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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웰빙(well being) 신앙 (롬 6: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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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욕망과 죄악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자신의 몸을 길들여가면 몸도 마음도 점점 병들지만 의로운 일,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길들여가면 몸도 마음도 건강함을 얻습니다.

웰빙 (well being)이란?

육체적· 정신적· 영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으로??'복지· 행복· 안녕'을 뜻하는 말입니다. 웰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뿐 아니라,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느끼는 소속감이나 성취감의 정도, 여가생활이나 가족간의 유대, 심리적 안정과 영적 만족감 등 다양한 요소들을 웰빙의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 일과 휴식, 가정과 사회, 자신과 공동체, 세상살이와 신앙생활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가 웰빙인 것입니다.

웰빙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웰빙족'으로 부릅니다.

① 고기 대신 생선과 유기농산물을 즐기고
② 명상· 기도 · 암벽 등반 등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일과 운동을 하며
③ 외식보다는 가정에서 만든 슬로푸드를 즐겨 먹고
④ 여행· 등산· 독서· 차동호회 등 취미생활을 즐기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2003년 이후 웰빙은 문화면에도 확산되어 웰빙족을 겨냥한 의류· 건강· 여행 등 각종 상품에 이어 잡지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기존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미국의 로스 엔젤로스의 거리를 지나다가 한 젊은이가 붉은 글씨로 인상적인 문귀를 새겨놓은 티셔츠를 입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I'm a slave for Christ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라는 문귀였답니다. 지나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기특하더랍니다. 자신의 신앙고백을 써 놓았다는 것이 귀하게 보여서 몇 걸음 지나간 후에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그의 등 뒤에는 “Who's slave are you? (당신은 누구의 노예입니까?)”라는 문귀가 새겨져 있었답니다.??

당신은 누구의 노예입니까? 우리는 과거에 죄와 사탄의 노옌였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 값을 지불하고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노예란 자유가 박탈당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이 된것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그리스도게 속한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님에게 순종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다면 ‘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6장 1절 이하 14절의 말씀은 우리가 죄에서 자유하는 참된 승리의 삶과??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의 마지막 요소는 우리의 삶을 주 앞에 드리는 것이며, 그것이 곧 순종입니다. 순종은 웰빙의 삶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웰빙 신앙을 소유하기 위해 주께 순종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는 은혜 때문입니다.(14~15절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본문 14절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의 법 아래 있습니까? 아니면 은혜 아래 있습니까???자식들을 위해 법을 제정한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법에 대한 순종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어길 때 거기에 대한 형벌 또한 제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식들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라는 법을 제정해 놓고, 만약 이 법을 어길 때에는 우리 가정에서 추방하거나 혹은 호적에서 지워버림 등등의 벌을 제정해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이 잇습니까? 우리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녀들을 부모의 법 아래 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은혜 아래에 두고 지도하고 있기 대문입니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하나님의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법 아래 있을 때와 은혜 아래 있을 때 언제 더 죄를 적게 짓게 됩니까?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법 아래 있을 때라고 대답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을 때 오히려 죄에 대한 승리가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14절의 말씀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14절).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힘은 율법의 힘보다도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힘이 타율적이라면 은혜의 힘은 자율적입니다.

율법의 힘이 강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은혜의 힘은 자율적이며, 감동적인 것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은총과 은혜로 구원 얻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엡2: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오늘도 살고 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나는 죄를 마음대로 범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죄를 지속적으로 범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이 사람은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하나님의 처벌을 피할 수가 없이 하나님 앞에 정죄되어 있었던 과거의 우리의 운명과 비참성을 깨닫고 거기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이 죄를 범하도록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15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절).

엠 알 디한(M.R. Dehaan)이라는 설교가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과거 봉건시대에는 주인들이 노예로서 하녀들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어떤 사회의 경우에는 노예에 대한 엄격한 법률까지 제정되어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 하녀들은 주인의 법 아래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자기의 하녀를 위해서 이런 법을 제정한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상시간은 반드시 아침 6시어야 하며 7시까지는 집안의 모든 청소를 완료할 것, 그리고 8시까지 주인의 모든 식사준비를 완료하고 9시까지는 자녀들을 위한 모든 뒷바라지를 끝낼 것 등등의 하루의 일정을 정하고 규칙대로 수행하며 그렇게 하지 못할때는 추방도 가능하고 매질도 가능한 법률을 정했다고 한다면 그런 법 아래서 행동하고 붕사하는 하녀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하녀와 주인 사이에 일이 벌어져서 이 주인이 하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아내로 맞아 들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주인의 아내가 된 이 여인은 아직도 주인의 법 아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제는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사랑 아래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법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여인이 함부로 막 살겠습니까? 전에 6시까지 일어나야 했던 이 여인은 이제는 10시까지라도 잘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법 아래 있을 때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잊어버리지 않는 여인이라면 주인의 엄청난 사랑과 호의로 자신이 주인의 아내라는 놀라운 신분이 된 것을 깊이 깨닫는다면 이제는 5시쯤 일어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은 지금 비슷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순종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를 범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시적인 실수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그분을 사랑할 수 밖에 없고, 그분 앞에 내 삶을 던질 수 밖에 없고, 그분을 따라갈 수 밖에 없고, 그분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

둘째는 자유 때문입니다.”(20절)

왜 우리가 주님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참된 자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다른 말로 ‘의의 종’이라는 단어로 많이 쓰고 있습니다. 주님의 종이라는 말은 바꿔말하면 의의 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주님이 바로 ‘의’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의의 종의 반대 개념은 무엇일까요? 본문에 보시면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20절에 보시면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20절).

이 말씀은 우리가 죄의 종이 되면 의를 행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된 자리에서 자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죄에 대해 자유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드린다면 에베소서 4장에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말고 참말을 말하라고 하고 도적질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도적질하지 말고 구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짓말장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언제 거짓말장이의 딱지를 면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을 거짓말을 중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언제 또 거짓말을 시작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던 그 입술에서 참말이 나올 때 그는 비로소 진실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때에야 그는 거짓에서 참 자유한 것입니다.

이제는 도둑질하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언제 도둑놈이라는 불명예스런 명칭에서 자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도둑질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언제 또 도둑질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성경은 도둑질하던 사람에게 구제하라고 가르칩니다. 남의 것을 빼앗던 그 손이 오히려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손으로 변할 때 이 사람은 비로소 도둑질하는 것으로 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죄의 종된 자리에서 자유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죄의 종이 안되겠다는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의의 종이 된다는 사실은 의의 근원이 되신 유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가 있을까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뿐만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복종하는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된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17절을 보십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도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절).

여러분, 내가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삼고 그분의 교훈을 따르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때에 진정한 자유를 경험합니다. 이것은 탕자가 배운 교훈이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곁을 떠나가고자 한 이유는 아마도 자유를 위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버지의 잔소리가 굴레처럼 느껴졌고 함께 사는 것이 구속처럼 느껴져서 자유를 위해서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한동안 그는 자유를 만끽한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허랑방탕하다가 얼마 후 주머니가 비기 시작하고 자기의 주변에 의미없는 친구들이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흉년까지 들게되자 돼지를 치는 우리 속에 들어가서 그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한 순간 그는 자신이 자유가 아니라 비참한 노예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버지 품에 있을 때보다 더 다른 의미로 참담한 죄인, 죄악의 종, 타락의 종, 방종의 종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안 받아 주시면 “아버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얻었사오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만 보아주십시오”라고 간청할 결심을 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자식을 종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산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아버지의 품 속에 있었건만 그는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들은 하늘에서만 자유할 수가 있고,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물속에서만 자유롭습니다.

어느 날 물고기가 왜 나는 물 속에서만 살아야 하나 하고 육지로 나아가면 죽고 맙니다. 철도를 달리는 철마는 레일 위에서만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남편들은 아내의 품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남편의 자유는 아내의 품 속에만 있으며 아내의 자유는 남편의 품 속에만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품 속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 쉴 때까지는 내게 참된 안식이, 참된 평안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순종할 때 얻어지며 이것이 웰빙신앙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번째는 열매 때문입니다.(21~23절)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인간은 다 노예입니다. 죄의 노예이든가 아니면 의의 노예입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면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결과라는 말 대신에 열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시면,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종된 그 열매의 마지막이 사망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죽는다는 사실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죄의 종이 된 결과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도 사망의 징후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냄새가 지금부터 나기 시작합니다. 죽는 냄새는 썩는 냄새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부터 부끄러운 일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정하는 일, 불법한 일들, 썩고 냄새나는 일들에 거하게 됩니다.

반대로 의의 종이되면 그 열매는 무엇입니까? 19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의의 종이 되면 그 결과는 거룩함입니다.

여러분, 거룩함을 사모하십니까? 수년전 작고하신 기독교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가 암 치료를 위해서 미국에 오셔서 어느 대학교에서 설교를 하셨을 때 그는 미국의 크리스챤들을 질타하면서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불신자와 다른게 무엇입니까? 크리스챤들의 삶의 목표는 행복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거룩함을 삶의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라고 하셨습니다. 과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는 자신의 삶의 목표를 거룩함이라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었던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을 때 그 열매는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얻은 영생은 그냥 영원히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개념 속에는 질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할 뿐 아니라 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에 전혀 새롭고 거룩한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거룩한 삶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내가 거룩하게 닮아오던 그 주님과 더불어 거룩한 나라에서 영원히 거룩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영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강조할 때는 영생이 열매라고 하지 않고 거룩함이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결과가 영생이라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순종해야 하고 그러면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23절에서 분명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기서 삯이라는 단어는 은사라는 단어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삯은 마땅히 행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삯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던 그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영생은 지금 얻는 것이지만 내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을 때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거룩한 삶을 살 책임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거룩함을 완성하여 거룩하신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나라에 거하게 되는 이 마지막 열매를 위하여 기쁘게 오늘도 주님께 순종하해야만 합니다.

라이언 화이트 (Ryan White)라는 AIDS에 걸린 소년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13살때 혈루병으로 수술 중에 수혈을 잘못 받아서 이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소년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밝고 아름답게 살았으며 학교생활도 기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문기자들에게 알려지고 또한 텔레비죤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은 5년동안 살다가 18살에 죽었는데 죽기 직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 소년을 찾아 갔습니다. 유명한 레이건 대통령도 찾아가서 선물을 주었고, 도널드 트럼프라는 거부 부동산 업자도 찾아가 막대한 선물을 주었으며 마이클 잭슨도 찾아가 선물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선물을 가장 많이 받은 소년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죽음 직전의 한 크리스챤 잡지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 소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이제는 너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구나. 이 아버지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가 없음을 용서해라”고 하자 이 라이언이라는 소년은 대답하기를 “아빠, 물론 저는 선물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나 아무도 아빠 같은 선물을 저에게 준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저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잖아요 아빠 때문에 저는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었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어요 이제 저는 죽어도 천국가는 것이 확실하잖아요. 아빠는 저에게 가장 위대한 선물을 주셨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사는 많은 미국인들을 울렸습니다. 맞습니다. 이 아버지는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해 줄 일이 많이 있겠지만 결국은 인간이 부딪쳐야 하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 죽음을 넘어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영원을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 자녀들에게 줄 수가 없다면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준 부모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라이언 화이트 소년은 영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영생을 가진 사람답게 그의 삶이 당당하고, 거룩했습니다. 밝은 삶을 살았으며 이웃에게 친절했고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이 소년의 당당하고 놀라운 삶의 비밀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웰빙 신앙을 우리도 누려야 합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을 믿고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길들여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웰빙을 성취하는 방법입니다. 순종하는 삶으로 은혜가운데 거하며, 자유를 누리고, 거룩함에 이르며, 영생까지 성취하는 진정한 웰빙의 행복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황 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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