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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 (눅 2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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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간의 소아시아 성지 순례의 여정은 정말 은혜로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하여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매일같이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저녁 10시까지 강행군으로 몹시도 지칠 법도 했지만 성도님들의 기도가 있었기에 오히려 힘있게 모든 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말로 좋은 팀으로 짜여져서 시종일관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요 순간순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깨달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더욱 총무의 일까지 맡아 모든 살림과 진행을 도맡아야 하는 처지에서도 모든 일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한 것뿐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강단을 지켜주신 분들, 중보 기도해 주신 분들, 학생회 수련회를 위해서 수고해 주신 교사들과 중보 기도자들, 모든 도우미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마음껏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또한 깨달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세지말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마지막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에 의해서 세워진 성전입니다. 제일 먼저는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지어졌지만 바벨론의 침공으로 모든 성전이 다 불타버리고 맙니다. 두 번째로 지어진 성전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다시금 정성을 다하여 지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제 2 성전으로도 불리는 이 성전은 후에 헤롯 대왕에 의해 40년 간에 걸쳐 크게 확장되고 아름답게 지어집니다. 나름대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예산과 시간을 들여 성전을 중건하였고 그 성전을 가리켜서 몇 몇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 놓았다고 말들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말씀을 주실 때 사람들은 그 말씀을 조금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성전을 모독하였다고 해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댔던 저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선은 그 당시 유대땅을 다스리고 있던 분봉왕 헤롯이 지은 성전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총독 역시 성전의 제사를 용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당시 로마 황제의 뜻이기도 했기에 그런 성전이 무너져 내린다고 하는 것을 그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처럼 AD 70년 경 로마 군인들의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 이 성전도 다 불타버리게 됩니다. 그때 성전을 꾸몄던 금들이 녹아 내리자 녹아 내린 금을 찾기 위해 로마 군병들이 모든 돌들을 다 뒤엎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도 어김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주시는 마지막 때에 나타날 징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말씀들 역시 그대로 다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 말씀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언제 있겠습니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다’ 하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

이 말씀처럼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적 그리스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마지막 때를 이끌어 갈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따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속아서 그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에 앞서 먼저 공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에는 우리 모든 믿는 무리들이 주님 앞으로 들림 받는 일이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데살로니가 전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도 그들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요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여도 전혀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쟁과 난리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종말이 곧 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말이 주님이 오실 날이 아직 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 주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 볼 때 주님이 오실 때가 아주 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날과 그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전혀 흔들림이 없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주님 앞에 함께 들림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마지막 때에는 많은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럽습니까? 같은 나라에서도 민족이 달라 서로 다투고 싸우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도 끊이지를 않습니다. 계속해서 큰 지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진에 관해서는 안전하다고 하던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던 지진으로 인해 쓰나미 현상이 일어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거기다가 곳곳에 기근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또 전에는 알지 못하던 병들로 인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고, 믿는 사람들을 회당과 감옥에 넘겨 줄 것이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주님의 이름 때문에, 왕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다가 얼마나 많이 죽어갔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비단 초대 교회 때로 끝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곳들에서는 예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편하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만 이슬람 국가에서는 전혀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박해를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방문했던 소아시아 성지 지금의 터키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믿음은 자유라고 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회교도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박해가 이어지고 있는지요. 지금도 그들은 떳떳하게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여전히 숨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제 돌에 맞을지 모릅니다. 언제 칼에 찔릴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슬람 국가 중에서는 가장 자유롭다는 터키조차도 이런데 하물며 이슬람세력으로 가득찬 중동 국가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동족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평양에 봉수동 교회를 만들어 놓고 우리들도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발각이 되기라도 하면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해야 되고 그곳에서 감시병들이 장난삼아 예수 믿는 사람들을 끌어내어 비참하게 죽이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비교적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신앙 생활을 하기에 그들의 입장이 더욱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우리들이 더 어렵더란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슬람 국가에서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 자체로 죽을 수 있기에 그들은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흔들림이 없이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자유롭게 믿을 수가 있습니다. 믿음에 제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보다 많은 어려움들이 있더란 마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게 하는 세상 풍조에 우리들이 얼마나 쉽게 노출되어 있습니까? 어제만 하더라도 8월 마지막 연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길들이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그들처럼 우리들도 놀고 싶고 즐기고 싶은 유혹들이 또 얼마나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남들처럼 쉬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못한다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남들처럼 잘 살고 싶은 유혹은 또 얼마나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그로 인해서 주일 성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할 도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를 정당화하려고 이런 저런 핑계들을 대고 있지를 않습니까? 예수를 믿기에 당하는 불이익은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추해져만 가고 있는 세상 풍조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흔들리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부터인가 소음 공해라고 해서 새벽에 울리던 교회의 종소리들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너무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른다고 하면서 세상이 변하는데 기독교인들도 변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교회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방송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금지 언어로 지정해 놓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어느 틈엔가 주님의 오신 날을 기리는 성탄절이 산타 클로스의 날로 바뀌어 선물이나 주고 받는 날로 변해버렸습니다. 정작 그 날의 주인공인 예수님은 사라지고 흥청망청 놀고 지내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시던 때의 유대 땅처럼 말입니다.

우리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주님의 사랑은 사라져버리고 나만 잘 믿으면 된다고 하는 자기 위주의 믿음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은 어디 가고 그저 나만 잘살면 되고 나만 복 받으면 된다고 하는 모습들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그런 교회들 역시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사실은 환난 속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겉으로는 자유롭지만 속을 가만히 들려다보면 얼마나 많은 핍박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주일날도 일해야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주일날조차도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마음에 부담을 느끼다가도 나중에는 체념해버리고 있지를 않습니까? 우리네 자녀들은 또 어떻습니까? 주일날조차도 입시 준비를 핑계삼아 등교시키는 학교들이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거기에 우리는 속수무책입니다. 지금의 교육 부총리가 교회 집사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1/3이상이 기독교인들임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여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기독교 학교까지도 주일날 학생들을 등교시키고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그러니 어찌 온전한 믿음을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오히려 칼 들고 죽을래 살래 하는 나라들보다 믿음을 온전히 지키기가 더 힘든 현실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뜨겁게 기도해야 하고 더 열심을 내어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왜 히브리서 기자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마지막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고 했는지 기억하십시오.

악한 마귀는 또한 보다 쉽게 예수를 믿으라고 우리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꼭 그렇게 힘들게 믿을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우리는 더욱 힘써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밖에 모르는 세대라고 해도 우리는 말씀대로 먼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힘들게 여겨지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들을 돕고 계십니다. 이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주님의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오늘을 이겨나가 주님 앞에 서는 날 큰 상급과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끝까지 참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느냐고요? 거기에 우리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대답할 말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해도 세상 풍조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해도 우리는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능히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필요한 말을 우리들의 입에 허락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힘도 주님이 주십니다. 우리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도 주님이 공급해 주십니다. 따라서 주님만을 의지하면 됩니다. 심지어는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가정에서조차 소위 왕따를 당한다고 해도, 직장에서든 어디서든 그로 인해서 우리가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참고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옵니까?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주님이 힘을 주십니다. 주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이 지혜도 주십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도 주님이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주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래서 목숨을 잃는 자가 아니라 참고 견디는 가운데 목숨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씨앗을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매 맺을 때까지 가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윽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되고 탐스럽게 익어 열매를 딸 수 있게 됩니다. 그 때까지 견디기가 힘들다고 해서 미리 열매를 따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설사 먹을 수 있다고 해도 우리 입맛만 버릴 뿐입니다. 감을 익기 전에 따 보십시오. 떫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자두를 미리 따 보십시오. 맛이 셔서 아주 진저리를 치지 않습니까?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말도 그렇습니다. 결코 중간에 멈추지 마십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의 고백을 계속하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거기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세상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리로 따라가지 마십시오.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목숨을 얻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은 힘들어 보여도 때가 되어 열매를 거둘 때 보면 그 모두가 필요한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 믿음에 흔들림이 없이 주님을 온전히 섬겨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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