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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 사랑 (5) (레 1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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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평화에 대하여 다섯 번째로 설교를 하는 날입니다. 평화에 대한 설교가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으십니까? 부족한 사람의 설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 설교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평화의 구체적인 역사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 나타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평화에 대한 다섯 번째 설교를 준비하면서, ‘평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중요한 것들이 참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평등’입니다. 불화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불평등’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평등을 이야기하시는 가운데 불평등의 모습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과 자유인’ 그리고 ‘소자’입니다. 종과 자유인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소자’라는 말 자체가 불평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불평등의 대부분은 우리 인간들에 의하여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운명적으로 생겨난 불평등도 살펴보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똑하게, 어떤 사람은 좀 덜 똑똑하게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게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잣집에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 태어납니다. 그런 면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잘못 생각하고 이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가 보기에 하나님은 공평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심에는 틀림없으나 세상을 공평하게 창조하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불공평해 보이시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의 수준과는 다른 공평의 의도가 있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평과 평등은 공산주의적인 공평과 평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공평과 평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은 당연히 공산주의적인 공평과 평등의 세상을 창조하셨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과 평등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시고 좋아하시면서도 당신이 마음대로 창조하실 수 있는 세상을 공산주의적인 평등과 공평이 역사하는 세상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 세상을 불공평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공평해 보이심에는 매우 중요한 의도가 숨어져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컨셉 중에 하나는 ‘흐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건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유지하게 하시기 위하여 ‘흐름’이라는 컨셉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물은 흘러야 깨끗해 집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습니다. 그러면 많은 생명들이 죽게 됩니다.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흘러야만 깨끗해 집니다. 공기와 물이 고여 있지 않고 흐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태풍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도 사용하십니다. 만일 태풍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세상의 많은 땅은 사막이 될 것입니다. 물론 태풍의 피해가 엄청난 것은 사실이지만, 태풍이 자연과 우리 인간에게 주는 유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돈도 흘러야만 세상이 건강해 집니다. 돈이 흐르지 않을 때 세상은 약해지게 됩니다. 돈을 잘 흐르게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경영과 경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돈이 건강하게 잘 흐르는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돈이 건강하게 잘 흐르지 않는 나라가 좋지 못한 나라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판단하는 기준이 여럿이겠지만 저는 돈의 건강한 흐름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흐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흐름’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불평등’이라고 생각합니다. 편편하고 평평한 곳에 흐름은 없습니다. 고저장단 그리고 강약이 있을 때 흐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다면, 강하고 약함이 없다면 흐름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이해하기 어려운 ‘불평등해 보이심’의 이유가 바로 ‘흐름’에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흐름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한데서 약한 곳으로 흐르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악 되고 타락한 세상에는 그 흐름이 반대가 됩니다. 낮은데서 높은 데로 흐르고, 약한 데서 강한 데로 흐릅니다. 저는 그와 같은 현상을 IMF 때 볼 수 있었습니다. IMF 전 우리나라 경제는 아마추어의 눈으로 볼 때 매우 건강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점점 중산층이 두꺼워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제의 건강한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IMF가 일어나자마자 중산층이 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중산층이 하층으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산층이 하층이 되면서 중산층의 돈은 소수의 상층계급으로 몰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세상이 건강을 잃으면, 돈이 부자에게서 가난한자에게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서 부자에게로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의 흐름, 약한 곳에서 강한 곳으로의 흐름은 건강치 못한 죽음의 흐름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흐름, 강한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흐름이 건강한 생명의 흐름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그와 같은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 생명의 흐름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아니 할 것이라. (롬 15장 1절 말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 1장 27절 말씀)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 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19장 9절-10 절 말씀)

1990년이라고 기억합니다.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사주었습니다. 그때 컴퓨터 가격이 50만원이었습니다. 그때 50만원은 그리 작지 않는 돈이었습니다. 늘 가난하게 자랐던 저는 아이들에게 그와 같은 것을 사 줄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텔레비전을 보다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호동에 사는 일가족 네 명이 집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사건이 방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집은 컴퓨터 한 대 값인데, 어느 집은 그 돈이 없어서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 충격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때 떠오른 성경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돈이라고 다 혼자 쓰지 말고 평상시에도 네 귀퉁이 남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는 훈련을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돈을 모아 두기 위하여 꿀 병을 담았던 오동나무 상자를 저금통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 앞면에 ‘이삭줍기’라는 글을 써 놓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아이들에게, 컴퓨터 구입과 천호동 일가족의 자살 그리고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돈 중에는 하나님의 몫이 있고, 가난한 자의 몫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큰 아이가 제일 먼저 그 통에 돈을 넣고 통에 붙여 놓은 메모지에 글을 남겼습니다.

<김부열 120원 방바닥에서 주운 돈>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희 집은 이삭줍기를 합니다. 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손주에게 벌써 몇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이삭줍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삭줍기의 정신이 우리 가정의 가장 중요한 철학과 전통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기를 실제로 소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4장에 보면 매 삼년 끝에 하는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십일조는 특별히 고아와 과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드리는 십일조였습니다. 저는 그 매 삼년마다 하는 십일조가 이삭줍기의 작은 기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3년의 십분의 일은 계산해 보니 한 달의 하루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이삭줍기를 제안하면서 한 달의 하루 몫은 자기보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쓰는 것을 연습하자고 설교하였습니다.

그 설교를 한 후 어떤 할머니 한 분이 11,000원 이삭줍기 헌금을 하셨습니다. 봉투에는 ‘공장 하루 품삯’이라고 쓰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가족이 없이 홀로 사시는 독거노인이셨습니다. 다음 달에도 그 할머니는 이삭줍기 헌금을 하셨습니다. 13,000원을 하셨습니다. 그 13,000원을 헌금한 이삭줍기 헌금 봉투에는 오늘은 잔업을 해서 2,000원 수당을 더 받았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 중 하나입니다.

삼십분의 일조로 이삭줍기를 하다보니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밭의 네 귀퉁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 분량인가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배운 수학으로 풀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답은 21.5%였습니다.

100이라고 하는 면적의 밭의 네 귀퉁이를 계산하려면 먼저 그 밭에 내접한 원을 계산하면 됩니다. 100이라고 하는 밭은 가로 세로가 10인 밭이고, 가로 세로가 10인 밭의 내접한 면을 구하는 공식은 ‘5 제곱 파이’였습니다. 그렇게 계산하여 네 귀퉁이의 답을 구하니 21.5%였습니다. 그와 같은 계산을 통하여 하나님이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떼라고 하신 네 귀퉁이 몫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도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도전하고 노력하고 기도하였더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보다도 좀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돈을 저만 위하여 저축하고 모은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크고 좋은 집, 좀 더 크고 좋은 차도 탈 수 있고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남겨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욕심을 버리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이 제가 요즘 설교를 하고 있는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해야 할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제가 마지막으로 도전하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희년의 법’입니다. 희년의 법은 한 마디로 말하면 평화의 법입니다. 소망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살다보니 어떤 사람의 땅을 점점 커져 갔고 어떤 사람의 땅은 점점 작아져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자기 땅이 다 없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자기 땅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아주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 자자손손 운명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옳지 않다 보시고 희년의 법을 정하셨습니다. 50년이 되는 희년에는 모든 땅이 다시 원주인에게 돌아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땅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었습니다.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을 잃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하여 가난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들에게는 희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희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자기는 그 희망을 누릴 수 없었을찌라도 저들의 자손들에게는 그 가난을 운명처럼 상속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희년이 법이 지켜지는 곳에는 희망이 있었고, 그 희망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게 출발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오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몫 지어 주신 것 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사는 것이 저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끝이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그 소유가 많아만 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무작정 내 소유가 많아진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의 소유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흐름과 흘려보냄을 생각지 아니하고 내 욕심만 부리다 보면, 세상은 점점 불안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녀들에게 어느 정도를 물려주는 것이 건강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려고 합니다. 적지 않은 시간의 노력과 훈련을 통하여 아이들에게 지불하는 돈보다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하여 지불하는 돈이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좀더 많은 기도와 노력을 통하여 가지고 있는 재산에 대해서도 자식에게 주는 몫보다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하여 떼는 몫이 많아질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평화라는 말의 한문 글자의 뜻이 참 깊습니다. 平和라는 말의 뜻은 모든 사람의 입(口)에 곡식(禾)을 공평(平)하게 넣어 주는 것이랍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창고를 지어 평생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 평화의 가장 큰 적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가지고도 서로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가득하고도 서로 다투는 것보다 낫다’(잠17:1)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는 肉饍이 가득한 삶을 위하여 평화를 포기하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달의 하루 몫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뗄 수 있는 사람에 도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밭의 네 귀퉁이를 실제로 가난한 이웃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도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자녀들에게 상속시키려 하지 말고 재산을 세상에 돌려 이 시대의 희년의 법과 정신을 실천하는 일에 도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평화를 위한 비용이 너무 크다’라고 말씀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불화입니다. 세상에 가장 비싼 것은 불화입니다. 세상에 불화의 비용처럼 큰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처럼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화의 비용입니다. 어리석게 불화에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지혜롭게 평화에 비용을 지불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 천 명분을 혼자 깔고 앉아 먹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 천 명분을 먹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전자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후자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 천 명을 먹이고,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것으로 자신의 복을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됨으로 세상을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설교 : 김 동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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