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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념의 신앙인 야곱 시리즈(5)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창 3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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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무력시위 마하나임

오늘의 주인공 야곱은 지금 20년간 처가살이를 마치고 많은 가족과 재산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금의환향 하면서 무척이나 들뜨고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비록 사랑하는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이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동네 사람들도 야반도주 한 야곱이 20년 만에 큰 부자가 되어 많은 가족을 이끌고 돌아온다며 부러워하겠지" 하는 기대감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도 못 이룰 정도로 야곱을 들뜨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불안감이 야곱의 발목을 잡습니다. 야곱을 그토록 불안하게 한 유일한 이유는 바로 형 에서였습니다. "형 성격에 아무리 20년이 지났다고 해도 나에 대한 원한을 결코 잊지 않고 있을 텐데, 내가 돌아가면 형은 틀림없이 나를 죽이려 할 텐데" 하는 불안감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2장 1절에 보니 그 불안한 귀향길에서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들이 야곱을 찾아와 만납니다. 왜 천사들이 야곱을 찾아온 것일까요? 그것은 불안에 떨고 있는 야곱의 마음을 위로하고 힘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안해할 때 천사가 나타나 친히 위로하고 힘주는 일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여호수아 5:13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치기 전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맡은 천사가 나타납니다. 물론 그 큰 성읍 여리고를 치기 전에 불안해하는 여호수아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고 보면 야곱은 불안해하고 곤고할 때마다 천사를 만나곤 합니다. 정든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길에 벧엘에서 하늘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천사들을 만난 후 용기를 얻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때 야곱을 만나러 온 천사가 여호수아 때처럼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절에도 '하나님의 사자들'이라고 했고, 2절에도 야곱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난 야곱은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진지'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야곱에게 힘주기 위해 하나님이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팀 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이라는 것이 실시되는데 한반도에 비상사태가 일어날 경우를 가상하여 한국군과 미군의 육해공군이 합동으로 연합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훈련을 할 때마다 엄청난 병력이 동원되고 막대한 예산이 사용되는데 왜 해마다 이 훈련을 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북한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함부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될 지 미리 보여주는 무력시위로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전쟁이 일어나도 이렇게 하면 된다고 미리 보여줌으로 안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하나님은 야곱을 위해 수없는 천군천사들을 보내 무력시위, 즉 팀 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 단 한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일을 앞두고 두려워하거나 어려움을 당해 힘들어 할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 위로하고 힘을 주시는데 여호수아나 야곱 같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시 34:7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두려움에 떨 때 영적인 눈을 뜨면 우리를 둘러 싼 천군천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고 힘주기 위해, 나를 위해 보내신 천군천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보내신 천군천사가 우리 한 사람을 둘러싸고 감히 마귀사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무력시위를 하고, 팀 스피리트 연합훈련을 펴고 있음을 분명히 보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해결방법

이제 오늘 시간이 없어서 다 읽지는 못했지만 본문 32장 3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면 공포에 떨던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하기 위해 사용한 온갖 인간적인 방법들이 다 나옵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분명히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위로하고 힘 주셨건만 여전히 야곱은 예전의 모습대로 인간적인 방법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면 야곱이 어떤 인간적인 방법들을 사용했는지 같이 살펴볼까요?

야곱이 사용한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아부 작전'입니다. 3절에 나온 대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먼저 보내 형과 화해를 도모하는데 사자들은 에서에게 가서 지금 동생 야곱이 돌아오고 있으며 형과 간절하게 화해하기 원한다고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자들을 보내면서 야곱이 한 말이 재미있습니다. 4절에 보면 야곱은 형 에서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내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은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으로 종이 주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데 왜 야곱은 형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형의 종, 노예라고 낮춰 부르는 것일까요? 게다가 "형과 화해하기 원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5절)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형을 지나치게 높여주고 자신을 지나치게 낮춤으로 형에게 아부 수준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형 앞에 납작 엎드려 자비와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야곱은 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고생께나 하면서 나름대로 세상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을 터득한 것입니다. 요즈음도 직장에서 너무 지나치게 아부하거나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실제로 이렇게 대할 때 윗사람 중에 별로 기분 나빠 하는 분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효과적인 처세술인 셈이지요. 야곱도 지금 이런 인간적인 처세술을 발휘해 형을 설득하고 화해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인 방법은 실패합니다. 6절에 보면 이 말을 듣고도 에서는 400명이라는 많은 숫자를 거느리고 야곱에게 옵니다. 동생과 화해할 것이라면 이런 대규모 병력을 뭐 하러 이끌고 오겠습니까? "아차, 실패로구나" 생각하니 야곱의 마음은 더욱 불안하고 초조해 집니다.

그래서 야곱이 선택한 두 번째 인간적 방법이 '양자택일 작전'입니다. 어차피 형과 그 부하 400명이 오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아예 자기와 함께 한 종들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누어 에서가 한쪽을 치더라도 남은 한쪽을 건지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말 주도면밀하지 않습니까?

또한 야곱이 택한 세 번째 인간적인 방법은 '기도 작전'입니다. 말이 조금 이상하지요? 기도면 기도지 기도작전은 또 뭡니까? 물론 기도는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앙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본문 9~12절을 읽다보면 야곱의 이 기도도 진정한 신앙적 방법이라기보다 급하니까 나오는 형식적인 기도라는 느낌이 듭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전에 자신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신 것을 회고하면서 지금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왠지 급하니까 하나님께 다그치듯 약속을 지키시라고 요구하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결정적으로 이 기도가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 형식적인 기도라는 증거가 바로 다음에 나오는데 이 기도 후에 야곱이 곧바로 '뇌물 작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진정한 기도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면 곧바로 이런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라고 다 통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기도, 응답 받는 기도는 형식적이거나 급하니까 튀어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내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기도여야 합니다. 또한 진실한 기도를 드렸다면 실제로 지금까지 썼던 모든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야곱은 지금 이런 기도를 못했기 때문에 이 기도조차 인간적인 방법의 한 가지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야곱이 쓴 마지막 네 번째 인간적인 방법은 바로 '뇌물 작전'입니다. 13~21절을 읽어보면 종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눈 야곱은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었는지 형 에서에게 바칠 예물, 엄밀하게 따지면 뇌물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암염소가 이백, 수염소가 이십, 암양이 이백, 수양이 이십,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 암소가 사십, 황소가 열, 암나귀가 이십, 그 새끼나귀가 열입니다. 예물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 아닙니까? 그래서 예물이 아니라 뇌물인 것입니다. 선물과 뇌물의 차이 아시지요? 아무 목적이나 바라는 바 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전하면 선물이지만 뭔가 저 사람에게 바라는 목적이 있어 주면 뇌물입니다. 또 아무리 선물이라도 지나치면 뇌물이 됩니다. 틀림없이 야곱은 이 뇌물을 보내면서 몹시 아까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얻은 재산인데" 싶어 손이 부르르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아빠진 야곱은 계산을 했겠지요. 아무리 많은 예물이지만 나중에 형이 쳐들어와서 빼앗길지 모르는 숫자에 비하면 적은 것이다 싶어 투자하는 마음으로 애써 아까운 마음을 달래며 보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많은 가축들을 세 떼로 나누어 각각 시간차를 두고 떠나게 합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렇게 하면 숫자가 더 많아 보이기도 하고 또 형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는 효과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음식점에서 고기 시킬 때 한꺼번에 9인분 시키는 것보다 3인분씩 세 번 시키는 것이 더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무게를 재보면 똑같은데 말이지요. 이런 식으로 에서도 선물을 받되, 한 번 받고 그 뒤에 또 받고 또 받고 세 번 받으면 훨씬 많이 받은 것 같고 기분도 더 좋을 것이라는 점까지 계산해 야곱이 이런 계획을 짠 것입니다. 대단히 주도면밀하고 계산적인 야곱입니다. 얼마나 인간적으로 철저한 방법을 세웁니까?

신앙적인 해결방법

그런데 이런 4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다 쓰고도 여전히 야곱의 마음속에 불안이 가시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온갖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짤지라도 일이 뜻대로 안 되니 문제 아닙니까? 만약 이런 식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면 세상에 문제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처럼 사람의 뜻대로 계획대로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무능력을 절실하게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야곱은 이런 인간적인 방법을 다 쓴 후에도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22절에 보면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그 모든 소유를 인도해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한 후 홀로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끔 혼자 남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다 떠나가고 어쩔 수 없이 혼자 남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나 혼자 남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어려움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꾸 누군가를 만나 의논하고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물론 이런 방법도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정말 문제가 안 풀린다 할 때는 혼자 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일상생활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로부터 잠시 떠나 혼자 남는 것입니다. 혼자 남아야 깊이 생각할 수 있고, 혼자 남아야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러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까닭이 바로 야곱처럼 홀로 남는 경험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홀로 남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야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경선에 떨어진 정치인이 절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이렇게 조용히 혼자 남는 것을 잘합니다. 하지만 혼자만 계속 있으면 더 두려워지고 더 불안해져서 심지어 홀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혼자 남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혼자 남은 후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조용히 혼자 남은 뒤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래서 지금 야곱도 가족을 먼저 보낸 후 혼자 남아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24절부터 보면 홀로 남은 야곱과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였다고 하는데 문제는 이 '어떤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어떤 사람'이 천사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 야곱을 축복한 것을 보면, 게다가 씨름을 한 뒤 야곱이 얻은 이름이 '이스라엘'인데 그 뜻이 '하나님과 겨룬 자'이고, 나아가 야곱이 씨름한 그곳 이름을 '브니엘' 즉 '하나님과 대면하였다'고 지은 것을 종합해 보면 역시 야곱과 씨름한 '어떤 사람'은 천사라기보다 하나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을 할 수 있는가? 구약에서는 종종 하나님이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으니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튼 이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은 환도 뼈(골반을 형성하는 한 쌍의 좌골 뼈)가 위골(탈구)되는 상황에서도 결코 그 분을 놓지 않습니다. 날이 새 가니 가게 해달라는데도 야곱은 "나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 못 간다"며 붙잡고 늘어집니다. 여러분, 야곱이 누굽니까? 움켜쥐는 것이 주특기라서 이름도 야곱이라고 지은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형의 발꿈치를 움켜잡던 야곱이, 장자권을 움켜잡고 가족과 재산을 움켜잡던 야곱이, 세상적인 목적만 움켜잡던 야곱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들을 움켜잡기 위해 온갖 인간적인 방법을 다 쓰던 야곱이, 이제 그 주특기를 발휘하여 이제는 세상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을 움켜쥐게 된 것입니다. 놀랍고도 감격적인 변화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근본적인 성격은 안 바꾸신 채 그것을 그대로 이용해 사용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얍복강가의 체험을 통해 남의 발목이나 잡던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집념의 성격을 가진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통해 율법을 향한 집념을 복음을 향한 집념으로 방향만 바꾸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이 얍복강 사건, 다메섹 사건이 필요합니다. 내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내 인생의 가치관과 목적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을 그 사건을 여러분은 경험하셨습니까? 이 얍복강 사건을 통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남의 발목이나 잡던 사람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33장에서 형과의 화해 문제도 극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곤고한 때가 찾아옵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발버둥 쳐도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닥쳐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본문은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제일 먼저 영적인 눈을 떠서 나를 둘러싼 하나님의 군대, 천군천사를 발견하고 힘을 얻는 일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 모든 문제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홀로 남는 일입니다. 그리고 홀로 남는 것으로만 끝나지 말고 하나님을 1:1로 만나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입니다. 기도로 씨름합니다. 그냥 씨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러지더라도, 붙잡은 기도의 손을 놓치지 말고 축복하실 때까지, 응답하실 때까지 안 놓겠다는 자세로 붙들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고난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과의 씨름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의 이름을 얻게 되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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