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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그리스도인 (롬 2: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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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하나님은 과거 유대인들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통해 그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유대인들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여 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24절에서 보여 집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동물과 달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다 땅에서 끝나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축복입니다. 그러면 동물과 다른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웃으면서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웃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사람 외에 다른 동물은 웃지 않습니다. 개는 꼬리만 잘 흔들면 되는 것입니다. 소는 잘 커주고 일만 잘하면 됩니다. 만약 개가 웃는다면 퇴근할 때 “주인님 오셨어요.” 하며 웃는다면 이처럼 징그러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돼지가 먹이를 줄 때 웃는 다면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사람만 웃습니다.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저는 웃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어느 성도가 저에게 웃자라는 글을 써서 액자를 선물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 가훈이 웃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집의 가훈을 적어내라.”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웃자라고 써서 냈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한참을 이해를 못하더랍니다. 웃는 것이 너무 좋아 예수님의 박장대소하듯 웃는 모습을 교회에 걸어 놓은 것도 그 이유입니다. 웃음은 돈 안 드는 헌금입니다. 돈 안 드는 사랑입니다. 교회에 새 가족이 오면 웃어주는 것만큼 최고의 반김은 없습니다. 어느 날 한 새 가족이 와서 예배를 드리는 데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너무 심각하게 인상을 쓰며 앉아 있어 부담스러웠답니다. 결국 알게 된 것은 그 사람도 새 가족이었답니다. 한 회사가 전국의 매장에 주일은 분명히 쉬도록 하면서도 매출의 1위가 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웃음이라 합니다.

신입사원들에게나 점주들에게 교육 할 때 반드시 훈련을 시키는 것이 있는 데 바로 웃음훈련입니다. 스마일 하면서 말입니다. 인내력 웃음은 30분에서 1시간동안 웃을 수 있습니다. 순발력 웃음은 언제든지 웃을 수 있는 웃음을 말합니다. 점포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손님 만 보면 웃게 합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웃으면서 하십시오.
예배드릴 때나 회의 할 때 인상 쓰고 달려드는 인간은 하나님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신을 가꾸어 꾸미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동물은 자신을 가꾸지 않습니다. 세수하거나 화장을 한다거나 양치질을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가꾸어야 합니다. 사람이 만약 세수, 양치나 머리를 안 갚는 다면 어찌 될까요? 사람은 화장을 하고 옷을 예쁘게 입고하는데 잘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래의 모습을 알기가 쉽지 않은 것도 문제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 중 하나는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예쁘지만 목욕탕에 나올 때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예쁩니다. 워낙 자신들을 잘 가꾸다 보니 요즘에는 미운 사람들이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도 보면 뱃속에서부터 예쁘게 만들어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늘 이렇게 자신을 가꾸고 꾸미다 보니 본래 자신의 모습을 잊는 경우가 있곤 합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저들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동물 자신의 모습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의지적으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노력하고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절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꾸미고 가꾸어야만 합니다. 환경 앞에서 절대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 속에서나 경건의 모습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회도 나와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 안에서도 나를 가꾸다 보면 바리새인화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꾸미고 가꾸어야만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남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가정에서의 내 모습이 진정한 나입니다.

밖에서는 얼마든지 꾸밀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행동과 집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면 문제 아니겠습니까? 언제인가 우리 딸이 엄마에게 요구를 한 게 있습니다. “ 엄마, 교회에서 처럼 우리에게도 해 주세요 교회에서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라고 만나는 성도에게 예쁘게 말을 하면서 왜 집에서는 혼을 내며 밥 먹어! 안 씻어? 숙제 안 해!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성도에게 잘 참아주고 사랑해 주는 데 집에 가서 아내에게 화내고 함부로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한결 같아야 합니다. 또 하나 화났을 때 감정이 상했을 때는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화가 안 나면 꾸밀 수 있습니다. 또 화를 내긴 하지만 뒤 끝이 없다 합니다. 여러분! 도둑놈이 매일 도둑질 합니까? 가끔 해도 도둑은 도둑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이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인상을 쓰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줍니다.
지금 여러분이 웃음을 잃었다면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면 역할을 바꾸어서 해보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하고 저는 청중석에 앉아 있고 말입니다. 인상 쓰고 앉아 있는 여러분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들이 듭니다. 목사가 올라올 때나 예배를 집례 할 때 웃으면서 맞이해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또 한 번 어리석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줍니다. 사도바울은,

첫째: 과거에 매이는 것은 참된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지혜로운 신앙인은 과거로부터 자유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과거의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니라 오늘의 내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과거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옛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아름답게 이야기 하는 것으로 오늘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늘이 좋으면 오늘이 행복하면 과거는 말 할 것이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자꾸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옛날에 기도 많이 했고 수고나 헌신 그리고 은혜를 많이 받았단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문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너의 모습은? 오늘 너의 모습은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과거를 이야기 하며 나의 오늘에 옷을 입혀 보지만 과거의 모습은 내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기도를 많이 했지요 하면 성경은 질문 합니다.지금은? 옛날 봉사 많이 했어 하면 지금은? 성경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유대인들의 최고의 자부심음 무엇입니까? 우리는 구별 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례 받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난지 8일만에 유대인들에게만 행해지는 구별 예식입니다. 삼상17:36절에 보니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달려가면서 외쳤던 외침이 있으니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을 짐승의 하나와 같이 쓰러뜨려버리겠다.” 합니다.

우리도 할례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은 화려한 조상들의 신앙을 자랑합니다. 저들은 조상들에게 끊임없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합니다. 우리는 그런 후손이기에 할례 받은 민족이기에 어찌하는 우리도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유대인들의 자부심은 껍데기만 남은 자부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을 향하여 성경은 공격합니다. 25절에 “네가 율법을 행한 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 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네가 지금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면 지금 말씀 안에 있다면 과거의 할례가 가치가 있고 아브라함의 후손됨의 가치가 있지만 네가 지금 율법을 어기고 있다면 네가 지금 말씀에서 떠나 있다면 네가 받은 할례는 너의 아브라함의 후손되었음이 무너져 있는 너를 지켜 주리라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구별 된 사람이야 나는 이미 구원 받은 백성이야 하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성도에게 “오늘 너의 모습은 어떠한 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헛된 자부심이 아니라 오늘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도 소용이 없는 것인가? 과거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면 여러분의 과거의 신앙이 화려했습니까? 과거의 은혜가 대단했습니까?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여전히 하나님 안에 아름다울 때 과거의 아름다움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여전히 헌신된 모습일 때 과거의 헌신되었음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무너져 있다면 과거의 아름다움이 아무역할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좋으면 오늘 은혜 안에 있으면 과거 힘들었던 것은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27절에 “ 네가 그렇게 우습게 알았던 할례 받지 않는 사람이 말씀 안에 서서 말씀을 떠나 있는 너를 판단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수고했던 사람들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오늘이 무너져 있기 때문입니다. 연애를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과거의 추억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불타는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가슴이 뛸 정도로 심장이 멎을 정도로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가슴이 뜁니까? 옛날 진짜 불꽃이 튈 정도로 사랑한 사람은 지금도 가슴이 뜁니다. 매일 뛰는 것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과거의 연애의 추억이 추억된 사람은 지금의 좋은 사람이자 지금 잘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무너져 있으면 과거의 사랑을 원수처럼 “내가 미쳤지”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과거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과거보다 오늘, 오늘보다 미래가 더 헌신되고 더 아름다워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답답한 경우입니다. 오늘은 손도 까닥 안하면서 과거의 공로를 들추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성경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다” 합니다. 27절에서는 과거가 아무리 화려했어도 주님은 “오늘의 너는?” 주님은 “ 오늘의 나”를 원하십니다.

둘째: 외식에 매이는 것은 또한 참된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8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이말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해서 참 유대인이 아니며 육체의 할례를 받았다 해서 참 할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해도 할례를 받았다 해도 착각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12:47절에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이때 주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종교성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교리나 위로들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마십시오. 제일 속기 쉬운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논리가 맞다고 해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남의 잘 못을 지적하고 있다 해서 여러분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잘 한다고 해서 의로운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교회를 섬긴다고 해서 하나님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꾸미는 것 가꾸는 것을 좋아합니다. 계속해서 꾸미다 보면 그 모습이 나 인 줄 압니다. 목사가 계속해서 사역을 하다보면 그냥 하나님의 종이 되는 줄 압니다. 그냥 목사직만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증인인줄 압니다. 자기 울타리에 갇혀서 삯군 목사가 되어 있으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일군으로 압니다. 성도가 직분에 매여 있습니다. 직분에 걸맞게 영성은 있으십니까? 자신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머리에서 다른 소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머리에서 교리에서 오는 자부심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는 자부심이 진정한 자부심입니다.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가슴이 텅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보이는 신앙은 최고의 신앙으로 보입니다.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입니다. 여러분 종교적인 사람에게 속지 마십시오. 굉장히 그럴듯한 사람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무척이나 성경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 합니다. 마음에 변화를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오직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참 그리스도인이요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있어야 합니다. 가슴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은 위기입니다. 가슴이 비어 있다면 여러분이 겉모습을 직분으로 신앙연수로 잘 자라 주는 자녀로 꾸며보아도 영적 위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유대인이 처음부터 어리석은 유대인은 아니었습니다. 어리석은 바리새인이 처음부터 어리석은 바리새인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중심을 가슴에서 머리로 외식으로 꾸미기 시작하면서입니다. 하루하루 무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속아주면 다행입니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에게 까지 속는 것입니다. 이는 천천히 데워지는 주전자 속의 개구리처럼 죽는 줄 모르고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셋째: 참된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영적이어야 합니다.
29절에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 같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에 할례가 진정한 할례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문자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령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성령에 뜻에 복종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신령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거룩을 욕심내며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인간입니다. 영성을 상실한 그리스도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나에게서 가슴으로 오는 것은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해야만 합니다. 사도바울은 행19:2절에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질문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는 지금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이냐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의 제자들의 신앙의 중심은 온통 머릿속에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도 사도행전 속에서는 가슴에서 영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이 행복하지 않다면 가난해서도 병들어서도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영으로 충만 해야 할 성도들이 성령으로 배고픈 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은혜로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채워지지 않고는 행복이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차고 넘치는 것을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적 그릇이 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 할 때에는 그릇이 작습니다. 오래 하다보면 그릇이 커져 있습니다. 그릇이 크다고 해서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잘 믿는 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똑같이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아도 받기는 받은 것 같은데 별 느낌이 없는 것은 그릇이 워낙 커서 밑바닥밖에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신자들은 금방 은혜를 받습니다. 감격해 합니다.

율법을 가지고 교회를 유지해 가거나 이쪽으로 끌고 가면 함께 죽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한 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교회나 성도여야 합니다. 성령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마음으로 사모하는 차원이 아니라 온 몸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찬송을 해도 기도를 해도 예배는 온몸으로 드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만히 앉아 예배하며 우리는 보수적이랍니다. 이는 잘못 안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의 보수공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율법적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첫째 얼굴에 기쁨이 없습니다. 규칙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고 이런 분들하고 회의하면 가슴이 터집니다. 회의는 완벽하게 할려하고 기도는 짧게 해야 한다 합니다. 회의는 바리새인처럼 잘하지만 영성은 바닥입니다.

넷째: 참된 그리스도의 표준은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하나님에게서입니다.
29절에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서는 아니 됩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람에게 얼마나 잘 보였을까요? 거룩한 옷을 입고 엄숙하게 걸음을 걸었습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길게 기도했습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칭찬 듣는 성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에게 칭찬 듣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아! 그 교회, 대단하지! 사회가 떠들썩하게 그 교회를 인정한다 해서 진정한 교회요 성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교회는 교회 수가 적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문제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차피 추수 때까지는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 마음에 합한 사람들, 주님 손에 잡힌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엽전 두 닢을 내고 부끄러워하는 성도나 두렵고 떨림으로 성전 문 밑에서 절하는 세리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혹시 과거만 자랑하며 오늘은 무너져 있는 성도는 없으십니까? 혹시 오늘 무너져 있어 과거 그 아름다웠던 은혜나 충성은 쓰레기통에 넣어버리신 분은 없으십니까? 오늘 무너져 과거의 헌신을 쓰레기통에 넣어버리신 분은 없습니까? 우리모두 주님의 인정을 받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마지막 때에 우리교회만이라도 여기 앉아 예배하는 성도들만이라도 주님에게 인정받는 참 교회나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오늘도 내일이면 과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 과거의 모든 부족은 십자가 밑에 묻어 버리시고 주님 주신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주님과 더불어 성령으로 교제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영광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칭찬 들으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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