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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강해②] 소금으로 빛으로(1)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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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너희는 세상의 소금

지난주부터 산상수훈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은 그 유명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다함께 오늘 본문 13萱?읽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처음에 예수님께서 누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입니다. ‘너희’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요, 군중들이며, 오늘날에는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너희’라는 말 속에 이 말씀의 당사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이 점은 14절에 나오는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들 자신이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십니다. 또한 14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녹아지고 우리가 타져서 지켜야 할 곳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간혹 신앙인들 가운데 세상이 싫다고, 세상은 너무 타락하고 죄가 많다고 세상을 피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절은 산에 있고 교회는 동네에 있습니까? 불교는 ‘피안(저 세상)의 종교’입니다. 또한 ‘도피의 종교’입니다. 어떻게든 사람들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수도하고 도를 터득하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피안의 종교,’ ‘저 세상의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종교’입니다. ‘도피의 종교’가 아니라 ‘침노하는 종교’입니다. 마 11:12에서 주님은 천국이 침노하는 자, 쳐들어가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천국은 저 피안의 세계, 이 세상을 떠난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쳐들어가서 정복하고 침노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즉 죄악에 지배당한 세상을 쳐들어가서 빼앗으면 그곳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 천국이 되는 것이요, 마귀 사단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들을 쳐서 정복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철저하게 세상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적극적으로 녹고 비추어 그곳을 하나님의 땅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으로 만들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침노하고 정복할 세상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과 주변 사람들입니다. 고기에 양념을 하려고 소금을 치는데 소금이 고기 속에 스며들지 않고 겉돌면 맛이 안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금의 맛을 내려면 우리 자신이 세상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세상 속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교회 안에만 머물고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소금 통 속의 소금과 같습니다. 밖으로 안 나오고 그 소금 통 속에만 머무는 소금은 절대 맛을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소금 통을 흔들 듯 고난도 주고 우리를 흔들어 세상으로 내보내십니다. 여기만 있지 말고 가서 일하라고요. 가서 변화시키라고요. 우리가 땀을 흘리면 땀과 함께 소금도 나옵니다. 그래서 군에 있을 때 고된 훈련을 마치고 나면 군복 등 부분에 하얀 가루가 보입니다. 땀입니다. 소금이 없으면 우리 인체는 큰일 납니다. 염분이 있어야 우리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 염분이 지나치게 많으면 고혈압이 걸려 큰 문제가 생깁니다. 적당히 땀을 흘리고 그 땀으로 소금을 배출해야만 우리 몸은 건강하고 원활합니다. 교회가 이와 같습니다. 세상으로 나가고 흩어져 자기 사명을 다할 때 교회도 건강하고 원활합니다. 안 나가고 일 안 하고 모여만 있으면 말만 많아지고 다툼만 생기는 등 매우 건강하지 않은 교회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소금의 원리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가 적극적으로 소금과 빛이 되면 사명을 다하는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맛’이란 소금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짠맛을 뜻합니다. 이 짠맛이 없으면 겉모습은 소금이로되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맛’은 소금의 존재 이유요 존재 가치입니다. 소금의 존재 가치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무엇보다 소금은 양념으로서 그 짠맛으로 싱거운 음식에 먹을 맛을 더해줍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서 정성스럽게 요리를 했다 하더라도 소금이 없어 싱거우면 맛이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 6:6에도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소금은 싱거운 음식에 짠맛을 줍니다. 즉 맛없는 것을 맛있게 하고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이 짠맛을 지닌 것처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싱거운 세상, 맹맹하고 맛이 없는 세상에 살맛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혼란스럽다보니 너도 나도 “정말 살맛 안 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살 맛 안 나는 세상, 맛없고 무미건조한 세상에 살맛을 나게 하고 맛깔 나게 만들어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소금은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지금이야 냉장기술도 발달하고 또 방부제도 많지만 옛날에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을 때 생선에 소금을 치면 잘 썩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양념과 방부제의 역할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하지만 소금은 이 두 가지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레위기에 보면 모든 소제물, 즉 곡식제사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2:13). 그것은 소금의 썩지 않는 성격, 변하지 않는 성격처럼 하나님에 대한 내 헌신과 언약이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소금언약’이라는 용어도 나옵니다(민 18:19, 대하 13:5). 실제로 아랍 사람들은 중요한 계약이나 언약을 맺을 때 두 사람이 함께 소금을 먹습니다. 그것은 이 소금처럼 서로 변하지 않는 계약을 맺자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금은 정화하는 기능도 있어서 더러운 것을 정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도 부정 탔다고 소금을 뿌립니다. 정화의 상징인 소금을 제물에 섞음으로서 내 더러운 죄가 깨끗해지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중요합니다. 소금은 경작할 땅을 기름지게 하는 비료(거름)로서의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비료가 그리 발달되지 않았을 때 땅에 이 소금을 치면 소금 성분 중 나트륨이 땅에 스며들어 땅을 기름지게 하는 역할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썩지 않게 지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나아가 적극적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요 3:17) 생명을 풍성하게 제공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소금이 짠맛을 잃을 수 있을까요? 과학시간에 배웠지만 소금은 염화나트륨(NaCl)이라는 화학 합성물인데 이 염화나트륨은 거의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안정된 화합물입니다. 그러니 소금이 변하지 않는 것의 상징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변하지 않는 소금이라고 해도 어떤 특별한 이유로 이 화합물이 특유의 짠맛을 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소금은 오늘날 우리가 먹는 소금과 다릅니다. 우리가 먹는 소금은 보통 ‘천일염’이라고 불리는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소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암염’(巖鹽)이라고 불리는 소금덩어리가 많았습니다. 오랜 세월 소금이 퇴적되어 마치 바위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 땅에 묻혀 있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사해에서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는데 사해에 가면 이런 소금기둥이 많고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소금을 불도저로 땅에서 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나온 암염은 바닷물을 증발시켜 나온 천일염과 달리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잘 정제를 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정제 기술이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아 그 당시 ‘소금’ 하면 요즈음처럼 순수하고 질이 높은 소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불순물이 많이 섞인 하얀 가루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얀 가루에 열이 가해지거나 바람에 날려 온 석고가루와 섞이게 되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제일 녹기 쉬운 염화나트륨 성분은 가장 먼저 녹아 빠져나오고 남은 하얀 가루는 생기기는 소금처럼 생겼어도 실제로 염분은 다 빠져나간 쓸데없는 하얀 가루인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금이 그 짠맛을 잃으면 어떻데 됩니까?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을 집 지붕을 덮고 있는 흙 위에 뿌리는데 소금을 흙에 뿌리면 흙이 딱딱해져서 새는 곳을 방지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붕은 평평하게 생겨서 어른들에게는 만남의 장소나 기도 장소로 사용되고, 어린이들에게는 놀이터로 사용됩니다. 그러니 이 소금은 계속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존재가치를 잃으면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그것은 소금의 존재가치를 잃는 것입니다. 존재가치를 잃은 소금은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 발에 밟히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름대로의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마이크는 사람의 소리를 크게 내주는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만일 그 기능을 잃으면 이것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이것으로 밀가루 반죽을 밀겠습니까? 아니면 줄넘기를 하겠습니까?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밖에 쓰레기통에다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 꽃도 아름답게 피어 향기를 내야 가치가 있지 시들어 향을 잃으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이 그 고유의 가치를 잃으면 버려질 수밖에 없듯 우리 성도들은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고 썩지 않게 만들고 기름지게 생명력 있게 만드는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소금은 소금이로되, 겉모양은 소금이로되 그 존재가치를 잃으면, 즉 세상에 살맛을 못 주고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드는 일을 못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밖에 버려집니다. 여기서 밖은 심판의 자리를 뜻합니다. 심판의 자리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도 다섯 달란트로 열 달란트 만든 종과, 두 달란트로 네 달란트 만든 종은 큰 칭찬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상을 받지만 한 달란트 받아 땅에 묻었던 종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벌을 받습니다(마 25:30). 여기 나오는 종들의 존재가치는 무엇입니까?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해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일에 실패했으니 존재가치를 잃은 것이고 그래서 바깥 어두운 데 버려지고, 심판의 자리에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우게 된다고 했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요? 다같이 마가복음 9:48~50을 봅시다. 이 말씀은 지옥에 관한 묘사로 지옥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옥에 가면 구더기가 우리 몸을 파먹을 것인데 우리를 아무리 불로 태워도 우리 몸만 타지 구더기는 죽지 않는다는 끔찍한 말씀입니다. 게다가 49절에는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소금이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지요? 지옥에서는 불로 소금 치듯 태워서 우리를 정화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지 못하면, 또 소금이 되더라도 그 맛을 잃으면,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게 되면 우리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기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네가 소금 노릇을 못했으니 내가 대신 불로 소금처럼 너를 정화하리라.” 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소금은 다양하게 생겼습니다. 천일염도 있고 화학염도 있고 암염도 있습니다. 굵은 소금도 있고 가는 소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어떻게 생기고 어디서 나왔느냐에 관계없이 모든 소금의 공통점은 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어디 갖다 놔도 짠맛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형편 따라, 상황 따라 맛이 달라지거나 잃으면 그건 갖다 버려야 합니다. 아니, 우리 주님이 친히 내쫓아버리실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피곤하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핑계로, 사는 게 힘들다는 핑계로 소금의 짠맛을 변질시키거나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성도이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성도가 아니요 세상의 소금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내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이 세상이 얼마나 부패해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죄 때문에 부패랄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모든 것을 썩게 만드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와 타락으로 썩어가지만 마치 회칠한 무덤처럼 그 속에는 썩어가는 시체가 들어있는데 겉만 화려하고 깨끗하게 치장하면 괜찮은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옷과 주렁주렁 단 장신구로 치장하면 괜찮은 줄 알고, 명예와 지위와 쾌락으로 칠해 놓으면 괜찮은 줄 알고 사는 사람들, 그러나 실상은 그 속에서 이미 부패는 시작되었고 내 영혼과 몸이 이미 썩어 가는데, 썩는 냄새가 나는데 그것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비싼 것 화려한 것으로 겉모습을 치장한들 살맛이 나겠습니까? 그러니 맨날 살맛 안 난다, 죽겠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살맛 안 나는 세상, 이 썩어가는 세상을 향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소금으로 임명해 보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은 부패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은 짠맛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과 영향력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안에 참 생명이 없고,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고, 사명감도 없고, 짠맛도 다 잃은 이름만 소금이라고 남은 하얀 가루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더 부패해서 각종 다툼과 인간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복마전 같은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남들 다 하는데 뭐... 나라고 하지 말라는 법 있나?”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은 다 해도 나는 하면 안 됩니다. 남들은 다 변하고 썩어도 소금인 우리들만은 변하지 말고 썩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소금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소금의 역할은 못 할지언정 큰 죄는 안 짓고 살지.” 하고 안심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바깥 어두운 데 버려지는 수치스러운 일들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부흥은 안 하고 크게 변화는 안 되지만 그럭저럭 유지는 되지.”하고 스스로 위로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치욕스러운 순간이 닥쳐올지도 모릅니다.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의 모습을 이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도 자신을 돌아보고 내 존재가치는 무엇인지 되새기며, 내 안에 생명력과 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기도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나는 목사로서의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성도로서, 믿음의 가장으로서, 믿음의 어머니로서, 크리스천 직장인 혹은 사업가로서 이름만 남고 허울만 남아 그 존재가치를 잃어버린 하얀 가루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 주님은 “네가 목사냐? 네가 장로, 권사, 집사냐? 어찌 이름만 남고 가치는 다 없어졌느냐?”며 우리를 책망하게 되실 것입니다.

혹시 이런 분 계십니까? “저는 그런 사명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는데요. 너무 부족한데요.”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보고 “너희는 세상의 황금, 세상의 다이아몬드다.”라고 하셨습니까? 기왕 귀한 사명 감당하라 하실 것이면 황금이나 다이아몬드처럼 귀한 물질을 말씀하시지 왜 흔하디흔한 소금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소금은 참 흔합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어느 집에나 다 있고 값도 쌉니다. 그래서 오히려 소금이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흔한 존재요 능력도 없지만 우리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 약한 것, 어리석은 것을 들어 귀하게 쓰시는 분입니다. 그 소금이 바로 우리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고 연약한 우리, 보잘것없는 우리를 들어 귀히 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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