사회정의의 교과서’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아모스서, 신약의 야고보서가 이런 면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냥 실천, 그냥 사회정의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경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실천입니다.
경건을 기초로 한 깐 실천입니다. 

로마서는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모순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야고보서의 실천을 믿음을 전제로 한 실천입니다.

로마서도 12장 이후에서는 실천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모순되는 성경이 아니고 서로 보완하는 성경입니다. 

저는 이번에 야고보서를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다가 야고보서가 경건을 강조하고 있는 사실이 강하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느꼈습니다.

야고보서 5장을 보세요. 야고보서는 경건의 중요한 요소인 기도에 대한 교훈으로 끝납니다.

지금 수요예배에서 임형준 목사님이 야고보서를 강해하고 있는 데요 이번 주일 수요일에는 임형준 목사님이 볼티모어 연회 감독 일행을 안내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대신 강해를  합니다.  저는 바로 이 점, 야고보서의 경건성을 강조하는 말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안에 평화가 있는 사람이 화평을 말할 때 그것이 화평을 심는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이 심은 화평의 씨는 잘 자랍니다.
싹이 나고, 줄기가 생기고, 가지가 생기고, 잎이 돋고,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활빈교회 김진홍 목사님의 전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분은 철학을 공부하고 큰 뜻을 품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신학교 뒤에는 산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생들은 밤이면 그 산에 올라가서 무덤 사이에 자리 잡고 기도를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도 동료 신학생으로부터 ‘이 시대에 목회를 잘 하려면 소나무 뿌리 하나는 뽑아야 한다.’는 권면을 받고 산에 올라가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소나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그런데 동급생 가운데 커닝을 잘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학생은 밤에 산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몸을 떨면서 유난히 요란스럽게 기도를 했다곤 합니다.
그것을 보고 김진홍 목사님은 처음에는 ‘신학생은 다르구나! 낮에 커닝한 것이 양심에 걸려서 저렇게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있구나!’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도 그 친구가 커닝을 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이런 위선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김 목사님은 ‘나는 진실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한동안 신학교를 떠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졸업할 때까지 커닝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는데 오래간만에 만나보니 수천 명 교인이 있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외형적인 성공 여부를 떠나 진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고 합니다.

저에게도 이와 비슷한 체험이 있습니다.

안에 진실이 없는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내면적인 경건이 없는 사람이 경건을 말하는 것은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합니다.
화평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에 평화가 없는 사람이 평화를 말하는 것은 알맹이는 없고 껍질만 있는 씨앗을 심는 것이 됩니다.
이 경우에는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속죄의 확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 주님의 인도에 대한 신뢰, 이런 것들을 통해 마음에 평화를 얻고 그것을 통해서 화평의 씨를 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교회가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평화의 도가니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것들이 이 안에 들어와서 녹아서 평화라는 정금이 되어 나와야 합니다.

예전에는 염색집을 이용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시장 같은데 염색집들이 많았습니다.
입을 옷들이 없으니까 군복 흘러나온 것을 염색집에 갖다 주어서 염색을 해서 입는 일들이 많았지요.
군복은 대개 푸른색이었는데 그 색을 국방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을 주로 검은색으로 염색을 해서 입었습니다. 대학생들이 그런 옷을 많이 입었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멋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검은색 염료가 들어있는 염색 가마를 통과하면 무슨 색이든지 검은색이 되어 나왔습니다. 
교회는 평화의 염색집이 되어야합니다.
여기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평화의 색으로 염색되어서 나와야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역사 초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 윌리엄 존 매켄지(W. J. McKenzie 1861~1895)라는 캐나다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1893년에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매켄지 선교사는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며 마지막 나팔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황해도 소래라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소래는 1884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교회가 세워진 곳입니다.
그 영향으로 마을 주민 거의 전부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매킨지 선교사는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1년 반 남짓 선교활동을 했는데 그 사이에 동학혁명도 겪고 청일전쟁도 겪었습니다.
매켄지 선교사는 마을 입구에 교인들과 함께 구덩이를 파고 장대를 세운 후 십자가 그려진  기를 세웠습니다.
동학군은 그 십자기를 보고 ‘아, 저 마을의 평화를 깨뜨려서는 안 되겠다.’하고서 소래 마을은 피해 갔다고 합니다.
매켄지 선교사가 한국을 너무나 사랑하는 것이 잘 알려진 것도 소래 마을이 무사할 수 있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매켄지 선교사와  만났던 동학군 간부들 가운데는 기독교를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세계감리교대회 개회예배를 드리는데 첫 순서가 세계 각 나라 감리교 기들이 입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들을 대회장 양쪽에 죽 늘어놓고 그 사이에 대표들이 앉아 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태극기를 보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처럼 기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번 세계감리교대회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기들을 보면서 그 기들이 각각 자기 나라에 화해를 전하는 사명을 다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매켄지 선교사는 교회당을 짓느라고 애쓰다가 건강을 해쳐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매켄지 선교사의 감화를 깊이 받은 소래교회의 교인들은 매킨지 선교사의 모국인 캐나다 장로교회에 ‘후임 선교사를 보내 주세요.’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이 일을 통해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선교를 공식으로 결의하고 여러 명의 선교사들을 보냈습니다.
매켄지 선교사는 한국선교의 씨를 심은 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동학군이 소래 마을의 십자기를 보고 피해 간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아, 저것은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저희 교회는 조금 높은 곳에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교역자와 직원들이 생일 선물로 제 차에 네비게이션을 설치해 주었습니다.
그 네비게이션에는 ‘당신이 있는 곳은 지금 경도 얼마, 위도 얼마, 고도 얼마입니다.’ 알려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조금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알아보아야하겠다.’하고서 교육관 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재어 보았더니 해발 80m라고 나오더군요.  거기에 10층 기도탑을 세우고 그 위에 십자가를 달았으니 더욱 더 높은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는 야간 조명시설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밤에 환하게 빛을 내는 아크릴 간판도 설치했습니다.
이 십자가가 소래마을의 십자기처럼 평화의 불빛을 널리 전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화평하지 못합니다.
남과 북 사이도 화평에 금이 가고 있고 이번 포스코 본사 점거사태 같은 것은 전쟁 아닌 전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내는 평화의 불빛이 더욱 밝아야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온전한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이 교회가 평화, 평화가 더욱 강하게 자리 잡는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강한 평화를 체험하고,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되고, 화평을 심는 자들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교회가 남북이 평화 가운데 하나를 이루는 일에 씨앗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세계 평화의 작은 씨앗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일에 함께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갈6: 7).
우리는 화평을 심어 의를 거두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 믿음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것을 하나 심었지요. 나이가 많도록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지 않으니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그만 분쟁의 씨앗이 되어 오늘날에도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저렇게 많은 사상자를 내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화평은 하나님의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여러 가지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철따라 비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26장 6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이 말씀을 잘 지켜 화평을 선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화평은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4장 6절과 7절의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에 힘써 하나님이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 20절에서는 우리는 화목의 사신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첫 번째 주일 저녁예배에서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 화목의 사신, 화목의 홍보대사로서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맺습니다.
화평의 중요성을 깨닫고, 마음에 화평이 넘치고, 이 교회가 화평의 공동체가 되어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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