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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삼상 26: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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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 목사 

명절을 잘 보내고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얼굴들이 훨씬 더 기름기 있어 보이고, 가족들 만나고 오셔서 얼굴들에 평안이 가득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여성들에게는 무척 힘든 시기였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음식을 장만하는 일부터, 무엇을 장만해야 할까 계획하는 일부터 돈은 또 얼마나 써야하고, 없는 돈은 또 어떻게 마련을 해야하나 이런 모든 것들이 고민이고,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절을 맡기 전부터 부탁드렸던 것처럼 이제는 명절을 맞으면 어떻게 하면 시험에 들지 않을까? 염려하고 기도했던 소극적인 신앙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이제는 명절을 하나님 영광 돌려드리는 승리의 기회로 삼자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승리하고 돌아오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그런 주제와도 같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다윗은 아주 선언적인 고백을 자주 했습니다. 엘라골짜기에서 블레셋 골리앗과 대결했을 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아주 놀라운 선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해서 모든 군사들이 깜짝 놀랐던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늘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그러한 내용들을 들었습니다.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해서 그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신앙고백적 신앙이 삶의 현장에서는 사장되어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장수들과 군인들도 엘라골짜기에서는 전혀 그런 고백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있는 것조차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군대 나올 나이가 되지 않았던 다윗은 형들과 그리고 모든 군사들의 안부를 물어보라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전쟁터에 갔다가 본의 아니게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뛰어들게 된 것은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된 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적인 욱하는 심정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 그를 전쟁터로 몰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례받은 백성들이,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처참하게 땅바닥에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견딜 수 없었던 의로운 열정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짓밟혀도 되느냐 그런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사울왕에게 전쟁에 나가겠다고 이야기 했고, 그 요구가 결국은 형들에 의해서 거부가 되었지만, 다윗의 확신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왕의 갑옷도 맞지 않을 만큼 그의 체구는 왜소했지만, 그는 자신의 물레와 막대기만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그런 평범하면서도 오히려 확신에 찬 신념의 젊은이였습니다.

골리앗과 마주쳤을 때, 그는 아주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전쟁은 창과 칼의 수요에 있지 않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사울과 모든 군대가 과거의 성전에서, 과거의 주의 종들을 향해서 들었던 그 말씀이 속에서 불현듯 기억이 났을 것입니다. ‘맞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저 다윗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왜 우리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어느 집사님이 큰 일을 당하면서 너무나 황당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며칠 지난 다음에야 생각이 났답니다. ‘아휴, 기도해야지. 기도해야 하는 건데...’ 그제야 며칠만에 생각이 나서 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먼저 기도해야 하는데요.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이제야 제 정신이 나서 기도해야 하는건데, 그런 생각에 먼저 목사님께 기도부탁드립니다.

며칠 만에 생각이 났으니 다행이예요. 평소에 우리의 믿음과 신앙고백적인 모든 삶이 정작 믿음을 써야 할 때는 생각도 나지 않는 거예요. 평소에는 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써야할 장소에서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다윗은 조금 달랐어요. 골리앗 앞에서 모두가 기 죽어 있을 때 그는 골리앗을 바라보지 않고, 골리앗까지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볼 줄 믿습니다. 마치 후에 다윗을 염려했을 때, 나단 선지자, 할아버지 선지자, 힘 없는 선지자가 그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그를 하나 처치해 버리고, 입 다물게 해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했어요. 눈물로 베개가 젖도록 기도했다는 거예요.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틔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모든 주관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다윗은 엔게디에서 사울을 살려준 이후에 다시는 너를 죽이려 군대를 동원하지 않겠노라고 눈물로 다짐하고 돌아갔던 사울의 말을 믿고서 십 황무지에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에서 사는 한 사람이 다윗과 그의 공동체가 십 황무지에 숨어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사울왕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알리지 아니하면 온 가족이, 온 동네가 몰살한다는 그 경험을 듣고 왔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도 다윗을 미워해서라기 보다는 우선 살기 위해서 다윗의 거처를 알려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안 좋은 것은 그렇게 눈물로 다윗과 모든 병사들 앞에서 이러한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은 행하지 아니하리라고, 너는 나를 선으로 대했는데, 너는 나를 악으로 대했노라고 회개하고 또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너는 왕이 될 것이고, 너의 나라는 견고히 설 것이라는 그러한 예언 같은 말씀까지도 그의 입을 통해서 선포하였는데, 사울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지난번처럼 또 3000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십황무지로 군대를 몰고 왔습니다. 저녁이 되어서 모든 군사들과 잠을 청하게 되었는데, 다윗의 염탐꾼이 가서 본 내용을 그대로 우리가 그림을 그려보면 제일 가운데 사울왕이 누웠고, 그리고 그 머리맡에 창과 물통이 있고, 그 바로 옆에 군대장관이 옆에서 지키는 듯 같이 누워있고, 그리고 둘로 묶어서 원을 그리면서 사울 왕을 에워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잠을 자더라도 수많은 방위벽같은 그런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 않고서는 사울에게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과 군사들이 잠을 청하고 있는 사이에 다윗이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누가 저 사울의 진영에 나와 함께 갈 사람이 없는가?’

아히멜렉과 아비새에게 이 말을 했더니, 그 중에 아비새가 자신이 다윗을 모시고 동행하겠노라고 자원을 했습니다. 우리는 후에 수로의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다윗의 공동체에서 가장 충성스럽게 헌신했던 그러한 용맹스러운 부하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적진에 겹겹이 둘러쌓여 있는 적진에 다윗과 두 사람만이 간다는 사실은 목숨을 내 놓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새는 기꺼히 자청을 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죽는 자리도 좋습니다.

여러분, 군대에서 이런 부하를 두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이런 부하를 두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죽는 자리라도 당신과 함께라면 괜찮습니다. 아비새는 그런 심정으로 다윗과 단 둘이서 적진을 향해 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군사들을 통하고 통해서 들어가지만 본문에 보면 아무도 눈치를 채거나 깨거나 알아보는 군사들이 없었다고 그랬습니다. 이제 사울왕의 머리맡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사울왕이 곤히 잠들어 있을 때, 지금 위에서 사울왕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함께 했던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명령만 내린다면 내가 참으로 두 번 실수 하지 않고, 한번에 땅에 박아버리겠습니다.

그렇지요? 잠자는 사람을 참으로 창으로 찔러 죽인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24장에서 엔게디 굴에 등을 돌리고 있던 왕을 등복장을 찔러 죽이는 것도 식은 죽 먹기와 같은 것이지만, 왕의 옷자락을 조금 베는 것으로 경고에 그쳤던 다윗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오늘 이 사울을 당신의 손에 붙치셨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금 아비새도 다윗에게 마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은 분위기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지난 번 엔게디 굴에서도, 지금 십 황무지에서도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지만 내심은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담아서 다윗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죽이랍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기회를 줬답니다. 끊임없이 다윗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주변의 사람들도 이제는 피난 다니는 것이 지겨울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먹고 마시는 것 구하는 것도 정말 지겨울 것입니다. 이제 이 사울 하나만 해결하면 모든 고생이 끝나는데, 왜 이렇게 다윗은 결단을 못 내리고 있을까? 아마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사울을 내려다 보면서 두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비새가 속삭이는 이 말에 그러나 이 다윗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나는 분명히 확신하는데,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쟁에 들어가서 망할 것이라.

어떤 일이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준이 분명하면 거기에 유사한 여러 가지 계시와 같은 예언과 같은 메시지와 같은 것들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고 우리는 흔들림이 없을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준입니다. 기준이 흔들리면 다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운동장에 줄을 설 때 맨 앞사람을 손을 들게 하고 기준하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수백, 수십명이 줄을 서게 되는데, 그 처음사람이 조금만 삐딱하면 모두가 잘못된 줄을 서게 되는 거예요.

지금 다윗에게 놀라운 점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아주 분명한 기준이 그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에게 어떤 유익과 도움이 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행할 수 없다라고 하는 기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아비새에게 사울의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들고 나오자고 했습니다. 아비새가 생명을 걸고 동행했는데, 기껏 여기까지 와서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간다면 이게 또 무엇인가 불평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지도자의 가장 어려운 일은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리더해 가느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보면 성공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을 구별해 보면, 자신의 아이디어가 부족하거나 자신의 학력이나 선견지명이 뛰어나지 못해서 실패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주변 사람들 관리를 못해서 생긴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며칠 전에 TV에서 역사에 대한 장면들을 보여주는데, 이승만 대통령 모습을 보여주면서 해방 전후에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이렇게 끌어가는데, 우리 딸과 보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 저 분은 아쉬운 분이다. 우리 딸은 저 이승만 대통령을 보자마자 ‘저, 독재자’ 사실 저는 아쉬움이 있어요. 저 분이 독립 되기 전에 목숨을 걸고 생명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사실 김구와 비교가 안 되는 인물이죠.

지금은 우리가 김구를 이야기 하지만, 그 당시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두 번 하고, 세 번 하면서 그 앞에 좋았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어요. 그 두 번 하고, 세 번 하는 것이 누구를 위해서 한 것입니까? 국민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간신배들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그 분이 대통령으로 있어야 자기들의 배를 채울수 있으니까요.

그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국민이 당신을 원한다고 그렇게 해서 그는 결국에 주변의 판단에 자기 인생을 완전히 놓쳐버린 거예요. 지금은 아무리 사실은 내가 그 주변 사람들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정치를 망치고, 역사를 망쳤다고 변명해도 사람들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 책임입니다

지도자는 결국 지도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약자에게 점수를 더 많이 주기 마련입니다. 그 다음의 사람들을 이제 더 높이, 더 귀하고, 더 위대한 인물로 떠받들지만 변명할 기회가 없어요. 항변할 방법이 없어요. 왜? 당신은 독재자니까... 과거에는 훨씬 더 위대했는데, 결과가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아요.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결국 주변의 사람들로 인해서 함께 멸망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다윗을 보면서 다윗이 다른 지도자와 다른 점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아무리 측근들이 권면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자기에게 협박하듯이 권고합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게 불리해지면 내게 불편해짐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 이것은 정말 큰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손해보면서 정직하게 살 수 있습니까? 내게 불리하게 모든 것이 작용해도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계속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심지어는 교회도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와야만 좋아하는 사람들, 우리 사업하는 분들은 교회를 이용하려고 들지 마세요. 어떤 분들은 전도하려고 우리교회에 나오면 우리 교회는 천명이나 넘는데 우리 교인들이 당신네 집을 이용하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그런 식으로 전도하는 분이 혹 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은 와서 한 달도 못 되어서 시험들어서 돌아갑니다.

순수하게 예수를 소개하고, 예수를 만나게 해 주어야지. 교회에 나와서 어떤 육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도움을 주기 위해서 어떤 도구가 되었다면 절대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교인들이 우리 집을 이용을 안 하는지, 왜 교인들이 자주 우리집에 안 오는지, 가끔 교인들이 많이 가면 얼굴색이 환해져요. 저도 사실은 보기 좋아요. 보기가 좋으니까..

어떨 때 가면 아주 얼굴이 우거지상이예요. 목사님, 자주 안 왔다는 거지요. 교인들 자주 안 온다는 거지요. 마음이 불편합니다. 어느 때까지 이 집을 그렇게 해 가지고, 저 분의 신앙을 끌고 갈 것인가.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예요.

정말 우리는 믿음을 그야말로 순수하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의 공동체에 일원이 되는 그래서 그 하나님의 부르심이 응답하는 순결한 신앙으로 출발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다윗이 강했던 것은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순수하면 강합니다. 순결하면 용기가 생깁니
다.

다윗이 지금 아비새에게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 원하지 않는 것은 네가 아무리 하나님께서 내게 저 사람이 붙였다고 비슷하게 유혹을 해도 나는 넘어가지 않는다. 왜?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성도님이 어느 성도가 가서 목사님이 보냈는데, 10만원만 꿔주라고 해서 왔다고 해서 목사님이 꿔 주라고 해서 꿔 줬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돈을 꿔주고 나서는 생각해 보니까 목사님이 그럴 것 까지 시킬 분이 아닐 것 같은데, 이상하다. 시간이 지나고 돈은 돌려오지 않고 고민하다가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혹시 언제 아무개를 보내서 10만원 꿔주라고 그랬습니까?’ ‘아니요, 전 그런 적이 없는데요.’ ‘제가 속았군요.’

목사를 빙자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황목사를 잘 아신다면, 아무리 그럴 듯한 이야기로 속이려고 해도 우리 목사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분명한 믿음만 있으면 세상 누가 와서 비슷한 이야기를 해도 단호하게 거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투명한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는 어떤 경우에도 죽이지 마라. 해치치 마라.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니까...그 원칙은 다윗에게는 살아 있은 줄 믿습니다.

아비새는 아쉬웠지만, 다윗의 권면을 따랐습니다. 물통과 창을 들고 나왔습니다. 12절에 보면 물통과 칼을 들고 나오는데, 놀라운 표현이 거기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우연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엔게디에서 다윗의 공동체에 등을 돌리고 앉았던 그 사울왕을 그 자리에 오게 한 것이 정말 우연이었을까? 그 수 많은 동굴 가운데,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을 여행하다 보면 계곡의 수없이 많은 석회동굴 가운데 하필이면 그 다윗이 숨어있는 동굴로 들어왔을까?

지금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의 공동체 지금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에 그들이 들어가는데, 삼천명의 군사들이 하나도 깨지 않고, 다윗과 아비새가 물병과 칼을 들고 가는데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는 이 사실이 과연 우연일까? 그래서 사무엘상 기자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12절에 토를 달아놓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이 위대해서도 아닙니다. 아비새가 작전에 능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이 삼천명이 겹겹이 쌓인 곳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건너간다고 한들 삼천명이 누워있는 곳에 어찌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윗의 공도 아니고, 아비새의 공도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창세기에 보면 아담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행위를 하실 때 깊이 잠들게 하시고, 창조의 행위를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이 이해해 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하셨어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다윗의 일련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도, 다윗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다른 일에, 말에 그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행동과 태도를 어떤 경우에 결단합니까? 무엇이 동기가 됩니까?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 이해 관계를 만들어서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될때, 여러분 움직이지 않습니까? 말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스탑입니다.

지금까지 이해관계에 의해서 내 삶을 움직였던 삶, 지금 내게 유익했던 것에만 움직였던 나의 태도, 이제는 스탑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우리의 삶을 내어놓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마치 아비새가 다윗이 요청했을때, 당신과 함께라면 죽는 자리도 가겠습니다 라고 자청했던 것처럼 주님과 함께라면 고통의 자리도 가겠습니다.

교회생활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익이 올까? 도움이 될까? 그런 것을 계산을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섬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의 성도들을 좀 더 섬길수 있을까를 그런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의 공동체는 이제 아주 중요한 전환기를 맞습니다. 두 번에 큰 사건을 통해서 사실상 다윗은 아주 충분하게 테스트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엔게디 굴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사울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유혹해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치셨습니다. 오늘 아비새를 통해서 또 한번 테스트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치셨습니다. 놀랍게도 다윗은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왜? 너희들이 하나님을 가져다 붙이지만, 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어. 나는 하나님이 어떤 것을 기뻐하지 않는지 알고 있어.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거의 극적으로 99.9%, 거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을 만한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셨지만 다윗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만족케 하셨을까?

그런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은 사울과 그의 군대를 깊이 잠들게 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우리의 삶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거침돌이 되는 모든 대상들을 깊이 잠들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들이 3000명이나 된다고, 그 숫자를 두려워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다면 그 3000명까지도 잠들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극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막에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참으로 우리는 많은 유혹 속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의 계시라고 유혹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금하시는지,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다윗입니다. 절대절명의 자리에서 유혹될 수 밖에 없고,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도 다윗은 중심을 잃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줄로 믿습니다. 그 다윗을 주님 기뻐하시며 사울과 모든 병사들이 깊이 잠들게 하신 줄 믿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의 자녀로써 오늘 날 살게 된 우리가 행복함을 고백합니다.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명절을 주셨기에, 또다른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에 주님과 동행하되 끝까지 동행하는,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되 끝까지 청종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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