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언제나 소망을 버리지 말자 (창 4:25-26)

  • 잡초 잡초
  • 371
  • 0

첨부 1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아담과 하와가 그의 아들 셋을 나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셋이라는 의미는 대신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아벨을 대신하는 아들로서 셋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즉, 셋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벨을 대신하는 사명이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이 제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반면에 가인은 세상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사랑한 가인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예배의 실패자가 되었고, 마음에 분노가 가득한 분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살인자가 되었고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하고 유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에 대해 요한복음 8:4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했습니다. 진리가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거짓의 아비요, 살인의 아비요 욕심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 사건에도 마귀가 개입되어 마귀는 육신의 사람이요, 혈기의 사람이요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가인을 조정하여 믿음의 사람인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세상은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에덴을 떠난 가인은 성을 쌓았습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울타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성을 쌓는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인간, 마음의 분노와 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을 쌓고,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려는 욕망의 성을 쌓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아침의 이슬과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푸른 녹색의 정원을 주셨지만, 인간은 그 정원을 버리고 땀을 흘려 성을 쌓고 수고하고 애쓰며 자신 스스로를 두려움과 공포에서 보호하려는 회색의 성을 쌓는 도시문화를 만든 것입니다.

  둘째로 가인의 후손들은 이 회색의 도시 문화 속에서 육체의 정욕의 문화를 꽃피기 시작했습니다. 19절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일부일처라는 가정 중심의 성의 문화를 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의 문화를 깨고 자신들의 육체적인 욕망에 따라 짐승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두 아내, 세 아내, 네 아내를 거느리고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창세기 6:2절 말씀에 보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특히, 가인의 손자인 라멕은 두 아내를 거느렸다고 했습니다. 두 아내의 이름을 보면 첫째는 ‘아다’라고 했습니다. 아다라는 뜻은 ‘꾸미다’ ‘장식하다’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에서 나오듯이 그 시대가 장식하고, 꾸미고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도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여인들이 자신들을 꾸미고, 장식하고 치장하는 일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처럼 아다 역시 자신의 외모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스개 소리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날밤에 신랑과 신부가 샤워하고 잠자리를 들려고 하면,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아니, 누구세요?’라고 묻는 답니다. 요즘 TV를 보면 여자 연예인들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얼마나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지 한 부모 밑에서 나온 자녀들 같습니다. 가인이 만든 도시에 사는 여자들은 마치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미를 거부하고, 라멕의 부인 ‘아다’처럼 꾸미고 장식하여 자신을 아름답게 하려는 요즘의 여성들과 남성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라멕의 두 번째 부인 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씰라라는 뜻은 ‘어둡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요즘도 유행을 하고 있지만 ‘헤로인 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헤로인 룩이란 마약을 한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자세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마약을 하게 되면, 살이 빠져서 뼈만 남고, 눈 밑은 새까맣게 된다고 합니다. 요즘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말라 뼈만 남은 해골과 같습니다. 눈을 강조해서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눈을 시커멓게 하고 다니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헤로인 룩과 같은 스타일로 과거 라멕 시대에 가인의 도시에서 유행하던 씰라가 추구하던 그 시대의 미를 보는 것 같아 섬직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씰라라는 것은 프랑스 어로 바꾸면 ‘느와르’(Noir)라고 합니다. 느와르라는 말은 도시의 낮의 문화에 반대되는 어둠의 문화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둡고 침침하지만 반면에 무엇인가 매력을 가지고 있는 문화가 바로 느와르라는 문화입니다. 시골에는 밤의 문화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 문화 속에는 씰라와 같은 어둠의 문화 즉, 느와르라는 재미있고, 무엇인가 매력을 주는 듯한 화려한 불꽃과 같은 밤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불꽃은 밤의 화려하게 장식하지만 결코 생명이 길지 않습니다. 불꽃이 터지는 단 몇 초만이 아름다울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불꽃이 터지는 것 같은 잠깐의 쾌락을 좇아 오늘도 도시의 밤에 머물러 있기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도시의 이곳저곳에서 씰라를 만나 인사하고, 그 씰라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라멕의 두 아내였습니다.

  라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그 첫째가 아다의 아들인 야발이었습니다. 야발이라는 뜻은 ‘움직인다’ 또는 ‘소리지르다’라는 뜻으로 그는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차 산업의 선구자였고, 대농자의 지주였습니다. 그는 육축과 농장을 통해 먹거리 문화를 장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인의 도시의 식량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식품업계의 종사자가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유발이었습니다. 그는 수금과 퉁소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연예계의 대부라는 것입니다. 문화 서비스 산업의 아버지로서 그는 그 도시의 연예 문화를 장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두발가인이었습니다. 그는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날카로운 기계란 무기를 의미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점령하고 사람을 죽이는 기계들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 아들 외에 한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22절 말씀에 보면 나아마라고 했습니다. 나아마는 ‘재미있다’ ‘즐겁다’라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신세대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무거운 것을 싫어합니다. 생각하는 인생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즐거운 것을 좋아 합니다. 데이트를 하는 남성은 반드시 유머를 준비해야 합니다. 유머가 없는 남성은 오늘날 인기가 없는 남성입니다. 얼마 전 미국의 팝 가수 마돈나가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호감하고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의 재목은 ‘Girl just want to have Fun’이라는 노래와 ‘Material Girl’이라는 노래입니다. ‘Girl just want to have Fun’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오직 재미만을 원하는 아가씨’ 혹은 ‘오직 즐기기를 원하는 아가씨’ 정도로 번역할 수 있고, ‘Material Girl’은 ‘물질로 쾌락을 추구하는 아가씨’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라멕의 막내  딸 라아마는 도시 문화 속에서 육체적인 쾌락과 물질의 쾌락을 좇아 살고 있는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을 생각나게 하는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자녀들의 아버지요 남편인 라멕은 어떤 사람입니까? 23절과 24절 말씀에 보면 라멕이 고백하기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주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가인에게 가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칠 배로 그에게 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라멕을 스스로 말하기를 “여보, 이리 와 바요. 오늘 내가 기을 가는데 어떤 놈이 내 몸에 상처를 내었지 뭐요. 내가 그를 어떻게 했겠소.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지. 가인에게는 벌이 칠 배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손을 대는 놈은 칠십칠 배를 갚아 줄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당시에 노래가 되어 유행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23절과 24절은 안쪽으로 들어 쓰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인용구가 아니라 시나 노래를 의미합니다. 즉, 라멕은 이것을 시로 만들어 대중가요로 만들어 사람들이 노래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오경준이라는 목사님이 있는데 이 분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다와 씰라여(컴 온 베이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내가 오늘 길을 가는데 젊은 놈 하나와 시비가 붙었어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그 망할 놈이 내 몸에 작은 상처를 입혔어 그래서 말이다 난 그 놈을 죽여 버렸다 우리 조상 가인을 해친 놈은 벌이 일곱 배라지만 감히 나 라멕에게 덤비는 놈은 일흔일곱 배로 갚아 주리라 음 홧홧홧홧....”

  이런 어둡고 침울한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쾌락과 물질과 힘이 지배하던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술에 의지하여 하루라도 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고독한 노인이 홀로 살다가 외로이 죽은 시대, 보험금을 노리고 그 아내와 아이들을 독극물을 먹이고, 아직 죽지 않은 아이를 목을 졸라 죽이고, 그 집에 다시 불을 놓아 죽이는 아주 잔인한 시대. 아버지가 잔소리 한다고 그 자리에서 칼을 들고 그 부모를 찔러 죽이는 시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해서 서로 살림을 차리는 시대. 끊임없는 전쟁과 석유파동이니 경제파동이니 하면서 부유한 자들의 배가 더욱 불러지는 불안과 불공평의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쾌락과 방탕과 살인과 원한과 분노로 가득 찬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4장은 하나님의 사람 아벨이 가인에 의해 살해당한 후에 가인의 후손이 어떻게 이 세상에 번져 나가고 어떻게 쾌락의 도시가 되었는지, 육신의 세상이 되었는지를 잘 설명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은 이렇게 허무하게 육신의 세상으로 마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4:26절에서 에노스라는 아담의 손자 시대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구절을 읽게 됩니다. 아직도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비록 도시 문화로 라멕이 다스리는 육시의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하나님의 역사는 마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둠의 시대였던 라멕의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셋과 그 아들 에노스를 중심으로 고통 중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1-4절에는 위대한 역사의 시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습니다. 이상도 보이지 않았고, 환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그 시대의 비전과 꿈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의 눈은 너무나도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다. 할렐루야!

  라멕의 시대가 어두워도 하나님은 소망의 등불을 끄지 아니하였습니다. 에노스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새로운 소망으로 두셨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모두가 타락하고 모두가 범죄의 길을 가고 있었을 지라도 아직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새로운 믿음의 사람 사무엘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39대의 채찍에 맞아 고통 중에도 바울과 실라는 낙심하지 않고, 믿음의 등불을 끄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찬양했고, 기도했습니다. 땅은 흔들렸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빌립보 교회는 튼튼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라멕의 시대처럼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 시대처럼 어두울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처럼 우상과 거짓으로 가득 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등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서 소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는 진실로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고, 세상을 이기는 힘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도 라멕의 시대에서 살았던 에노스와 의로운 믿음의 사람들처럼 오직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원합니다. 진실로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면 아직 소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과 멸망과 죄악의 시대에 영적인 소망을 가지고 삶으십시오.

  진실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과 은혜가 여러분들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용 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