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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란이 떠나지 않는 이유 (삼하 13: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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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잠 못 이루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아마도 더위와 전쟁을 치루는라 지쳐있을법한 성도 여러분들께 주안에서 강건함을 회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름을 맞으면서 함께 다짐했던 것처럼, 더위를 피해다니는 소극적인 자세보다는 더위를 이겨보자고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이 여름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에 갓피플닷컴이라는 기독교포털사이트에서 "왜 성도들이 예배에 지각할까? "에 대하여 설문 조사를 벌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일 큰 이유는 약 15%의 성도들이 게으름을 피다가 예배에 늦는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부자리에서 뒹굴뒹굴 하면서 5분만 더, 10분만 더 하다가 늦는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 이유는 약 13%의 성도들이 습관적으로 지각한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사회에서 처신하는 법을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당신이 어떤 모임에서 주목을 받으려면 적어도 약속된 시간에서 5분 정도는 늦게 가라는 제안을 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책을 가리켜 마음의 양식이라고 말하지만, 이제는 서점에 있는 책들이라 하더라도 마음의 독이 될 수 있는, 아주 잘못된 가치관을 제시하는 책들도 범람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로는 약 12% 정도의 성도들이 가족의 준비를 기다리다가 늦는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아내들이 부지런한 게 사실이죠? 남편들은 10분 정도이면 몸단장을 끝낼 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오히려 지각의 유혹이 되기도 합니다. 아내는 준비 다하고 있는데 남편은 아직도 미적거립니다. ‘양치질해요. 세수해요. 양복 입으세요....’

대충 대충 입고 가려고 남편에게 ‘여보, 예배인데 양복은 입어야지요' 슬리퍼 끌고 가려는 남편에게 ‘구두를 신어야지요’ 이런저런 잔소리 해가면서 겨우겨우 챙겨나오다 보면 예배시간에 늦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때론 아이들의 준비로 늦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네 번째로 약 11%의 성도들은 토요일날 늦게까지 TV 시청이나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주일 새벽에야 잠이 들었기 때문에 예배에 늦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토요일 10시면 대낮과 같다고 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이들이 주일 오전 예배에 정상적으로 참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도 같은 상황이어서 주일 예배를 오전9시에서 11시로 옮겨달라고 하는 건의도 심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환경적 요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심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러한 통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네 가지 이유 중에 긍정적 이유가 있다면 그래도 예배에 참석키 위해 준비하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늦었다는 것 말고는 모두 부정적인 이유인데, 약 51%를 차지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다윗의 일생 중에 가장 슬픈 이야기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부모로써 겪을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마음 아픈 사건을 겪은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중국의 어느 부부는 결혼하지 15년이 지나서 우연히 고향마을을 찾았다가 자신들이 남매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미 4 남매를 둔 그들로서는 참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주 어릴적에 헤어진 이후 청년이 되어 부부로 만났는데 알고보니 남매였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윗의 경우는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경우 어떻게 그 일을 받아들이고 또 그 일을 해결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고민속에 한가지 중요한 원인을 분석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아버지 다윗의 삶의 모습입니다. 단순히 아내를 하나만 얻었으면 그래서 왕후가 한 명 뿐이었다면 그런 문제는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아버지 다윗이 걸어온 발자취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슴입니다. 문제는 거기에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정욕의 노예가 된 암논은 다윗의 장자였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에게 다음 왕권이 주어질 것입니다. 야심이 컸던 압살롬은 세 번째 왕자였습니다. 이 두사람 사잉에서 줄타기를 하며 정치적 야심을 채우던 사람이 바로 다윗 왕의 세 번째 형인 삼마 혹은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었습니다. 암논과 압살롬, 그리고 요나답은 결국 친구이면서 사촌지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암논은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이고, 요나답은 신하로써의 처신을 해야할 위치로 보면 하늘과 땅이었습니다. 암논이 이복동생 중에 다말이라고 하는 누이 동생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선을 넘어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물론 육체적인 정욕의 에로스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14절 이후에 다말을 범한 이후에 다말을 내어 쫓은 일에서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듯이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그를 간절히 원했던 것은 인격적, 도덕적인 바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육체에 끓는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동물적인 사랑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사랑일수록 그를 차지한 후에는 버리는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암논이 그런 일로 인해서 마음의 병이 걸렸습니다. 1부예배 때 찬양대 보고 그게 무슨 병이냐고 하니까 금방 답이 나옵디다. 상사병. 우리 젊은이들, 꿈지기들에게도 물어보니까 짝사랑. 저쪽은 생각도 안 하는데, 나는 괜히 거기만 쳐다보면 마음이 두근거리고, 이름만 보아도 생각이 그냥 막 복잡하고 그렇지요.

수련회 가는데 그 친구가 가면 무조건 가는 것이고, 그 짝사랑하는 친구가 안 가면 무조건 안 가는 거예요. 방학끼고, 다른 아르바이트도 안 하고, 다른 스케줄도 없는데 그냥 안 가지요. 부모는 알 까닭이 없지요. 나중에 보니까 짝사랑 안하는 친구가 안 가는 거지요. 부모도 알 수 없는 이유가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이번 수련회 안 가는 형제 자매들이 짝사랑 때문에 안 간다는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 나목사님은 지금 얼마나 마음이 타겠습니까? 우리 정사파이야 부장선생님도 얼마나 마음이 타겠습니까? 다 가야 될텐데... 이 친구도 가야 되고, 저 친구도 가야 될텐데, 안 간다고 그럴까? 굉장히 마음이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오전부터 우리 젊은이들이 기도한 줄 압니다만은, 할 수 있거든 모든 형제 자매들이 수련회에 참여하기를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나답이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서 간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적 판단이 빠른 사람입니다. 같은 사촌지간이지만,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고, 친구 지간이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내가 이 친구에게 어떻게 함으로써 이 친구가 왕이 되었을 때 내가 권세를 틀어잡을 수 있을까? 그는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암논이 다말로 인해서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왜 병이 들었습니까?’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것 가지고 걱정합니까? 내가 해결해 드리지요.’ 그리고 대책을 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죄 짓는 방법을, 범죄의 비결을 그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리고 암논은 이 요나답이 알려준 방법대로 그대로 수행하면서 아버지도 속이고, 누이동생도 속이고, 모든 사람을 속였습니다.

죄를 지으려면 많은 사람들을 속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범죄의 길을 가고, 세상의 길을 가려면 여러 사람들을 속여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려고 하면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요?

오늘은 이 모습에서 암논과 이 요나답의 모습에서 은혜의 자리를 떠난 삶의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가를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답이 알려준 방법대로 암논은 다말을 범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는 그만이었습니다. 그를 책임질 만한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었고, 그는 대낮에 누이동생을 내어쫓았습니다. 나가지 않겠노라고, 이런 행동은 아까 나에게 행한 악보다 다 큰 악이라고 그렇게 충고했지만 그런 충고도 들을 만한 암논이 아니었습니다.

다말은 울면서 암논의 처소에서 나갔습니다. 공주들은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그래도 같은 형제라도 남자들은 이 공주들이 거하는 궁에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아버지로 하여금 다말이 암논의 처소에 오도록 그렇게 간사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는 채색옷도 찢겼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머리에 썼던 베일도 벗겨졌습니다. 여성으로써 모든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세워줬던 베일도 벗겨졌습니다.

대낮에 그를 쫓아냈습니다. 같은 형제였던 압살롬이 자기의 누이동생이 그러한 환경에 처해있음을 듣고서 누이동생을 자기의 처소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시방은 잠잠한지라. 압살롬 3번째 아들입니다. 자기에게 왕권이 오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 이 압살롬은 이번 사건을 통해서 무언가 자신이 재기 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로 삼으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요. 버선목 뒤집어 보듯이 내 마음을 뒤집어 보여주면 좋겠는데 하면서 그렇게 안타까워 하는 분들이 있어요. 혹 이 자리에 점잖이 앉아계시지만 혹 생각은 엉뚱한 생각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좀 엉덩이를 붙이시고, 저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성경 볼 것 없어요. 이 시간에 주보에 광고 볼 것 없어요. 광고 그렇게 해도 엉뚱한 소리 합디다. 광고에 주일날 오후에 담임목사님 어느 교회 집회 갑니다. 암만 광고해도 ‘목사님, 어디 가세요?’ ‘나 집회 가잖아. 주보 못 봤어?’ ‘아, 예’ 엉뚱한 소리 합니다. 광고는 광고 시간에 같이 보면 됩니다. 집중할 때 해요. 지금은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말씀 시작하면 성경 읽는 사람이 있어요. 아주 고약한 사람이지요. 차라리 나가세요. 말씀을 들을 때는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지금 압살롬은 자기 여동생이 그런 엄청난 일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장자라는 사실을 알면서 장자의 기회를 겪을 생각을 했습니다. 잠잠하자. 저는 21절을 주목합니다. 21절은 다윗이 자기 형제들간에 일어난 이 모든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심히 노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성경을 읽어보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화를 낸 것으로 그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상황이라면 여러분이 화를 내면서 나쁜놈들, 나쁜자식들 하면서 그만두겠습니까?

이 가정의 엄청난 혈육의 투쟁과 살육이 벌어진 것은 다윗, 아버지의 책임입니다.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잘못된 범죄를 보면서도 그냥 화를 내는 것으로 그만 두었던 다윗의 책임. 우리는 성경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압살롬이 2년 후에 하면서 23절에 압살롬이 비로소 행동을 취하는 모습을 봅니다.

저는 왜 압살롬이 2년을 기다렸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보았습니다. 대체로 2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압살롬이 2년을 기다린 이유, 순수하게 첫 번째는 아버지 다윗왕의 처리를 기다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셨으니까 아버지가 해결하시겠지. 아버지가 나라의 왕일 뿐 아니라 재판장이시니까 아버지가 해결하시겠지. 아버지 다윗이 재판장으로써 왕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2년이나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입장을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다윗으로서는 어떻게 행동할 수가 없었겠다. 그 자신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할 때 그 자신이 나단선지자를 통해서 양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으면서 가난한 양 한 마리, 자식처럼 간수했던 그 양 한 마리를 빼앗아서 부자가 손님을 대접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단선지자의 말을 막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이야기를 안 들어도 그 나쁜 놈은 죽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왕으로써, 재판장으로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형이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윗의 판결이 아니라 이미 레위기 20장에 보면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죽이라고 되어 있어요.

다윗은 그 성경을 알고 있었고, 그런 범죄를 한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나단 선지자 앞에서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단선지자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던 다윗, 하나님에게 죄의 용서함을 받았지만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던 다윗이었기에 자신의 아들이 그런 일을 행하였을 때에 레위기 말씀에 의하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사형선고를 내려야 하는데, 그는 내리지 못했습니다. 2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그냥 보냈습니다.

그냥 집안에서 흐지부지 되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동안에 압살롬은 이제 2년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은 아버지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 내기 시작을 했습니다.

자기 목장에 양털을 깎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년에 2-3차례 양털을 깎는 일이 있었는데, 그는 2년동안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기다렸습니다. 그는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2년이 돌아오고 나서 축제입니다. 모든 축제에 그는 왕을 찾아가서 왕과 모든 왕자들이 자기의 목장에 참여하기를 요청했습니다.

왕이 말합니다. 내가 가면 일이 복잡해 지는데, 그러지 말고 너희들끼리 가서 해라. 간청을 했으나 내가 누가 될까 염려해서 왕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압살롬의 간청을 사양하고 오히려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오히려 압살롬은 왕을 초대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결국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다가갑니다. 왕이 오지 않는다면 왕자들이라도 보내 주세요. 왕자들까지 갈 일이 뭐가 있냐? 너희들끼리 해라. 그렇지만 압살롬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모든 아들을 저와 함께 보내니라. 그 성경에서 압살롬에서 간청한다고 하는 표현을 무려 3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자기 양털 깎는 축제에 왕이나 왕자가 오지 않는다면 자기가 계획하는 일들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왕은 그 자리에 가지 않음으로 화를 면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왕자들이 왔습니다. 부하장수들에게 이미 지시해 놓았습니다. 암논이 술이 취할 때 되면 내가 지시하면 그를 죽여라. 이미 그들은 준비가 되어져 있었습니다. 소문이 납니다. 압살롬의 모든 부하들이 왕의 아들들을 다 죽여 버렸다. 잘못된 정보였지만 왕은 옷을 찢고 땅에 엎드러지고, 통곡했습니다.

그 때에 암논의 친구이면서 사촌이었던 그리고 그의 범죄를 부추겼던 요나답이 나타났습니다. 다윗왕에게 나타났습니다. 왕이여, 다 죽지 않았습니다. 암논만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여 괘념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습니다. 암논만 죽었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왕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암논 편이 되어서 장자의, 왕세자의 편으로 권세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싶었던 요나답, 암논이 죽자 다시금 다윗왕에게 다가와서 늙은 다윗왕을 그는 위로하면서 왕의 마음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니 우리 자신이 요나답과 같이 처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중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지 않느냐 그 말이예요.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요나답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정치하는 분들이 있으면 용서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거기에 신문에 박스기사로 매주 나오는 재미있는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제목이 뭐냐 하면 이 주일의 철새정치인, 그것이 타이틀입니다. 이번 주간에 이 당에서 저 당으로 옮긴 정치인들의 이름을 써주는 것입니다. 누가 어느 당에서 어느 당으로, 시장이 어느 당에서 어느 당으로 그것을 매주 기사 박스에 나오는 것이지요.

보면서 안타까우면서 한 편으로는 너무 창피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영국은 두 양당이 노동당과 보수당이 정권을 양립하지만 정권을 잃었다고 당을 옮기는 법은 없습니다. 할아버지 했던 당, 아버지가 했던 당을 내가 가고, 내 아들이 그 당을 갑니다. 정권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고 소신을 이어서, 대를 이어서 그 당을 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느 대통령 때는 어느 당을 갔다가 정권이 바뀌면 당을 바꾸어서 권세에 기생하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아직 우리 정치는 자리를 딱 정하지 못 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요나답 같은 존재가 횡행하는 그런 사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여러분들의 교회가 유익을 줄 때에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교회가 여러분에게 희생을 요구할 때 여러분들은 달아나는 경우가 있지요. 정말 내 신앙이 정치인이 권세를 잡았을 때나 권세를 놓았을 때나 변함없이 자기의 길을 가듯이 세상의 길도 정조를 지키는 일을 아름답게 생각할 때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우리의 그 믿음의 길을 갈 때에 때때로 우리에게 유익이 되나 희생이 되어야 할 때에 희생의 자리를 마다 않는 사명의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마세요.

오늘 저는 오늘의 말씀을 결론을 내리기 원합니다. 이 다윗의 가정에 이러한 비극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원천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다윗의 가정에서는 이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무엘하 12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네 집에 떠나지 않으리라. 그것이 자식 그대로 본받고 있습니다. 죄짓고 있는 것까지도 따라하고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 부모가 하는 일을 그대로 자식이 본받지요?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술 먹으면 엄마를 한 없이 때리는 그런 가정, 자식들은 그것을 보면서 웁니다. 울면서 다짐을 합니다. 죽어도 술 먹지 말아야지. 아니, 술은 먹더라도 죽어도 엄마는 때리지 말아야지. 부인을 때리지 말아야지. 그렇게 울면서 다짐하지만 그가 결혼하면 그 아내를 또 때립니다.

그렇게 다짐했지만 또 때릴 수 밖에 없는건 부모로부터 배운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의 삶의 모델이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 부모님들 우리의 자녀들의 삶의 교과서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았지만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는 이 어울리지 않는 교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가장 상징적으로 단호하지 못한 부모들의 처신은 어린아이의 교육에서 나타납니다. 손님들이 오면 아이들이 더 떠들고 용돈 달라고 그러고 떼를 쓰지요. 그러면 돈을 막 주면서 일단 그 문제를 막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꾸 떼를 쓰면 이따 손님이 가면 혼난다고 그럽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이는 굉장히 염려하지요. 어쩌면 내가 혼날 수도 있다. 3살, 4살짜리만 되어도 다 판단을 합니다. 36개월만 지나면 다 판단한다고 지나면 그런데 손님이 가고 나서 상황이 끝났어요. 그렇게 추상같이 이야기 했던 엄마 아빠는 이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생활을 합니다.

아, 손님이 있을 때만 하는 공포탄이로구나. 그 다음부터는 손님이 오면 아이들은 더 강하게 데쉬합니다. 천원 달라고 했던 것, 2천원 달라고 하고, 우리 부모는 손님만 오면 꼼짝을 못합니다. 하지만 가면 그 뿐입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커서도 자기 중심적이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사고하고 판단해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예의라고 하는 것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지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가 손님이 가시고 나면 다 상황이 종료되어서 이 아이도 잊어버릴 만 할 때 아이를 불러야지요. ‘너 아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랬으니까 아까 그러면 매 맞는다고 이야기했지? 매 맞자. 몇 대 맞을래?’ 서양 사람들은 매 맞는 횟수를 본인에게 물어봅니다.

너 몇 대 맞아야 될 거 같애? 대부분의 아이들은 한대라고 하지요. ‘아냐, 이것은 한 대 가지고 안 돼.’ 그러면 결국은 자기 마음대로 절충을 하지요. ‘3대요.’ ‘그래, 세대 맞자.’ 세대를 때릴 때 아프게 때려야 합니다. 핏줄이 서도록 때려줘야 합니다. 3살, 4살 짜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면 정말 엉터리 아이들이 됩니다.

죄송하지만 우리 성도들 가정에도 엉망인 아이들 많아요. 예의, 찾아 볼 수 없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안타까워요. 그쯤되서 중고등학교 되고, 청년되면 완전히 통제가 불가능하지요. 그렇게 한 번만 해 놓으면 ‘그걸로 안돼.’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 밥 먹인다고 공원에까지 밥에 물 말아가지고 와서 쫓아다니면서 먹이는 부모들이 있어요. 그게 사랑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우리는 삶의 작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그런 삶의 작은 이야기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 다윗의 경우에 그런 작은 부분들이 커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고, 다윗 자신도 그 문제를 해결할 문제를 잃어버렸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 경우에 그런 잘못된 경우가 있다고 보았지만 그저 안타까워 하는 일로 그쳤다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심판했고, 하나님께서 그 본인도 심판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두려워 해야 합니다. 악에 관해서는 단호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럽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자식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울려고 하지만 그것은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러워도 괜찮아요. 이웃을 사랑하는 증거가 용서라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용서에 대해서는 너그러울 수록 좋아요. 하지만 내 자신에 대해서는 우리 가족에 대해서는 냉정할 수록 좋아요.

결국 다윗은 2년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결국 압살롬은 2년 후에 왕과 왕자들을 죽여버릴 계획을 삼고 있습니다. 다른 왕자들을 죽일 이유 없지요. 죽인 첫 번째 왕자, 두 번째 왕자는 성경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대하지 않아요. 그만큼 2번째 왕자는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그런 의미에서 압살롬은 첫 번째 왕자 암논만 제거해 버리면 된다는 판단을 해도 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날 왕도 초대를 했지만 왕은 좋은 의미에서 너희들끼리 가라고 해서 빠졌는데, 그래서 왕은 목숨을 건졌지만, 곧 얼마 후에 압살롬은 군대를 모아서 다윗왕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버립니다. 살아있는 아버지 왕을 쫓아내고, 압살롬 자신이 왕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아마 양털 깎는 그 자리에 갔다면 그 자리에서 왕도 죽었을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그들 가정에 생겼습니까? 아버지가 해야할 몫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가정에는 큰 비극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생각합니다. 시편에 있는 다윗의 시를 생각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함이 충만할 때 그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에서 떨어져 있을 때, 영적 분별력과 리더쉽에서 그가 멀어져 있을 때 그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의 일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져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된 오늘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일에 우리가 분명하고 단호한 일, 정말로 범죄에 대해서는 작은 일이라도 단호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웃과 형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울 수록 좋아요. 용서할 수록 좋습니다. 우리는 그런데 정 반대 아닙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너그럽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삶의 태도부터 바꿔야 합니다.

압살롬은 우리가 나쁜 아들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그가 그러한 생각과 방법으로 살았던 이유는 그의 가정의 분위기, 우리는 영적인 분위기를 늘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늘 유행가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기분 좋을 때마다 신나는 트롯트가 흘러나오고, 여러분의 주변의 카세트에서 늘 째즈만 틀어 나오는 그런 가정이라고 하면 뭘 기대하겠습니까? 안 들을 수는 없겠지요.

제가 듣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주된 영적인 분위기가 세속적인 분위기라면 그 집안이 집사님 가정이고, 권사님 가정이고, 장로님 가정이라면 가슴을 쳐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사진을 본다고 하더라도 벌거벗은 가수들, 배우들의 사진만 늘 즐비하다면, 아니 플레이보이지만 잔뜩 깔려 있다면 그의 가정의 영적인 분위기를 이야기 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안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청소년 시기에 그런 것들을 통과의례처럼 지날 것입니다. 저도 많이 봤어요. 일부러 찾아가기 전에 중학교 때만 해도 이상한 사진 가지고 와서 저 뒤에서 아이들이 막 킬킬거리고 웃어요. 그러면 같은 동료들이 안 갈 수가 없지요. ‘뭐냐?’ ‘너희들은 빠져.’ ‘아, 왜 그래?’ 하면서 아부하면서 보지요. 그러면 굉장한 거 본 거 같아서 기겁을 하지요. 이상한 잡지 가지고 와서 돌려봅니다.

그렇게 해서 볼 수 있는거 피할 수 없지요. 그것은 성장하면서 통과의례처럼 한 번 지나가는 거예요. 이 세상 살면서 눈 가리고 살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그런 삶이 나의 삶의 분위기가 되고 주된 삶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정에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제가 종종 그러지요. 심방가서 달력을 찾습니다. 달력을 찾는 것은 날짜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달력의 모습 거룩한 주님의 모습, 성화의 모습,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우리 교회 이름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출입구에다가 거실에다가 달력을 달기를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집을 드나들면서 성화를 보고, 평안의교회라고 하는 거기에 담임목사의 이름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집을 나가면서도, 여러분들이 집에 들어와서 참외를 먹고 수박을 먹으면서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의 일원이라고 하는 것을 늘 느끼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저 방 구석에 달아놓고, 큰 대못을 박아놓고 옷을 딱 걸어놓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오늘 그렇게 한 집들은 조금 가서 바꾸시기 바랍니다. 다른 달력들 많잖아요. 그런거 안방에 달아놓으시고, 교회 달력은 거실에 출입이 잘 되는 곳에 걸어 놓으세요. 그것이 여러분들 영적인 삶의 분위기를 일깨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요즘 달력이 없어서 달력을 교회에서 배부합니까? 옛날에는 그런 의미가 많았지만 이제는 달력, 은행 가서도 수없이 주는 것이 달력입니다. 교회에서 굳이 달력을 만들어 주는 이유는 그런 영적인 소속감과 영적인 분위기를 늘 가정에서 느끼라는 이야기예요
.
우리 부모들의 입장에서 그런 영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가? 요즘 꽃예술 선교회는 성경을 쓰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우리 아내도 열심히 쓰는데 피곤해서 눈을 비비면서도 하루에 성경 몇 장을 쓰려고 그래요. 안쓰러워서 성경을 한 두장 써줍니다. 이 다음에 성경이 자필성경이 되면 영구본으로 해서 성경 카피를 만들거구요. 그렇게 되면 그 속에 되면 제 자필 성경도 몇 장 있어서 보람이 있을 거 같아요.

열심히들 쓰고 있습니다. 그거 열심히 쓰면 뭐 어떻게 됩니까? 그러는 분들이 있어요. 그냥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꼭 무슨 좋은 일이 보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예요. 내가 성경말씀을 자필로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를 한 번 써 본다고 하면 그 성경책을 잘 만들어서 후세에 그것을 남겨 줄 수 있다고 하면 그것보다 귀한 가보가 어디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의, 우리 가정의, 우리의 자녀들에게 영적인 분위기를 살려 주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삶의 우리의 가정에 지배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떠나가면 사탄의 유혹이, 정욕의 유혹이 거침없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런즉 우리에게 깨어있으라.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런 즉 깨어 있으라. 이 험한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삼키려고 하는 사탄 마귀가 자기의 고깃감을 찾도록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 시대에 하나님의 영으로 깨어있는 평안의공동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삶에서 떠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 인도해 주시옵소서. 때때로 세상 유혹에 넘어갈 때 많으나, 하나님 말씀 붙잡고 일어나게 하옵소서. 부모로써, 믿음의 부모의 모습을 가지게 하시고 자녀로써, 믿음의 자녀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교회에서 온전히 실천될 수 있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 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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