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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 (눅 21: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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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동안 여러분들이 보여주셨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동안 터키 성지 여행과 동유럽 종교 유적지 탐방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떠나 있게 될 때 그리고 말씀에서 벗어나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지구촌의 모습을 통해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기에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의 마지막 때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 다시 한번 살펴봄으로써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갖추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마지막 때의 징조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지구촌을 뒤덮었던 사고와 재난의 소식들은 우리의 마음을 아주 무겁게 만듭니다.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미국을 망라해서 폭우와 태풍 그리고 허리케인으로 인한 물난리가 온 지구촌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서 재난을 당하고 죽어갔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재난들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과 같은 곳은 미리 대비하지 못했기에 더욱 피해가 컸다고 하는 말들도 합니다. 하지만 재난에 대한 대비가 아주 잘 되어 있다고 하는 독일이나 스위스의 물난리를 보면서 사람의 한계를 벗어난 자연의 섭리 앞에 우리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미개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지금 가장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벌어졌습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최대 피해지역인 미국 루이지애나주(州) 뉴올리언스에는 전체 인구 48만 5000여명 중 약 10만 명이 대피하지 않은 채 남아있었습니다. 이들 중에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피해 규모는 엄청나게 늘고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이며 왜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을까요?
뉴올리언스 주민 중 67%는 흑인입니다. 잔류자의 대다수는 이들 흑인들로, 해수면보다 낮은 뉴올리언스 시내에서도 가장 저지대에 위치한 빈민가에 삽니다. 침수 우려 때문에 주택가격이나 임대료가 가장 싸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먹고살기에 바빠서 허리케인 정보를 접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허리케인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너무 가난한 그들에겐 차량 등 대피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타지에 가봐야 먹고 살 길도 막막해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미국 뉴올리온스 시의 거의 대부분의 도시가 물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렇듯 그들이 사는 도시가 도시의 2배 이상인 폰차트레인 호수와 남쪽을 흐르는 미시시피강보다 더 낮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하게 지켜주는 둑은 3급 허리케인까지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닥친 허리케인은 4급이라고 합니다. 결국 둑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렸고 당연히 호수보다 낮은 도시로 물이 밀려들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는지 파악할 수조차 없는 형편입니다. 시체 처리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생존자 구출에도 힘겨운 상태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살아남아 있는 자들의 약탈과 방화가 이어지면서 더욱 지옥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에 보지 못했던 이러한 엄청난 재난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으면 너희는 스스로 보고서, 여름이 벌써 가까이 온 줄을 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살면서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는 것을 보면서도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라도 다 “아하 벌써 여름이 가까워져 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닥치는 온갖 재앙들을 볼 때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든 징조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야 할 것이요 따라서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대비했더라면 오늘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지막 때가 이렇게 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합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 벌어질 일들을 경고하고 계신데 이런 세상의 난리들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당장에 먹고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보람 있게 사는 것입니다. 정말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복입니까?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당장은 여행이 즐겁습니다. 잘 먹고 즐겁게 지냅니다. 그렇지만 돌아가야 할 집이 있습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그 곳에서 여행하면서 살수는 없습니다. 이번 여행길에서 안내를 맡았던 한국인 가이드들을 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이 그 것입니다. 유학을 왔다가 주저앉은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들 따라 이민을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안내하던 관광객들을 떠나 보내면서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재난 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안 됐다고 안타까움의 탄식을 합니다. 하지만 내가 바로 그 재난 당한 사람들 중에 남게 될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오시는 날 주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버려진다면 마치 엄청나게 몰려드는 물 속에 잠겨 둥둥 떠다니는 시체처럼 그렇게 우리가 지옥불 속으로 던져진다면 그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아직은 평안하다고 할 때 준비해야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기회의 때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말씀 따라 참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축복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짧은 인생입니다. 언제 지나갔나 싶게 지나가는 인생길입니다. 오죽하면 야곱이 그 나이 137세에 고백하기를 험한 나그네 세월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마치면서 정말 보람된 삶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오늘의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면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날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항상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염려합니까?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걱정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 그 날은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방탕과 술 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우리의 마음이 짓눌리고 있다면 결국 그 염려하던 일들이 닥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다리 위 압사 사건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은 항상 폭탄 테러 때문에 걱정들을 합니다. 언제 어디서 폭탄 테러가 일어날지 몰라 염려들을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들이 폭탄이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우왕좌왕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서로를 밀치고 넘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죽었습니다. 일부는 두려움에 강물로 뛰어들었다가 또 물에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 마음에 있는 폭탄 테러의 염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염려의 말을 하면서 살았기에 폭탄이 터지지도 않았는데도 폭탄이 있다는 말만으로도 천 여명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되는 마음에 짓눌리지 않도록 주님을 바라보고 승리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피곤하고 힘들고 지칠수록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면서도 아브라함은 조금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설사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려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기 위해 저를 다시 살리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물은 어디에 있느냐고 아들이 물을 때 그는 담대하게 주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제물로 드릴 염소를 친히 준비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오히려 내게 힘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라보고 믿는 대로 고백하게 될 때 “너희 말한 대로 되리라. 너희가 믿은 대로 되리라” 약속하셨던 주님께서 그렇게 힘주시고 은혜로 우리의 길을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고백하면 됩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리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픕니까?
주님을 바라보시고 주님께서 나를 평안케 하신다고 고백하십시오.
몸이 아픕니까?
주님의 치료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손을 얹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느끼는 아픔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더 신뢰하고 그렇게 고백하십시오. 나는 나의 증세보다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 주님께서 나를 다 치료하셨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래도 두려움이 있습니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오히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이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모든 상태를 주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십시오.
그것이 바로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는 것입니다.

늘 깨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믿음의 고백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받았다고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믿음의 고백을 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주님의 역사가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부족하다고 느낍니까?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주님을 고백하십시오. 주님이 다 채워주셨다고 고백하십시오.
깜깜한 절벽입니까? 주님께서 새 길을 환하게 열어주셨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하게 될 때 언젠지 모르게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없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거기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곧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냥 맡기는 것입니다. 의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만 보여집니다. 염려스러운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염려스럽게만 느껴집니다. 걱정으로 밤을 새운다고 그것이 해결이 됩디까? 그저 내 몸만 더 힘들고 마음만 더 괴로울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면 그저 단잠을 이룰 수가 있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믿는 바 하나님은 모든 것에 풍족하게 채우시는 분입니다. 사랑으로 넘치는 분입니다. 우리로 온전히 하나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서로를 축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를 붙들어주고 서로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부족하기에 세워줘야 합니다. 염려되기에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너는 안 돼가 아니라 너도 할 수 있다고 인정해 주십시오. 나는 안 돼가 아니라 나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십시오. 또 그랬어가 아니라 그래도 너도 할 수 있다고 끝까지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넘어지고 쓰러져도 또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

도대체 그 무거운 비행기가 어떻게 하늘을 떠서 날아갑니까? 힘을 내서 활주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그리고는 까마득하게 날아오릅니다. 아무리 달려도 너처럼 무거운 게 어떻게 날 수가 있어 하고 중간에 멈추어버리고 포기해 버리면 그 비행기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날 수가 있다고 믿기에 활주로를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비행기도 결코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뒤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비행기가 떠날 때는 차가 비행기를 뒤로 밀어주어 앞으로 갈 수 있는 자리까지 옮겨줍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를 능력이 있다고 해도 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 자리를 잡기까지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사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바나바의 격려 때문입니다. 그 바나바의 격려로 도무지 쓸모 없을 것 같던 마가도 좋은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프레드리히 군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루터를 끝까지 믿어주고 지켜주었기에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격려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협력자요 축복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보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향남교회가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런 중보 기도자로서의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끊임없는 중보기도와 격려가 있기에 또한 제가 하나님의 역사의 한 장을 이끌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세워주고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계속하십시오. 주님의 약속대로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십시오.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서로 용서하며 축복하기를 계속하십시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며 말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주시고 구한 대로 이루어주시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른 아침부터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으로 모여야 합니다.
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데도 염려가 떠나지를 않습니까? 아니 왜 여전히 두렵기만 하고 여전히 나도 모르게 불평이 나옵니까? 세상 생각으로 우리 마음이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조금만 아프면 그거 큰 병이면 어떻게 하냐고 말합니다.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듣다보면 마음에 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두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거기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확신을 심어주는 격려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세상의 도리에 매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야 됩니다. 우리의 신뢰의 기준, 믿음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의 기준이 세상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면 세상 염려는 다 떠나가게 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하고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예하고 아멘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왜 안 되죠? 그것은 우리가 말씀에 사로잡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말씀에 사로잡히려고 해도 내 안에 말씀이 있어야 사로잡힐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사람될 수 있도록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성전으로 모여든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주님 전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회가 중요합니다. 물론 새벽 시간 이른 아침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말씀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것 같아도 오히려 더 힘이 넘치게 되고 더 편안히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들은 바 말씀들이 우리 심령 속에 녹아지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심령이 가득하게 됩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말씀에 세상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 힘들다고 느끼고 그렇게 말을 합니까? 말씀이 나로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말씀이 내 안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주님 앞에 나아와 한 시간 말씀을 들어도 큰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 우리가 시간시간 말씀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까? 바로 그 말씀 안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면 말씀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해서 모든 근심되는 일들, 염려되는 일들, 내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오히려 간단히 그리고 아주 쉽게 해결해 나갈 수 있더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능력이요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나타남입니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하려고 했기에 우리가 힘들었습니다. 도무지 해도 해도 안 됐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힘으로 주님의 공급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면 모든 것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생각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됩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꾸던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이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아름답게 열매맺게 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나는 기도도 잘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질 때 그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올려지게 될 때 그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요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로 맺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염려 근심 걱정의심으로 가득한 자가 아니라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된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되도록 이른 아침부터 말씀을 듣기 위해 성전으로 모여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이를 위해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끊임없이 믿음의 고백을 하십시오. 그리고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서로 축복하면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축복자가 되십시오. 격려자가 되십시오. 사랑의 사람이 되십시오. 의심이 되거든 더욱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그래서 우리 앞에 펼쳐지는 여러 가지 환난들로 인해서 염려하는 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의 고백을 통해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 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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