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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자의 스태미나 (사 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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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리더쉽과 기독교적인 리더쉽을 잘 조화시킨 죤 멕스웰은 ‘조직체를 성장시키기 원한다면 확장하려 애쓰지 말고 조직원들의 마음을 바꾸라. 그러면 하루에도 10%이상의 성장이 가능하다.’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의 태도만 바꾼다면 놀라운 일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어려운 이민사회를 살면서 ‘내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가?’, ‘하나님은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는가?’, ‘왜 이렇게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당신이 그런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단순한 인생적인 답변을 한다면 당신은 사명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갓난 아이를 축복하는 기도를 한다. 그때마다 나는 ‘생물학적인 전도에 열심히 하라’고 부탁한다. 그것은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아이를 적게 낳으려는 경향이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최소한 세명은 낳으라. 네명을 낳으면 성지순례(?)를 보내 주겠다’라는 우스운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모든 아이들은 각자의 분복을 가지고 태어난다. 땅에 가서 이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오라는 뜻이다. 이사야50장4절을 보면 ‘학자’라는 단어가 나온다. 물론 이사야 선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학자’란 배우는 사람, 즉 제자라는 뜻이다. 이제 이사야 선지는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분복과 사명을 주셨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다.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능력을 받고, 그리고 축복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맛이다. 우리의 사명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맛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맛은 말씀의 맛이기도 하다. 곤핍한 자들에게 평안을 주고 상한 자들을 치유하며 믿음이 없는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사명자의 사명이다. 또한 믿는 자들이 서로 교제하게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게하는 것이다. 오늘우리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 사명자들이 먼저 말씀의 맛을 보아야 한다. 4절을 보면 ‘아침마다 깨우치시되’라는 말씀이 나온다. 아침부터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종일 이를 붙잡으며 삶 속에서 소화하며 그 맛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쉽게 익숙해지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깨우침을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매순간 깨우친 이 말씀을 생활의 현장에서 전하라고 하신다. 깨우친 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한국에서는 불교와 천주교가 성장하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오히려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 원인은 기독교인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을 보고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의류업을 하고 있는 한 성도가 있는데 그 분은 손님들에게 물건을 파는 과정 중에 그들을 알아가기를 노력한다고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그 분은 자신의 가게를 단순히 옷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장소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스테미나’라는 것이 있다. ‘스테미나’란 어려움을 버티는 영적인 힘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리적인 힘과는 다르다. 말씀을 깨닫고 이대로 행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했다. 그렇게 살면 우리에게 이 ‘스테미나’가 넘치게 된다. 바이론이라는 시인은 ‘인생은 마치 누런 잎사귀같다. 꽃과 신선한 잎사귀는 모두 사라지고 벌레가 먹은 잎사귀와 줄기만 남았다.’라고 한탄하였다. 어떤 사람은 ‘하루 24시간을 무엇으로 메꿀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명없는 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죤 웨슬리와 같이 큰 사명자는 ‘전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받아드리고, 전 성경을 내 생명의 책으로 인정하고, 전 교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전 세계를 복음 전파의 지경으로 삼는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번에 테러를 자행하려던 모슬렘 청년들이 영국에서 붙잡힌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미국을 사탄의 나라라고 여기며 그들을 공격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사명감인가?  우리가 올바른 사명을 갖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올바른 사명감을 깨닫고 그것에 발동이 걸리면 우리의 인생은 가장 의미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현실을 보자. 우리가 이런 인생의 사명을 감당할 때마다 순탄하게 잘 진행이 되는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6절을 보자. 세상은 나를 때릴 것이고 수염을 뽑고 뺨을 때리며 수욕과 침을 뱉을 것이다. 이것이 사명자의 사명 앞에 다가올 난관들이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사명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수록 많은 난관과 비난을 만나게 된다. 일을 많이 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주로 사명을 모르는 사람들때문에 오는 핍박이 많다. 사명감을 모르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욕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비난이 오고 핍박을 받아도 문제를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7절을 보자.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을 부싯돌과 같이 굳게 하신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실수하면 고치면 되고 잘못해도 다시하면 된다. 에베레스트 선을 정복한 한 사람이 정복한 이후에 ‘나는 산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정복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명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복하도록하는 사람이다.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전쟁에서 양측은 모두 용맹스럽게 싸웠다. 하지만 영국군이 용감하게 5분을 더 지속했기 때문에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권투선수가 승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말 중에 ‘한 라우드만 더 싸우라. 그러면 이길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One round more’ 이것이 사명자로 살면서 삶을 이기는 방법이다.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매가 까마귀들의 공격을 받을 때에 매는 결코 그들을 상대로 정면으로 싸우지 않는다. 매는 단지 높은 하늘로 유유히 올라간다. 그러면 까마귀들은 어느 선에서 매를 쫓아가기를 포기한다고 한다. 사명자들의 삶도 이렇다. 절대로 정면 승부를 하지 않는다. 그를 핍박하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상대로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는다. 사명에 집중하며 버티다보면 새벽이 오는 것이다. 비난, 상처, 고통, 실망, 그리고 배신이 공격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정직하고 성실하자’라는 신념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방해가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결코 꺾기지 않고 맡겨주신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 이것이 사명자의 삶이며 ‘영적인 스테미나’이다.

그렇다면 이 ‘영적인 스테미나’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4절, 5절, 그리고 9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라는 말씀이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다. 원천은 주 여호와이시다. 10절을 보자.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뢰할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실천하게 하시니 우리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전능자가 연결되기만 한다면 생명, 승리, 그리고 축복이 연결되어, 주위 환경을 극복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된다. 이민생활 중에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여호와께 cord를 꽂고 그와 연결되자. 지금 비록 흑암 중에 있더라도 그를 의뢰함으로 능력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로써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영적인 스테미나’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 힘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이다. 당당하고 자신있게 살며, 온 힘을 내어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 이사야40장31절을 보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시어 그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돕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삶의 현장에서 왜 내가 여기에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면 이같은 하나님을 기억하자. 어떤 난관이 와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자. 예수 그리스도가 겪었던 고난을 기억하고 내게도 얼마든지 고난과 핍박이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자. 그리고 내 얼굴을 부싯돌과 같이 굳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자. 하나님이 주시는 활력을 받아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권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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