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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눅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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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은 그렇듯 아등바등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많은 철학자들이 왜 사람은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죽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지만 진정 사람이 사는 이유를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생의 비밀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인생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대로 세상의 것을 남들보다 많이 지니고 있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려고 하고 남들보다 높아지려고 하고 남들보다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비교해서 여전히 부족한 자신을 느끼게 될 때 그로 인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왜 나는 남들처럼 살 수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많이 배우면 행복할까요?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있으면 행복할까요? 아니 남들보다 잘 살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행복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행복한 삶을 그들이 살고 있느냔 말입니다. 그들 역시도 여전히 목말라 있습니다. 학자들이 자기의 학문에 만족하느냐 하면 아닙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보다 더 많이 알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부자는 그러면 그만큼 가진 것이 있으니 만족하면서 살아갈까요? 아니요 그들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권력자는 가진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또 밤잠을 설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사는 이유를 그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왜 지어졌는지를 그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참 행복의 근본인 하나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세상을 바라보다가 그것만으로 부족한 듯 싶어 헤매는 사람을 봅니다. 하지만 주께서는 "네게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 자족하는 삶에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에게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이것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너희에게 징조로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먼저는 예수를 없앨 방책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어떤 날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반드시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와야 된다고 명령하셨던 삼대절기 중의 한 날입니다. 그 중에 초막절과 수장절은 하나님께서 그 삶을 책임져 주시는 절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년 중 수고하여 거두는 절기요 그들의 삶 속에 함께 하셔서 풍성한 결실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삶에서 구출하여 주신 것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백성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한낱 노예로 살다가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풍족한 땅에 살면 뭐합니까? 그 풍족한 땅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 풍족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날마다 노예로 힘든 일을 하다가 돌아오면 지쳐서 쓰러지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식을 낳고 사는 기쁨이나 있었습니까? 어쩌다 아들이라도 낳았다 싶으면 자기 손으로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비참한 삶이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에서 풀려났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애굽을 9가지 재앙으로 치시고 마지막 장자 죽음의 재앙까지 내리심으로 애굽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그들을 내 보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이제는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가정을 꾸릴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린양의 생명과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바름으로 장자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생명을 맞바꾸어 주신 날입니다. 새 생명을 주신 날입니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물을 드리며 예배하는 날이 유월절입니다. 그렇다면 이 유월절이야말로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가던 자도 살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 죽일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라면 유월절날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면서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간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여 주셨노라고 사죄의 선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제사장의 축복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대제사장들이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수기 6장 24절로 27절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주일마다 함께 축복하는 바로 그 축복의 사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죄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심히 괴로워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요 마음껏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이 그들에게 임하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사람들을 죄에 이끌어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용서를 선포하며 이끌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잡아죽일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하는 그들이, 잘못된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다리가 되어주며 축복해주어야 할 사람들이,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말씀 앞에 바로 세우고 있는 예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눈앞의 가시 같았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받아야 할 찬사를 예수님이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기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백성들 앞에 드러나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다르게 자기들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남들 앞에 거들먹거렸습니다. 잔치 자리의 상석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사 받기를 즐겼습니다. 백성들의 가져오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성전세와 성전에 바칠 제물을 상인들과 결탁해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도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어쫓았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마땅히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고 하신 말씀이 또한 저희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계기를 삼아야 하는데, 그들을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니 자기들을 부끄럽게 만든 예수만 잡아죽임으로 그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그들의 부끄러움이 감춰질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백성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먼저 생각할 것은,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을 먼저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단지 백성들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백성들이라도 두려워하니 다행입니다. 백성들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위정자들을 오늘날 우리는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들이 이권과 대권에만 관심이 있지 자기들을 뽑아준 백성들의 생각은 전혀 생각지도 않는 정치가들의 모습을 우리가 보고 있지를 않습니까

이는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분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사람들만 생각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는 아닌 척하다가도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제 멋대로 살아가지를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진짜 사랑의 사람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주는 일을 기뻐합니까?

물론 우리 향남교회 성도들은 이 모든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고 있기에 감사합니다. 향남교회로 하여금 천국 되게 하고 향남교회 성도들이 천국 백성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정에서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사회에서의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진정 하나님의 사람답습니까? 진정 참된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고 하면서도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진정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신데,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생각지도 아니하고, 단지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까? 더군다나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조차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시도록 간구하는 유월절에 말입니다. 가장 사랑을 실천하여야 할 그들이, 생명을 건져 구원하여야 할 그들이, 생명을 건져 새 생명을 창조하는 날에조차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아닌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우리가 무엇이라 해야 하겠습니까? 이들이 이렇듯 오히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주신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하여 궁리하던 이 엄청난 일을 우리는 무엇이라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십시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심령을 살리는 일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세워주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망이 아닌 이해와 격려가 앞서야 합니다. 비난하기에 앞서서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래서 비난과 책망이 앞선다면 그것이 곧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하는 대제사장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누구 때문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내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수를 잡아죽이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참 사랑을 회복하십시다. 심령을 상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또는 내 마음이 상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핍박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상대방을 세워주고 붙들어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예수를 없애려고 했던 유다의 마음에는 사탄의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다다익선이라고 돈 많다고 싫다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보다 잘 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까?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유다를 보십시오. 아마 유다의 마음에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한 자리 차지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일찍이 열심당원 중 하나였던 저로서는 예수님이 침략군 로마를 다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시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더욱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기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예수님을 보게 될 때 실망감이 더해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정합니다. "차라리 그런 예수라면 없애버리는 게 낫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목숨과 돈을 바꾸기로 흥정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것이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누가 우리로 하여금 돈에 매이게 만듭니까? 누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실망하도록 만듭니까? 돈에 대한 욕심이 왜 생깁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왜 실망스럽게 느껴집니까? 그건 모두 우리가 사탄에게 속고 있다는 뜻입니다. 잠시는 속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탄의 생각에 우리가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주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그 생각을 누가 주었습니까? 바로 사탄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그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 매여 세상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기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내 이름으로 내 생각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주의 열심을 가지고 해야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 충성하는 것이 곧 주께 충성하는 것이요 바로 그런 사람에게 더 큰 일을 맡기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겁게 해 나가게 될 때 하나님이 더 큰 일을 보장하시고 더 큰길을 열어 가시지,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시시하고 보람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 일에 시들해져 버린다면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더 크고 새로운 길로 이끌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무엇이 보람된 일입니까?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보다 더 보람된 일이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보다 더 귀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입니까?

사도행전 2장 7절은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게될 때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온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우리가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모든 일에 기쁨으로 임해야 합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일처럼 보이는 일도 정말 신나게 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보다 그 일도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이 맡겨주셨다고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고많은 일 중에 내가 제일 힘들고 보람도 없는 일을 맡았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맡은 일이 가장 보람된 일입니다.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그런 나보다도 더 낮고 천한 자리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시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머리 둘 곳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어린 아이 하나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끼니를 때우실 때도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유다가 딱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돈궤를 맡았던 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들게 지내시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세금 낼 돈이 없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그 뱃속에 들어있던 동전을 가져다가 세금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여인을 보고 "차라리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만큼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마음도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다 큰 주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할 일은 많은데 가진 것은 없습니다. 지금처럼 예수님을 따르다가는 쪽박만 찰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는 결심을 합니다. 차라리 예수를 팔아버리자. 그러나 그는 그런 마음을 사탄이 주었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불만스럽고, 여전히 괴롭고 힘들고 피곤하고 부족하게만 느껴진다면 먼저 그런 마음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에 먼저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기쁨으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새 길을 여십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할 때 그래서 그것 때문에 몸부림을 칠 때 그것이 곧 예수님을 팔아먹는 유다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내가 불만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오히려 감사의 조건으로 바꾸시고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더 크고 좋은 길을 열어주시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이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첫째는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마음에 상처를 주고 괴로움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들 앞에서는 잘 하다가도 무리가 없을 때, 남들이 없을 때 돌변하여 상처되는 말과 행동을 흔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도 나는 누구처럼 남들 앞에서조차 그렇지는 않다고 하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우리의 행하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단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도록 우리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기쁨으로 섬기십시오. 내가 하는 일이 비록 힘들다 해도 그것 역시 주님의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 보람 없는 일 같아도 그 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만이 감당할 수 있기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이 비록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고 해도,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기쁨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가장 가까운 사람,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더욱 지극 정성으로 섬기며 돌보십시오. 가장 가깝기에, 그냥 지나쳐 갈 수 있는 일이나 말도 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더 조심하십시오.

누가 나를 무시한다 싶습니까? 그 사람을 더 살갑게 대해주십시오. 누가 나를 힘들게 만듭니까? 더욱 다정하게 사랑으로 대해 주십시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우리에게 불만을 심어주고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려고 하는 사탄의 꾀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아울러 땀흘려 수고하지 않고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지 않고는 기쁨으로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모든 것이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요 눈물이 있기에 기쁨의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습니까? 그렇기에 더욱 잘 하도록 하십시오. 내가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습니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큰사랑으로 감싸주십시오. 그래서 사탄이 주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 영광돌리며 온 백성에게 칭송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 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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