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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뜨는 별, 지는 별(삼상 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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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 목사 

흔히 우리가 사회적으로 성공이나 출세의 상징으로 말할 때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별"입니다. 사관학교를 나온 초급장교가 대과없이 30년 정도 군 생활을 하다보면 어느덧 "별"을 달 수 있는 장군의 기회가 오게 됩니다. 하지만 군인이 별을 단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어느 덧 중년을 넘기면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다 이기고 전략가가 된 이의 어깨에 별을 달아주는 것은 군인으로서 최고의 명성과 영예의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 여러분들은 뉴스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대통령께서 영국을 국빈 방문하는 멋진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이어나갈 왕세자가 노대통령을 안내하여 숙소인 버킹검궁까지 황금마차를 타고가는 장면은 세계 최고의 뉴스거리가 되기 충분했습니다. 마치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황금마차를 타고 스코틀랜드 근위병 복장의 호위를 받으며 버킹검궁으로 가는 장면은 정말로 볼만했습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당시의 감격을 회상하면서 세계의 모든 대통령들이 임기 중에 영국을 국빈 방문하는 것이 꿈인데 자신에게 이러한 기회가 주어져 감사한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버킹검궁에서 첫날 밤을 묵으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온갖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는 수고가 있었으나 대통령이 되길 잘했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된다는 것도 이 시대에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사무엘상 17장은 이제 막 데뷔하는 다윗을 소개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18장은 다윗이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어떻게 자리를 굳혀가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실패를 사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승리의 삶을 원하고 세상에서도 머리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왕이면 지는 별보다는 뜨는 별이 되기를 사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뜨는 별의 삶이고, 무엇이 지는 별의 인생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왕의 지위에 있는 사울이고, 또 한 사람은 왕을 위해서 때로는 수금으로 왕의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치료해주는 측근으로, 때로는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군사의 장으로 활약하는 다윗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좋은 관계였습니다. 블레셋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던 국가의 운명을 여호와닛시의 깃발을 높이들며 하나님의 영광까지 회복시켰던 다윗과 그를 신뢰하는 사울 왕과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습니다. 사울 왕은 그러한 다윗을 이제는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의 측근으로 남아있도록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왕의 명을 받고 가는 곳마다 다윗은 지혜롭게 행하였고 백성들은 그를 칭송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두 사람의 아름다운 관계는 거기까지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행렬을 기다리며 환호하던 수많은 백성들, 특히 여인들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 외침이 두 사람의 사이를 극과 극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민들의 여론이 두 사람을 완전히 갈라놓은 것입니다.

한 사람은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한 사람은 여론에서 소외되는 상황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내가 왕이요 기득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가가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자시성찰을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서운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괘씸한 감정이 먼저 들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미운 마음이 싹텄고 자신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마음에 아예 없애버리기로 작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주책없는 여인들의 입방아 때문이라고 치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가지고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게 했느냐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자주 평가를 받는 기회를 접하게 됩니다. 임기를 마치면서 받는 평가도 있고, 임기 도중에 받는 중간평가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도 평가를 받지만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 모두가 평가를 받아야만 합니다. 거기서 잘하였다고 칭찬받는 이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평가가 엇갈릴 것입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였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로마서 8: 7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금을 가지고 나온 다윗을 창으로 죽이기로 작정한 것도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기로 한 사울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엇을 것입니다. 왕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수금을 타던 다윗을 향해 사울은 창을 두 번이나 던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에서 다윗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신줄로 믿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떠나기 시작을 했고, 한 사람은 여전히 함께 계셨습니다. 사실 사울 왕도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었던 사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오늘입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가가 우리 인생을 결정짓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과거에 어설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한 채로 교회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나도 옛날에 교사 했었어.’ ‘나도 옛날에는 성가대 했었지.’나도 옛날에 청년회 임원했었어.’ 그런데 지금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사울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사람이지만, 오늘 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오늘 현재에 그의 모습을 떠나있기 때문에, 현재에 다윗에게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저 왕이 하나님만 함께 하신다면 좋았을텐데, 더 안타까운 것은 다윗과 함께 하는 그 모습을 보고, 사울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면 왜 두려워 할 대상이 되겠습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이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다윗을 볼 때마다 부담스러워지고, 두려워지고, 그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에 죽이려고까지 작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들이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 들어가 보면 기독교에 대한 반대그룹들, 그들의 슬로건을 보면 이 땅에서, 대한민국에서 교회를 추방하자! 1천2백만 교인들이 백만이 되게 하고, 십만이 되게하고, 전멸시키자! 그런 구호를 가지고 열심히 반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어요.

아직 대한민국 국민의 3/4은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꿈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편안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존경스럽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부러운 사회, 그런데 지금 사울은 두려웁고, 부담스럽다고 말씀합니다. 정상적인 사울의 모습이 아님을 우리가 짐작하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사람 사이를 잘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12절, 14절, 28절에서 반복해서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5절, 14절, 30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지혜롭게 행동하고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이 떠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혜가 아니라 인간의 간계를 가지고 어떻게 그가 집착하고 나아가는지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 점점 더 함께 하는 사람으로, 또 한 사람은 점점 더 멀어지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뜨는 별과 지는 별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내가 뜰려고 해서 뜨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뜰 줄로 믿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소위 뜨는 연예인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해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되기 일수입니다. 정말 잠깐입니다. 우리는 그런 잠깐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88세를 사시면서 고백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인할 때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을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두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윗이 지혜롭게 행동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서 지혜롭게 행동했다고 하는 히브리 원문의 의미는 전쟁에 나가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의 배경에는 언제나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여러분들에게 영적의미를 정정해 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쟁에 하나님의 도구로, 일꾼으로 쓰임을 받은 것 뿐입니다. 그 자리에 바로 제가, 여러분들이 오늘 21세기 이 시대에 쓰임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지 않습니까? 새해에 어떤 남녀 선교회장을 선택하면서 남선교회, 여선교회를 통틀어서 새해에 3분이 위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장년에서 한 분, 여선교회에서 한 분, 총회장에서 한 분, 그 선교회에서 집사님이, 권사님이 새해 한 번 더 수고 좀 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일 년동안 수고 많이 했고, 그것 때문에 많은 시간을, 많은 나의 스케쥴을 조정해 가면서 많은 열심이 없는 그 회원들을 다독거려 가면서 힘들었던 그 한해, 12월이 다 지나가면서 이제 내 임기가 끝나가나보다 했는데, ‘한 해 좀 더해 주시지요.’ 하는 담임목사의 부탁이 거절하지 않으시고, ‘해야지요. 목사님이 필요하시면 하겠습니다.’ 다른 사족을 달지 않을 때 부탁하는 제 마음이 얼마나 뭉클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한 해를 더 하겠다는 그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눈물을 감수하겠다는 그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뭉클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영광의 자리인데, 어떻게 보면 갈채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수고와 눈물과 기도의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그 자리가 올까봐 어떻게 해서 그 기회를 피해가나 눈이 빛이 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언젠가 한 번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1부예배에 중고등부, 꿈지기들을 위해서 한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느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가셨는데, 심방 위에 그 가정에서 성도님이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십니다. 사진을 보니까 운동선수들 사진입니다. 선수들을 보니까 모두가 다 절을 하고 있어요. 앞에는 돼지머리, 그리고 시루떡이 있고, 돗자리가 깔려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거기에 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편에 한 어린이가 우뚝 서 있는 사진입니다. 성도께서 목사님에게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목사님, 이 녀석이 우리 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학원스포츠는 거의 생명줄을 감독, 코치가 가지고 있습니다.

선수 현장에 투입을 시켜주지 않으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진학을 할 수도 없고, 운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장관이나 대통령보다도 사실은 자기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는 그들입니다.

새해에 우리 팀이 우승 좀 해야지. 잘 부상당하지 않고 잘 풀릴 수 있도록 우리 한 번 절 하고 시작하자. 돼지머리 가져다 놓고, 시루떡 해놓고, 절 하라는 거예요. 그것을 거역할 선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어린이가 서 있습니다. 그 어린이가 서 있는 것은 멍청해서 서 있는게 아니예요. 내가 지금 여기서 절하지 않고, 내가 여기 서 있다고 하면 앞으로 내게 불이익이 다가올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어요. 어쩌면 자기 선수 생명에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어린이는 꿋꿋하게 서 있었어요.

누가 그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그 사진을 본 아버지가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예수를 믿어도 조금 융통성 있게 믿어야지. 그럴 때는 절도 조금 하고, 그럴 때는 잘 좀 보이려고 그러고, 한 번 절 할 거 두 번하고 그래야지.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가지고, 이 험한 사회 생활을 어떻게 할꼬, 그리고 머리를 쥐어박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품에 안고 ‘잘 했다. 아빠가 너를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너는 멋있어. 하나님이 너를 책임질 것이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사진을 보이면서 자랑스러운 아들을 소개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 바로 평안의 아버지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알고보면 멋있는 거예요. 시시하고 유치하고, 사람의 눈치만 보면서 이리 저리 끌려다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알고보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당당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다윗, 하나님의 시각에서 판단하고 생각했던 다윗,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서 움직였던 다윗, 그는 뜨는 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하나님이 동행하셨기에 그는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23편은 다윗의 가장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이 대목을 제일 좋아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들을 선용하며 살게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진정한 복이요 승리임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서 새해를 시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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