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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하게 되는 비결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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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문기태 목사

(빌 2:5) a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빌 2: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빌 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 2: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빌 2:10) b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잇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고상한 욕망은 자기생을 존귀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비록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성공하여 유명하게 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크게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가족들에게만큼은 존경받고 싶어합니다. 유명해진 사람은 더 유명해지고 싶은데 인기가 식어지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마약을 하고 불의한 방법을 동원하다가 감옥에 가거나 크게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존귀하게 되고 싶어하는데 그 꿈이 좌절되면 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폭력적이 되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잠간동안이나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아 주기를 원하여 새빨간 거짓말을 일삼는 거짓말장이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로라도 화려하게 치장하여 자기의 존귀함을 과시하려고 분에 넘치는 사치와 낭비를 일삼다가 큰 빚을 지고 패가망신을 당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유명해지고 시들지 않는 인기를 누릴 수 있습니까? 사람에게 존귀하게 되어 주변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영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하나님께서 높여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시면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명하게 만드시면 잠시 잠간 반짝하는 인기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두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며 그 인기가 시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만드신 대표적 인물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말씀 9절에 '하나님게서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셨다고 말슴하십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2000년이 지나도록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그분의 영향력은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인생을 드리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땅위의 사람들뿐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도 그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땅 아래 악한 영들까지도 그 이름의 권세앞에는 쩔쩔매고 굴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높이시면 존귀하게 됩니다. 유명하게 됩니다. 존경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원리를 알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의 노력과 수단으로 존귀해지려고 몸부림치고 잇습니다. 결국 대부분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참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어쩌다가 극소수 성공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으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주 잠간 반짝하다가 급속도로 추락합니다. 허사가 되고 허무함에 사로잡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높여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가장 존귀케 하시고 모든 사람가운데 높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시고 겸손함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시자 하나님께서는 만물위에 가장 높이셨습니다. 성경적인 원리는 교만하여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바닥에까지 추락하고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면 하나님께서 최상으로 높여주십니다.
그러면 겸손하여 낮아지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무조건 아무에게나 굽신거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비굴하여 아첨하고 아부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무조건 부족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겸손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왜 성경은 예수님을 겸손의 모델로 제시합니까?

A.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됨을 포기하셨습니다(v.6).
1)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 제 2 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천지 창조와 인류 구원의 사역에 동등하게 참여하여 중요한 감당하신 분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2)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그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동등됨을 당연하게 생각하여도 되는데 하늘의 보좌를 포기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다 포기하고 비우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다시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아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3)오늘날 우리도 그런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a. 내 권리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내 신분을 보장받으려고 목청을 높일 수 있습니다. 내 지위를 가지고 정당한 대접을 받으려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b. 내가 가진 것을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여한 부분을 가지고 그 댓가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과 적어도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대두해 달라고 맞부딪쳐 싸울 수 있습니다.
c.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높여주시도록 기다리며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 드리는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의 자존심과 욕심을 비우고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노래는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휴대폰 벨소리로, CD로, 초인종으로, 영화 주제가로 들려져 벌써 여러 해째 어둔 세상에 꿈과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처럼 희망을 주는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힘입니다.
모 잡지사에서 원작자를 알아내기 위해 주위를 수소문한 뒤 기자가 여러 번 사정하고 졸라서 얻어낸 인터뷰 끝에 저자는 제발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그는, 저작권법이 시퍼렇게 살아서, 조금만 표절해도 오 년 이하의 징역이나 이천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황금만능 세상인데도, 바보같이 그 귀한 노래에 저작권 등록을 해놓지 않아 수억의 인세를 놓쳐버린 사나이였습니다.
아차 실수로 돈은 그렇다 쳐도 명예나 인기만큼은 고스란히 챙길 법한데 그는 그것도 내 것이 아니라며 강하게 손을 내젓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누구나 듣고 부르며 삶의 소망 얻기를, 그 가사와 곡을 통해 살아가는 기쁨을 얻으면 그만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남의 유익을 위해 나의 권리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내가 당연히 받을 영광을 양보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억울하지만 포기를 결단함으로 더욱 존귀케되기를 축원합니다.

B.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입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v.7).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자지 않으면 피곤하고 매를 맞으면 아프고 병들면 고통스럽고 육체의 많은 제약속에서 불편과 고난을 감수해야하는 연약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때문에 인간이 되기를 자원한단 말입니까? 사랑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가운데 멸망의 길로 들어섰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위험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인생을 외면할 수 없어서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대신하여 죄짐을 짊어지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죄에서 돌아서도록 사람으로 오셔서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시고 생명의 길로 이끄시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되 존귀한 신분으로 오시지 않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섬기는 자의 일생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하셨습니다. 스스로 종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만 씻기신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더러운 죄악을 자신의 피로 깨끗이 씻겨 주셨습니다.
3) 우리는 어떻습니까? 얼마나 낮아지고 있습니까?
a. 모두가 다 주인되려 하고, 왕노릇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높은 자리를 원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모두가 고난의 자리, 섬김의 자리, 더러운 것을 씻기는 자리를 피하고 대접받는 자리, 편안한 자리, 영광받는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앉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b.주님은 우리에게 종의 도를 가르치신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마20:20-28)
이 세상에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들은 남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희생과 섬김으로 오직 다른 사람을 염려하고 위할 때 그는 바울에게나 누구에게든지 귀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쉘 실버스타인의 작품 중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소년의 집 근처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 이 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그네를 뛰기도 했습니다. 그 그늘에서 마냥 즐겁게 놀았습니다. 나무는 그에게 이 같은 놀이터를 제공했습니다. 소년은 자라서 그네를 다시 타지 않게 되고 이제는 나무 열매를 구하게 됐습니다. 다행히도 나무는 좋은 열매를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가 청년이 되어 집에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내 가지를 베어다가 불을 때서 더웁게 하라고. 장년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와야겠다고 나서면서 그에게 배가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나의 몸통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서 타고 목적지로 가라고. 그러고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멀리 떠난 소년은 한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백발이 되어서 노인의 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밑동에 걸터앉아 쉬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섬김의 자리로 스스로 내려가는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반드시 최고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종이 되기를 기피하지 마십시오. 그중에서도 새 신자와 전도대상자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을 가장 존귀하게 높여 주십니다. 새 신자와 전도 대상자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정성껏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새 가족 섬김이는 이름 그대로 종의 자세로 새 가족을 정성껏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새가족이 후에 믿음이 성숙하면 마음 속 깊은데로부터 우러나는 마음으로 평생 존경할 것입니다. 목자는 목원을 종이 되어 섬겨야 합니다.

C.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v.8).
1) 예수님도 십자가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했습니다.
a.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죽이려는 이들을 진멸하고 십자가를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b. 그러나 주님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에 당신의 순종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다시 의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처럼 철저한 순종을 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이들로 예수의 이름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3) 우리도 예수님처럼 복종을 할 때 겸손을 인정받습니다.
a. 때로 순종하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용납하지 않을 때도 있고 너무나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할 것 같아 망설여질 때도 있습니다.
b.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되고,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고 최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c. 따라서 죽기까지 순종할 각오를 가지고 복종할 때 불순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어느 작은 마을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집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를 영접하고 헌신할 사람을 계속해서 초청하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마지막날, 한 작은 소년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목사님은 부흥회 기간 동안 예수를 영접하고 헌신할 사람이 겨우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에 무척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사람, 예수를 영접하고 헌신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온 이 소년만은 달랐습니다. 그의 눈에 뜨거운 불꽃이 일어났으며 그 소년은 "오! 하나님. 저의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에게 아프리카를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리빙스턴'입니다. 작은 한 소년의 눈에 일어났던 불꽃이 흑암의 아프리카 대륙에 복음의 빛을 환히 밝혀 주었습니다. 복음 진리의 실상을 깨닫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나아가 그 앞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날로 영적 축복과 결실이 더해집니다.

성 프랜시스 수도원에 있는 경건한 수도사가 기도 중에 영안이 열려서 하늘을 보니 보좌 하나가 비어 있는데 그곳에 광채가 찬란하게 비취므로 천사에게 묻습니다. "천사님, 저 보좌는 왜 비어 있습니까?" "천사가 앉아있던 자리인데 타락해서 쫓겨나서 비어 있지" "그러면 거기에 누구를 앉힐 것입니까?" "겸손한 성 프랜시스가 앉을 것이다." 이 수도사가 어느날 성 프랜시스와 길을 가다가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진실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강도나 악한 자가 많은데 어찌하여 선생님이 그런 자들과 비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악한 자가 많지만 우리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그 사람들에게 주었더라면 나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때 수도사는 감탄하면서 '과연 내가 보고 들은 말이 오늘날 합당한 것임을 알겠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낮추십시오. 당연히 누릴 나의 권리라고 주장하지 마시고 한 두가지 정도는 포기하십시오. 종의 위치에까지 내려가 섬기십시오.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면 죽기까지 복종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 여러분을 지극히 높여주실 것입니다. 존귀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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