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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18> “미아 신세 민족 살리자” 전국복음화운동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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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전도신학과 전도원리,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미국 에즈베리신학교 로버트 콜먼 교수였다. 그의 ‘주님의 전도계획’은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이다. 1965년 나는 전도신학과 원리를 적용할 기회를 얻게 됐다. 기독교 전래 80주년을 기념해 전국복음화운동이 발족된 것이다. 나는 기획과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표어는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였다. 우리는 민족의 현실을 길 잃은 미아 신세로 인식했다. 그래서 민족의 살길을 복음화운동에서 찾기로 했다.

운동본부는 64년 가을부터 발기위원회를 두고 한경직 목사와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을 명예위원장으로 위촉했다. 또 감신대 홍현설 학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77인의 중앙위원과 33명의 실행위원을 구성했다. 나는 17개 분과위원회로 구성된 전국복음화운동의 조직을 담당했다. 61개 지역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을 맡아 전국을 다녔다.

전국복음화운동에서는 전도 책자와 전도지 374만부가 배포됐고 매일 정오마다 공동기도문으로 일제히 기도하는 캠페인도 진행됐다. 전국 모든 교회와 기독교 학교, 병원과 군대, 교도소까지 참가했다. 서울에서만 500개 이상의 전도 집회가 연쇄적으로 열렸다.

전국복음화운동의 하이라이트는 초빙강사 조세광 박사의 전도 집회였다. 그는 중국이 낳은 위대한 전도자였다. 상하이 출신으로 2차 대전 이후 홍콩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에 앞장선, 아시아 선교운동의 선구자였다. 그의 설교는 탁월했고 능력이 넘쳤다.

5월 1일부터 전북 김제를 시작으로 45일간 순회 집회를 열었다. 서울 배재고 운동장에서 개최된 집회에는 매일 5000명이 몰렸고 마지막 날에는 학교 담장이 무너질 정도로 사람이 운집했다. 그날은 폭우가 쏟아지며 극심한 가뭄도 해소됐다.

조 박사는 당시 방송에 출연해 “내가 온 것은 6%의 한국 기독교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94%의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한국 민족을 위해서”라고 말해 모두를 감동시켰다. 그의 설교는 쉬웠다. 어려운 말이 없었고 ‘예수는 누구인가’를 시작으로 ‘최후의 대심판’을 열정적으로 전했다. 나는 이때 교회가 모든 반목과 분열의 길에서 돌아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도를 통하는 길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한편 당시 교계에서는 ‘한일협정 반대 기독교 구국대책위위원회’가 조직됐고, 영락교회에서 ‘한·일 굴욕외교 반대 기독교 구국대회’가 열렸다. 나는 이 대회 강사로 지목됐다. 반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던 터라 강사 지명을 사양하지 않았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고 방송은 내 강연의 매서운 부분을 보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무장관 양찬우에게 나를 즉시 구속하라고 지시했다. 구속 대상은 나만이 아니었다. 한경직 강신명 목사도 리스트에 올랐다. 중앙정보부의 압력이 워낙 거세 대회 간부였던 강원용 전경연 목사 등은 한걸음 후퇴했다. 정보부가 ‘기독교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북한 간첩이 스며들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만 홀로 남았다.

나의 구속은 내무차관이었던 김득황 장로가 막아줬다. 그는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고 아버지의 광복군 시절 부하였다. 사법처리는 면했지만 정보부는 법무부를 통해 나에게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고 정보기관의 감시하에 두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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