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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계를 초월하는 사람 (요 4: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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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은 근육이 발달하여 자신의 몸길이보다 200배를 뛸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벼룩을 잡아 유리 병에 넣고 유리병 중간을 투명한 유리로 가로막으면 벼룩은 뛰어오를 때마다 등이 유리에 부딪치게 되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계속 실험을 하면 벼룩은 마침내 유리 높이 직전에서 뛰기를 멈추어 버린다고 합니다. 나중에 중간의 유리 장벽을 없애도 벼룩은 예전 유리벽 전에서 멈추어 버린다고 합니다. 벼룩은 결국 자신의 세계를 유리 칸막이 이하로 국한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일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각이나 청각, 촉각, 후각 등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은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 경험의 한계에 갖혀 새로운 세계로 가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유리 병 중간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인생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은 왕의 신하로 아들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것을 통하여 예수님 만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인생을 산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왕은 헤롯이기 때문에 헤롯의 신하인데 여기 신하는 왕의 신임을 받아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왕궁에 살던 사람이고 막강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 평범한 사람이 하지 못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왠만한 사람은 모두 그의 부탁을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말 한마디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아무리 많은 부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용하다는 의원을 모두 찾아다니며 치료를 부탁해지만 소용없습니다. 비싸다는 약을 돈 아끼지 않고 다 먹여도 차도가 없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만납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최후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자식의 병이 낫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갖가지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사업문제로, 인간 관계문제로, 자식문제로, 경제 문제로, 질병문제로 나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장벽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유리벽을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능력있는 신앙인으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예수님을 만나면 한계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47)

정채봉님의 만남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오늘 나오는 왕의 신하를 보십시오. 아들이 질병에 걸려 죽을 위기를 만났습니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지식도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병에 걸린 아들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나아가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헤롯만 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와 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우리의 신분을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것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분입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입니다. 걸레를 아무리 낙스로 세탁을 한다하여도 행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인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 능력있는 자로 살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 주로 고백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찾아가 주라고 고백합니까? 뭐가 아쉬워 예수님께 나아가겠습니까? 그 한계 상황 때문에 더 겸손해 집니다. 그 한계 상황 때문에 주님을 찾습니다. 그 한계 상황 때문에 더욱 매어달립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고 핀잔을 하는데도 그는 예수님께 매어 달리며 주라고 고백합니다. 왕만이 자신의 주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자신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한계는 예수님의 초청장입니다. 예수님이 만나자고 보내는 초청장입니다. 오히려 삶의 평탄함은 우리를 도태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나 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그 때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통해 진정 위대한 능력을 가진 인생을 만들기 위해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라고 사랑의 초청장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인 가운데 미즈노 겐조라는 일본인이 있습니다. 이 분은 11세 때 뇌성 소아마비로 성장이 멈추어서 그 때부터 자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뼈에 가만히 살만 덮어놓은 것 같은 그런 하반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성장한 것은 얼굴밖에 없는데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동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고통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 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아니했을 것을..." 제목은 '괴롭지 않았더라면' 입니다. 오늘 이 시간 자녀 문제로 괴로움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풀려고 해도 해결 되지 않는 인생의 숙제가 있습니까? 나만 왜 재수없이 이렇게 사냐고 원망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의 초청장일 수 있습니다. 손벌리고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께 기도하면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합니다.(47,49)

주님을 만나면 기도해야합니다. 믿음의 기도로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가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자신의 한계를 믿음으로 뛰어 넘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첫 번 기적을 베푼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46).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소문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고치고자하는 열망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상관이 없습니다.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왕의 신하입니다. 당시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메어 달립니다. 49절 보십시오. "주여 내 아이가 죽기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은 간청하는 왕의 신하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아직 온전하지는 못한 믿음이지만 그 믿음의 씨를 보신 것입니다. 간절히 구하는 왕의 신하의 믿음을 통해 인간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아들에게만 가야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부르짖는 모습을 보시고 능력을 베푸십니다. 그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한계 상황을 극복하게 됩니다.

혈루병 앓은 여인-"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9:22)"
두 소경-"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29)"
가나안 여자의 딸-"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한결같이 믿음으로 주님게 나아가 부르짖는 사람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능력을 나타내주시는 장면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사람은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볼 수가 없습니다. 런던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전자 망원경으로 보면 은하계에서 약 2000억 개의 별을 볼 수 있지만 육안으로 약 10만개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너무 미세한 것도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큰 소리도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아무리 유능한 의사일 지라도 모든 병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제 몸이 좀 이상해요. 어딘가 아픈 것 같은데…""그래요? 우전 진찰부터 해봅시다."진찰을 마친 의사가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했다고 합니다. "별로 나쁜 곳은 없습니다. 단지 운동부족인 것 같으니까 하루에 1㎞라도 걷도록 하세요."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네? 저 보고 걸으라고요?""전…집배원인데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만만한 사람이 많지만 모든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왕의 신하도 위기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예수님께 나아가 믿음으로 기도하여 극복하고 뛰어 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적은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칭찬한말한 믿음을 소유하고 간절히 부르짖어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 능력있는 종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는 주저하지 마시고 우리 주님 만나 주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아 능력있는 인생을 사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는 세계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편견이 생기고 선입견이 생깁니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왕의 신하를 보십시오. 그 당시 배울 만큼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자신의 아들도 살 수 있다는 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48) 기적을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에게 직접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주든지 귀신을 쫓아주든지 무엇인가 해 주어야 낳을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인식의 한계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50절에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황당합니다. 살 것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씀한 것도 아닙니다. 가서 고쳐 주겠다는 말도 아닙니다. 지금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이 때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두말하지 않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52절을 보십시오.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습니다.

어느 부부가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인이 자기가 다니는 성당의 신부에게 의논하였습니다. "신부님, 정말 무서워 죽겠어요. 내가 계속 성당에 나간다면 남편이 저를 죽이겠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 가엽게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내가 계속 기도를 하겠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주실 겁니다." 그 다음 주일에 그 부인은, "오 신부님, 아직까지는 무사합니다. 그러나...." "또 무슨 일이지요?""어제는 남편이 다른 말을 했어요. 만약 내가 성당에 계속 다닌다면 신부님을 죽이겠다고 말했답니다.""그래요? 그렇다면 마을 저편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 가보세요."

느낌 중심이 아닌 말씀 중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자기 스타일과 편견, 아집, 고정관념에 따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을 통해 내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그 분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을 믿으면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했습니다.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 그의 마음을 고쳐 주시길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가 고침 받아 살아났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낫기 시작한 때를 묻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 대한 확신으로 충만해집니다. 53절에 보면 온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처음 믿음은 불신과 섞인 믿음이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그 믿음과 혼재된 연약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치료받고 온 가족에게 믿음의 불을 붙이는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7장 25절을 통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구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눈앞에 나타난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에 불과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고 약속을 믿고 갑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민 23:19)"

사람은 아는 만큼 행하고 자기 지식이 자기 세계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의 세계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자기 인식의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자기의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자기를 스스로 작은 자기 동굴 속에 갇혀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이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전문가의 말이라면 잘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왜 믿지 않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현상에서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해 보십시오. 거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말씀에 의지 하여 용서해 보십시오. 그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 그는 가면서 아들이 살아났다는 환희의 송가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믿고 전진하면 환희가 넘치는 사건이 전개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한계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께 간구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머지않아 가는 길에 환희의 송가가 들려 올 것입니다.  (문 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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