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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선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2) (사 49:6, 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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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끝을 바라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마음입니다. 땅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땅끝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과 삶과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아펜셀라 선교사도 땅끝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복음이 조선땅에 전해졌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몽골에 다녀왔습니다. 16년 전에는 몽골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서너 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3, 4만 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적인 축복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200여명 한인 선교사들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들 가운데는 14년 전부터 몽골에 가서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윤순재 이계심 선교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박치원 장로님의 동서인 윤순재 이계심 선교사 부부는 공중에서 갑자기 떨어진 사람들은 아닙니다. 한국 민족과 사회와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쳐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시다가 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이신 이영춘 장로님과 김금련 권사님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어제 전북 군산에서 거행된 김금련 권사님의 하관 예배 장소에서 사위 되는 윤순재 선교사가 오늘 자기가 있게 된 것은 장인과 장모 때문이라고 진솔하게 고백을 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신기하게 흐릅니다. 이영춘 장로님과 김금련 권사님의 몸 속에 흐르던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지금 그들의 자녀들의 몸 속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몸 속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죽음이 조선의 역사 가운데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주일 조선 땅에 떨어져서 죽은 한 알의 밀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66년 9월 5일 흑암과 사망의 땅이었던 조선에 와서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고 성경책을 던져주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대동강 변에서 조선 관군에 의해 칼에 찔려 순교를 당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국 웨일스 출신의 토마스 목사는 27살의 젊음을 불사르며 조선 땅에 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던진 성경책을 읽고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고 장로가 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는 이야기와 그가 뿌린 순교의 피가 조선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죽음이 조선의 역사 가운데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 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므로 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선에 복음이 전해진 ‘조선 선교 행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1882년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맺어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 한지 16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1882년에 맺어진 조미 통상조약은 조선과 미국 두 나라의 관계 개선뿐 아니라 선교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조미 통상조약으로 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미 통상조약이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사건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랄 셔먼 호의 대동강 변에서의 피습 사건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1867년과 1868년에 미국 전함을 보내 사건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진상을 조사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고 조선과의 통상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1882년에 조선은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은 조선에 선교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미 수호 통상조약은 선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인들의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으므로 미국 사람들이 조선에 와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의료 선교 사역을 하고 있던 호레이스 알렌 의사가 1884년 개신교 의료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1884년을 한국 기독교의 시발점으로 잡기도 합니다. 호레이스 알렌 의사는 미국에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한 후 1883년 상하이에 파송되어 1년 동안 의료 선교사로 활동을 하다가 1884년 9월 20일 조선에 와서 의료 사역을 하면서 선교의 길을 닦았습니다. 알렌 의사가 직접적인 선교를 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선교의 환경을 조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렌을 가리켜 조선 선교의 세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알렌 의사가 중상을 입은 조선 수구파의 거두인 민영익의 생명을 구하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결국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했습니다. 알렌 의사는 1905년까지 조선에 체류하면서 의사와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 등으로 일했는데 고종 황제로부터 훈장을 세 번이나 받을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얻었습니다. 알렌 의사는 조선에 선교의 환경을 조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1885년 4월 5일 아펜셀라 선교사가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항에 착륙했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아침 감리교 목사인 아펜셀라 선교사와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 항에 착륙한 사건은 조선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1885년을 한국 기독교의 시발점으로 잡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사건도 1882년 조미 수호 통상조약의 결과로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조미 통상조약이 맺어진 이후 미국 안에서는 조선에 대한 선교적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선교적 관심의 주인공으로 떠 오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헨리 아펜셀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시대적 흐름과 개인적 소명이 만나는 일은 참으로 오묘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고 시대적 요청의 소리를 들으며 거기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헨리 아펜셀라였습니다.

  헨리 아펜셀라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주 소다튼이라는 마을에서 아펜셀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의 기도와 가르침을 받으면서 신앙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새와 짐승과 자연을 사랑했고 특히 땅에 대한 애착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18세 때 중생의 체험을 했고 20세 때 프랭클린 마샬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23세 되던 해인 1881년에 선교에 헌신을 했습니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생애의 야심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전체를 바치는 데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882년에는 드루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와 선교사의 길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조미 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이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신학생들은 자기 나라와 새로 조약을 맺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도대체 지구의 어디쯤에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들에게 비쳐진 조선은 ‘은둔의 나라’요 '말라리아 모기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조선에 간다는 것은 미개한 무서운 나라에 목숨을 걸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펜셀라는 조선에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1884년 12월 아펜셀라는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고 같은 달 약혼녀였던 리쮜양과 결혼을 했습니다. 한 달 후인 1885년 1월 14일 두루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은 아펜셀라 부부를 위해 성대한 환송 예배를 드려 주었습니다. 아펜셀라가 27살 되던 해였습니다. 아펜셀라 부부가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조선으로 가려고 기차를 탈 때 신학교 학생 전원이 역에 나와 찬송가를 부르며 전송을 해주었습니다. 아펜셀라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1885년 2월 2일 감리교 선교부의 파울러 감독에게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 다음 날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펜셀라 부부와 스크랜턴 부부와 스크랜턴의 어머니등 다섯 사람은 1885년 2월 3일 아라빅호에 몸을 싣고 지루한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아펜셀라 선교사는 일본에 잠시 머무는 동안 박영효라는 사람에게서 조선말을 배웠는데 조선말이 너무 어려워 조선말을 가리켜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뱀과 같은 괴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아펜셀라 부부는 3월 23일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4월 2일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부산을 떠나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상륙했습니다. 이 배에는 미국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아펜셀라 목사는 인천에 도착한 즉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써서 미국 감리교 본부에 보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날 아침 여기 왔습니다. 이 날 죽음의 철장을 꺾으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였던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써 자유와 빛 속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펜셀라 부부가 조선에 왔을 때 갑신정변의 충격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청일 두 나라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습니다. 결국 아펜셀라 부부는 여자가 지금 서울에 가기는 적절치 않다는 미국 공사의 권면으로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2달 동안 그곳에 머물며 기다렸습니다. 조선의 국내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아펜셀라 부부는 제물포를 거쳐 7월 17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아펜셀라 부부의 선교 사역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은 선교는 고사하고 그저 조용히 있어야만 했고 무엇을 먹고 살 가를 걱정하여야만 했습니다. 마치 처음에 몽골에 갔던 한인 선교사들이 선교는 고사하고 굶어 죽지 않기를 바랬고 쫓겨나지 않기를 바랬던 것과 비슷했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 부부와 아펜셀라 선교사 부부에게는 굶어 죽지 않는 것이 기도 제목이었고 쫓겨나지 않는 것이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1885년 조선에 온 스크랜턴 선교사의 부인은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을 조심 조심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우리 나라 대표들에게서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우리는 아무래도 이 나라에 올 때 가진 포부를 실현할 것 같지 못했다. (중략) 선교사들이란 세상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니 '무엇을 먹을 가' 걱정하여서는 안되겠지만 조선에 맨 처음 왔던 선교사들은 첫 여름을 겪는 동안 먹을 걱정을 아니할 수 없었다. 나무 통속에 넣어오는 음식물이 아주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면 거의 썩어서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가축들 중에는 병든 것이 있다고 해서 먹지 못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먹을만한 감자와 채소도 없었다. 그러나 닭고기와 달걀은 있었다. 외모로는 조선의 닭과 계란은 우리 나라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그 맛은 이 나라와 우리 나라가 다르듯이 아주 딴판이었다. 그래도 닭고기와 달걀은 먹었다. 하루만도 아니고 이틀 닷새 열흘만도 아니었다. 아니 한 달 내내 두 달 내내 나중에는 콧구멍에서 닭 냄새가 나도록 먹었다." 우리는 여기서 조선에 온 선교사나 몽골에 간 선교사가 먹고 사는 문제부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살면서 아펜셀라 부부는 선교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펜셀라 부부는 조선의 배타적인 정세를 고려하여 본격적인 선교 사역보다는 교육 사역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방편으로 교육 사역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면서 그들과 접촉하며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배재학당’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학생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서양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경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펜셀라 선교사는 거리에 나가서 거지 아이들을 불러 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지 아이들을 데려다가 밥을 먹여주고, 옷을 해 입히고, 이부자리를 해 주면서 영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배재학당이 아닌 배재 고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배제 고아원이 조선의 신 교육의 시작이 되었고 배재학교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어린이들을 유인하여 몰래 삶아 먹고 눈알을 뽑아서 약으로 쓴다는 헛소문까지 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졌고 결국 고종 황제는 이듬 해인 1886년 6월 친히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하사하며 그의 교육 사업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아펜셀라 선교사가 조선에 와서 전도 사역 보다 교육 사역에 치중한 것은 현명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은무 선교사가 30여 년 전 인도네시아 정글에 가서 먼저 학교를 세운 일과도 같았고, 윤순재 선교사 부부가 14년 전에 몽골에 가서 먼저 울란브트라 대학을 세운 것과도 같았습니다. 아펜셀라는 요란한 출발보다는 조용한 시작을 원했습니다. 아펜셀라는 조선 사람들에게 먼저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심어주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전도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아펜셀라는 차츰 접촉하는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일대 일로 조용히 전도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의 전도를 받았던 신홍우 박사는 아펜셀라의 인품과 전도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아펜셀라씨를 처음 보니까 부드러운 음성과 인자한 말씨로 기쁘게 맞아주었기 때문에 그 분에게서 배우기를 원했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가니까 음악도 가르쳐 주었고 그리스도의 얘기를 조금씩 해 주었습니다. 구약에 있는 얘기도 재미있게 듣게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은 공자나 맹자의 말씀에 비하더라도 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1년 2년이 지나자 예수를 믿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가 지적한 대로 선교는 말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진실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아펜셀라의 첫 해의 선교 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지난 1년은 불안한 한 해였으며 많은 기도를 한 해였고 우리 사역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해로 기록된다. 이 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아펜셀라는 점점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했는데 1887년에는 배제학교의 건물을 세웠고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했습니다. 1888년에는 그의 전도 사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황해도를 비롯한 여섯 도를 순회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아펜셀라의 목회와 선교의 원리는 언제나 약자와 고난 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었고 독립 투사들을 뒤에서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겸손과 예의를 갖춘 모습을 지녔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아펜셀라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의 주의도 끌 수 있는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얼굴은 붉으스레하여 매우 건강해 보였으며 언제나 미소를 띠고 그의 인사성은 항상 공손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는 그 특유의 유머로 주위 사람들을 언제나 즐겁게 해 주었다." 아펜셀라의 이와 같은 적극적이고 부드럽고 개방적인 성격 때문에 그의 집과 학교와 교회에는 항상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래서 항상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합니다.

  셋째, 1902년 아펜셀라는 목포 앞바다에서 순직하므로 그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아펜셀라 선교사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에 와서 17년 동안 복음과 사랑을 전하다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그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1902년 어느 날 서울 근교의 무치내 교회로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철도청 공사장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일본인 노동자 두 세 명이 아펜셀라 일행을 가로 막고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펜셀라는 얼굴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아펜셀라 선교사는 병원으로 실려와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펜셀라 선교사는 완전히 치료도 받지 못하고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비서와 정신학교 여학생 하나를 데리고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했습니다. 짙은 안개 속을 달리던 배는 일본 상선과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펜셀라 선교사는 자기가 데리고 가던 비서와 여학생을 구해내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아펜셀라는 자기를 살리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자기를 살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수영에 능숙했을 뿐 아니라 자기를 살릴 수 있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을 그가 위해서 온 조선 사람 두 명을 살리려고 하다가 자기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정신을 나타내 보인 것이었습니다. 이 숭고한 사랑과 희생의 순직의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거운 눈물로 적셨습니다. 이 소식이 감옥에 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전해지자 모두 통곡을 하면서 슬퍼했습니다. 평소에 아펜셀라 선교사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이승만 박사는 땅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종일 울었다고 했습니다.

  아펜셀라 선교사의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삶과 죽음은 이 땅에 복음을 널리 전하는 매체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나라에 감리교회를 세우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의 딸 아펜셀라 양은 스크랜턴 선교사가 세운 이화대학의 학장으로 봉사했고 그의 아들 아펜셀라는 배제 학교의 교장으로 봉사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데는 희생적인 삶과 죽음이 요구됩니다. 몰공에 복음이 전해지는 데로 다섯 명의 한인 선교사들의 순직이 요구되었습니다. 김성호, 서지연, 신승호, 김명진, 최순기 선교사가 몽골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곳에서 순직을 했습니다. 아펜셀라 선교사는 1902년 순직했습니다. 특별한 관계는 없겠지만 그가 생명을 잃은 1902년에 한경직과 손양원과 유관순이 태어났습니다. 역사는 오묘하고 신기하게 흐릅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도 어두움과 사망의 땅에 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을 바친 선교사님들에게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지혜롭고 행복한 제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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