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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래도 감사 (겔 36:36-38, 전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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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원호성 목사

  연말이 다가오면, 인쇄소에 달력 주문이 들어옵니다. 그 해의 경제지표를 알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주문량이 얼마나 되느냐와 직결된다고들 합니다. 금년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의 인쇄소가 울상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작년보다 더 달력 주문량이 감소했다고 하니 금년 경제 사정이 어떤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추수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지금까지 돌보아 주신 하나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삶의 자리를 살펴보면, 흉년의 때인 것이 틀림없는데, 무엇으로 감사해야 하는가? 흉년의 때이지만, 그래도 감사해야 할 이유를 전도서의 말씀을 통해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1절)

  본문의 보배로운 기름이란, 좋은 향기를 발하는 회소가치가 있는 최상품의 기름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 재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보배로운 기름에 초연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이 낫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각 사람의 이름에는 인격과 품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에 맞는 삶을 사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업적과 영적 교훈의 말씀 등에 당신의 인격과 품성을 담아 세상에 남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더 값진 것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당신의 존귀한 이름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란 말씀을 예수의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라고 바꾸어도 무관할 것입니다.

  막달아 마리아가 보배로운 기름을 대신하여 예수의 이름을 선택한 대표적인 성경 인물입니다. 당대 최고의 고가품인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아낌없이 부은 여인의 행위는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이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한 마리아란 이름이 예수의 이름을 택하였더니 가장 존귀하고 복된 이름으로 바뀌는 축복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흉년의 때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모두 세상의 부귀 영화보다는 생명되시는 예수의 이름을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슬픔이 웃음보다 낫고"(3절)

웃음은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웃고 즐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회적 지위와 계층을 뛰어넘어 누구와도 같이 식사를 하면서 웃고 즐기며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의 경험과 함께 실패의 경험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을 차분히 살펴보면, 성공의 경험보다도 오히려 패배와 실패의 경험을 더 많이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장 큰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환대하는 곳에서는, 그 역시 동일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성공의 경험을 맛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수난당하시던 날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쳐 버리는 실패의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의 경험을 안고 낙향하여 다시 고기배를 탄 베드로를 찾아가셨다. 그리고는 쓰디쓴 실패의 상처를 앉고 머리조차 들 수 없는 그에게 말씀하시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단다. 난 한번도 널 포기한 적이 없단다"의 뜻이 이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성공의 길을 걸어갈때도 동행하시지만, 내가 실패의 경험을 안고 고통 할때도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오히려 흉년의 때에 더 내게 친근하게 다가 오셔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재확인 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실패의 경험 속에서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우리에게 있기에, 이 흉년의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끝이 시작보다 낫다. (8절)

격언 중에 "시작이 반"이란 말도 있듯이... 시작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역시 이 말씀도 역설적이게도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또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느헤미야의 경우를 통해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느헤미야는 포로기때에 이국 땅에서 출생하고 성장했고, 예루살렘에는 단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던 인물입니다. 그러던 그에게 황폐해져 버린 조국 이스라엘의 소식이 들려왔고, 이 소식은 그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겐 이스라엘로 돌아갈 만한 어떤 권세나 능력도 없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에게 길을 열어 주셔서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허락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진짜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무해진 도성과 패배주의에 빠진 동포, 그리고 이미 기득권을 누리던 자들의 모함과 위협뿐이었습니다. 조국 이스라엘을 재건하겠노라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다시 복구시키겠노라는 원대한 비전을 품고 돌아왔지만, 그의 시작은 매우 힘겹고 험난하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느헤미야는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내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야 맙니다. 이 위대한 역사를 가능케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삶의 고비 때마다 비록 그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하나님이 그의 가슴에 심어 주신 비전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그 끝을 창대케 해 주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끝"이란, 어떤 역경을 만난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 소망을 붙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차이는, 흉년의 때에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사느냐에서 드러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흉년의 때를 만나면, 낙심하고 절망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흉년의 때에 소망 가운데 더욱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지금껏 남들보다 더 열심히 수고하며 살아왔는데, 거두어들인 소출이 많지 않더라도,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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