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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힘 (고후 4: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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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정복했다는 의미

어느 집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형이 집 앞에 나와 있는데, 거지가 와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형은 난처했습니다. 거절하자니 자기 이미지가 구길 것이고, 무엇을 주자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 조금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내일 오시오.”이렇게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거지는 가버렸습니다. 그 때 집 안에 있던 동생이 크게 웃으며 뛰어나오니 형이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내가 동네에 가서 사람들에게 자랑할 테요. 우리 형이 시간을 정복했다고 말이요.”그 말을 들은 형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쫓아가서 거지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었습니다.

시간을 정복했다고 하는 동생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겁니까?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죽는데 그 사람들 중에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밖에도 내일이 되기까지, 하루 동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데 형은 내일 만나자고 한 그것을 동생은 시간을 정복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거절을 하든지, 아니면 먹을 것을 주든지  실은 형이 지금 이 순간에 결정을 해야 했던 것인데 지금 이 순간을 회피하고 막연히 내일 오라고 한 형의 그러한 속내를 동생이 꼬집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순간에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일로 미루는 약속을 하는 것,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는 미래에, 지금 이 순간을 떠넘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거절을 했다고 하여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까운 마음으로 거절하는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혹은 아까운 마음은 없지만, 거절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주기 싫은데도 체면 때문에 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에 억압이 쌓이게 됩니다. 타인을 의식하는 선행, 그것의 가치는 작은 것이고 아까운 마음 없이, 진정 가여운 마음으로 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어떠한 선택이든, 그 선택을 지금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 그것은 존재의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존재의 힘이 없는 사람은 뒤로 미루게 됩니다. 모든 약속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개중에는 회피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약속이 있는데 이는 나약한 모습입니다. 이런 나약한 모습으로 이어지는 인생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힘이 있는 인생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힘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을 때, 그들은 모든 정보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지구상에 왜 태어났는지, 존재의 이유와 살아가야 할 이유와 목적, 심지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삶의 목표와 기반이 진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조금의 허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단이 찾아와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거짓된 정보는 인간 내면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면서 어떤 목표를 만들게 됩니다. 이제 진리의 말씀 경청하기를 그만두고, 사단의 새로운 정보 앞에 귀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돈이나 명예, 건강이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살아보니 어느 정도 행복도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면 무엇을 목표로 세워야 하는지 모른 채 언젠가는 허무함을 느끼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시편 39편 6절“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결국‘헛된 일에 분요’하는 것입니다. 의미도 알고 목적도 있어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도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관해서 볼 때는 생명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요한 일서 2:15-17에“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말씀합니다.

사단이 주는 거짓정보는 우리 자신을 기쁘고 즐겁게 할 만한 것이기에 솔깃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속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응답 받았다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표와 계획을 정해두고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돕기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해둔 목표를 이루게 해주셔야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능력과 도움을 달라고 기도해서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응답이라 하고 기뻐하며 뜻을 이루었다 합니다.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육신의 정욕이 있고, 안목의 정욕(보기에 좋은 것)이 있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삶의 목적은 잠시 좋을 수 있지만 마지막은 허망함뿐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과 존재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

에리히 프롬은“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사람의 삶의 방식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사람은‘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즉 어떤 경력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 어떤 배경과 성장 환경을 '갖고 있는지', 자동차는 어떤 것을 타고 다니는지, 집은 몇 평에서 사는지, 이렇게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삶을 말합니다. 현대인들 가운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 하나는‘존재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즉 존재의 의미를 둔다는 말은‘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애쓰지 않고 존재 자체를 즐거워하고 자기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먹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요, ‘존재에 집착한 사람’은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정해진 목적지를 향하여서 끊임없이 나아가는데 그곳은 죽음이라는 이 세상 삶의 종착역입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진행하는 속도가 나이와 비례합니다. 다섯 살 아이는 시속 5마일의 속도로 진행하기 때문에 구경할 것 다하면서 가는 데도 여전히 제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종착역이 영원히 이르지 않을 곳으로 여겨집니다. 스무 살의 청년은 시속 20마일의 속도로 달립니다. 시속 20마일 이래봤자 그렇게 속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직도 창밖을 통하여서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한눈을 좀 팔더라도 인생이란 차를 운전하는 데 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마흔 살 장년의 나이에 이른 사람은 40마일의 속도로 달려가기에 이제는 제법 속도감을 느끼며 자기가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음을 느끼나 아직은 여유가 있는 듯이 주위를 둘러봅니다. 예순 살이 넘어 60마일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사람은 이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딴전을 피우며 운전하다가는 사고가 날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는 이 것 저 것 다 둘러보아도 아직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 모든 사물이 휙휙 지나가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종착역에 이를 것이 점점 가시화됨에 따라 조금은 초조하고 불안하여집니다. 이제 조금 더 나이 들어 팔십이 지나면 이제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90편 10절에서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고 했습니다.

속도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생에 대한 후회감과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을 세상에 대한 불확실함과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생의 종착역 뒤에는 분명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련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생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많아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16절에"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말씀합니다.

존재의 힘이 강한 사람은, 결코 뒤로 미루는 약속을 하지 않고 지금 선택을 결정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부탁이나 제안을 받았을 때, 욕을 먹더라도 거절할 것은 거절합니다. 반대로 힘이 들어도 승낙할 것은 승낙합니다. 그리고는 최선을 다해 임합니다. 또한 외부의 찬사에 그저 담담할 뿐만 아니라 외부의 비판이나 조롱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련을 맞아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잠시 흔들릴 수 있지만, 금방 제자리를 찾습니다. 마치 오뚜기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힘이 날로 자라나야 합니다.

존재의 힘을 기를 수 있는 길은 여러 길이 있겠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은 하늘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갖고 늘 하늘에 잇닿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감싸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2:20)

그리스도가 나를 사는 삶

자기 자신이 자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를 사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사신다는 것이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다시 표현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살면, 그리스도가 나를 사시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작은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는 삶과, 작은 그리스도가 나를 사는 삶은 분명히 차이를 가지게 되는데, 그리스도가 나를 사는 삶은  훨씬 힘이 있고 고귀한 삶이 되는데 그런 삶을 위한 전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빛에 감싸인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13절, 14절에서 바울은 말했습니다.“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일으킨 같은 영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고 있고, 또한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겉 사람이 낡아 간다는 것은 늙어 간다는 뜻입니다. 늙어 가니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가고, 머리는 희어지고, 또한 힘은 쇠약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간다고 합니다. 속사람이란 무얼 의미할까요? 그 사람의 의식이나 내면이나,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 속사람이 나날이 새로워 간다는 것은 의식의 성장이요, 내면의 풍성함이요, 존재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빛에 감싸여 살아갈 때, 우리 존재의 힘이 나날이 자라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힘이 허약한 사람은 외풍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스런 일을 당하면 낙망에 빠지고, 누군가 자신을 조롱하면 뒤집어지고 타인의 찬사를 갈망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지금 행동의 결정을 하지 못하고, 뒤로 미루는 약속으로 회피합니다. 이 과정에서 추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며, 좋은 것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철따라 바뀌고 유행 따라 바뀌는 것은 상대적인 가치는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영원한 가치는 없습니다. 애인의 가치는 나이에 따라 바뀌어도 어머니의 가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은 영원한 것으로서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바라고 우리들의 시선을 하나님에게 두어서 우리 삶을 풍요롭고 가치가 있으며, 기쁨이 있는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적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힘 가운데 가장 큰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이 믿음의 큰 힘은 과학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의 내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과학의 힘은 외부세계를 변화시켰고 우주공간을 정복했지만 인간의 내부세계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힘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이 믿음의 힘은 아름다운 힘입니다. 우리를 뒤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고 우리를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이 되게 하고, 우리를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힘이 있게 합니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낙심하지 말고, 좌절되지 말고, 믿음의 힘으로 이 어려움을 디디고 일어서야 합니다. 좀 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적인 자리에서 희망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패배적인 위치에서 승리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데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려움을 직면할 때 후퇴하는 자세가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진하는 생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힘이 강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우둔한 듯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저 혼이 이끄는 대로, 가슴이 출렁이는 대로 흘러갑니다. 그 와중에서 우주의 신비를 많이 보게 됩니다. 육체의 힘이 강함은 자칫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힘이 강함은 다만 아름다움으로 나타납니다. 존재의 힘은 아름다운 힘입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 여러분의 존재의 힘이 나날이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날로 아름다운 존재의 빛을 발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빛에 감싸이는 사람마다,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지고 따뜻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마감할 때, 여러분 존재의 근육이 많이 커진 모습을 보면서, 대견스러움과 감사한 마음으로 하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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