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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 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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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갈릴리 바다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산들 중 하나인 렐몬산은 높이가 2,760m 나 됩니다. 지리산이 1,900m 정도 되니까, 꽤 높은 산입니다. 그리고 이 헬몬산은 항상 눈이 덮여 있습니다. 헬몬산의 눈이 녹은 물이 좁은 협곡을 타고 내려와 갈릴리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바다는 아열대성 기후에 영향을 받아 상당히 덥습니다. 헬몬산에서부터 내려온 찬물이 아열대성의 더운 갈릴리 바다의 물과 부딪히면서 예고하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풍랑을 일으키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다 저 쪽으로 건너가자”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두고,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지혜와 경험과 방법을 최대한 동원해서 애써 보았지만, 어떻게 해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그들은 당황했고, 그래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릴리 바다야말로 우리 인생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풍랑을 만나곤 했기 때문입니다. 풍랑은 예고 없이 오기 때문에 더욱 당황스럽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이런 풍랑은 인생에 쉴 새 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런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면, 풍랑이 면제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풍랑이 면제된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풍랑을 만나더라도 뚫고 나갈 수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벧전 4:12)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겐 평범한 시험도 있지만 불같은 시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시험이든, 설사 그것이 불같은 시험이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거기 뒤따라 13절에는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갈릴리 바다의 광풍은 ‘큰 광풍’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은 희랍어로 ‘메갈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쉽게 말하면 ‘메가톤’급 풍랑이라는 뜻입니다.
거대한 풍랑입니다. 삶의 근본까지 뒤흔들어 버리는 풍랑입니다. 정말 살고 싶은 생각조차도 없애버리게 하는, 삶의 존재를 위협하는 정도의 풍랑이 제자들에게 덮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어떤 풍랑에서도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게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풍랑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까? 예수, 그분이 누구시기에 우리에게 그런 승리를 주신다는 것일까?

우선 우리의 삶을 들여다봅시다.
어때요? 살만합니까? 어떤 때는 돈만 좀 있으면 살 것 같은데, 꼭 그런 건만도 아니지요? 어떤 때는 아이들이 공부 좀 잘하고 그러면 다 될 것 같은데, 그것 역시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요? 저 산만 넘으면 좀 괜찮아지겠지 싶어 죽을 둥 살 둥 하며 넘었는데 여전히 산 하나 또 기다리고 있잖아요?
갈릴리 바다. 제자들이 오늘 처음 건너는 것 아닙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평생 고기잡이 생활로 잔뼈가 굵어온 제자도 있습니다. 때로 그들은 풍랑을 만나기도 했고, 능히 헤쳐 나올 수 있기에, 지금도 그들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게 아닙니다.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겁니다. 그동안 풍랑을 만나면서 대처했던 방법들인 모든 지혜와 지식 그리고 힘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거칠게 밀어 닥쳐오는 풍랑을 잠재울 수도 없었고, 헤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헛수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들은 이게 아니구나 싶어 비로소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그래요. 인간은 인생의 폭풍들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자신이 아는 방법과 지혜를 다 동원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칠 때, 비로소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럴 때 죽고 싶은 생각뿐이지요. 실제로 그래서 죽는 사람도 있어요.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과 짜증이 가득한 사람…….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한계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무나 돌을 의지합니다. 점쟁이를 찾아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 뿐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외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주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그랬습니다. 주님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보세요. 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 배가 풍랑을 만난단 말입니까?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이 꼭 뭐라고 하셔야, 꾸짖으셔야 고요하고 잠잠해집니까? 능히 그들을 꾸짖어 고요하고 잠잠하게 하실 분이라면, 바람과 바다는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계신 배에 덤벼들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람과 바다가 비켜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실 이게 우리 신앙 아닙니까? 내가 예수님과 함께 하니까, 나는 부족하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분 때문에라도 염려, 근심, 걱정, 고통, 슬픔, 이런 것들이 덮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때로 큰 풍랑을 만납니다. 왜요? 왜 그렇습니까?
병들어 고통당하다가 고침 받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아예 병들지 않는 것이 더 감사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이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이 된 뒤에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심이 아니라, 아예 풍랑이 일어나지 않게 하셨더라면 그것이 더 큰 은혜 아닙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그렇던가요?
병들어 고통당해 보지 않고선 건강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잖아요. 병들고 난 뒤 고침 받은 것이 감사해서 감사헌금 한다면,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그리고 매일 감사헌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어디 그렇게 되던가요?
다시 말하자면, 제자들이 탄 배에 풍랑이 일지 않았더라면, 또 풍랑이 일어도 제자들이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었더라면, 그들이 예수님을 깨우기나 했겠어요? 세상 사는 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 척척 잘 되면 어디 기도라도 하시겠어요? 힘들어도 기도 안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살면서 수도 없는 풍랑을 만난다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의 지혜, 힘, 그 무엇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큰 풍랑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기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고, 그 도움이 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32장 10-12절에, “여호와께서는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황야에서 그 백성을 만나 감싸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어떤 거냐 하면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키우듯 했다는 겁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어서, 그래서 그 새끼가 떨어지면, 새끼 위에서 퍼덕이고 있다가 쏜살 같이 내려가 그 날개를 펴서 떨어지는 새끼를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그렇게 하나님은 그 백성을 감싸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같이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평탄하게만 이끌지 않으시고, 독수리의 거듭되는 연단처럼,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보호하시며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보금자리가 어지러울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독수리는 둥지를 지을 때,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높은 벼랑에 짓고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우는데, 새끼가 자라서 날아다닐 때쯤 되면, 고의적으로 위기를 주어 연단을 시킨다는 겁니다. 이럴 때 두 종류의 새끼 독수리가 있을 겁니다. 하나는 뚝 떨어지면서 “저거 우리 아버지 맞아?” 그러면서 “그래 죽자.” 그러면서 날개를 펴지 않는 독수리가 있을 겁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가 나를 훈련시키시는구나.” 하고 날개를 펴서 날갯짓을 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독수리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하늘과 땅의 여러 가지 복과 은혜를 주셔서 믿음으로 잘 살게 하시지만, 때로는 세상에 도취되어 믿음의 날개가 쇠퇴해지면, 세상 쾌락에만 집착하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의 달콤한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어지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건강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고, 어떤 이에게는 사업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고, 어떤 이에게는 가정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고…….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그럴 때 힘들지요. 두렵지요. 때로는 “이젠 죽었구나.” 싶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평안하게 해 주신다면 신앙생활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신명기 32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 먹거리가 넉넉해지고,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배고플 때나, 배부를 때나,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든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 하나님을 잘 믿다가 배부르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도 문제이고, 배부를 땐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을 잘 믿다가 배고프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다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도 문제인 겁니다.
배부를 때도 하나님의 은혜, 배고플 때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대체적으로 배고플 때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가능합니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안일하고 행복하게만 살면 잠재능력이 개발되지 않습니다.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고난과 풍파와 싸울 때에 우리의 믿음의 날개가 튼튼해지고 엄청난 잠재능력이 개발됩니다.

때로 보금자리가 흔들린다고 떨지 마십시오. 더 좋은 보금자리를 구상하는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풍랑을 만나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들 곁에 늘 계셨지만, 그들의 힘으로 바다를 노 저어 갈 때는 예수님이 필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간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당할 때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으며,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필요하며 얼마나 중요한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다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을 돌아다보십시오. 내가 수고하고 노력했기에,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지요? 심지어 교회도 내가 헌금 내고, 봉사하고, 헌신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지요?
물론, “내가 마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니까 그나마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제자들이 노를 젓는다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전하게 모시고 간 것 아니었습니다. 노는 제자들이 저었지만, 안전하게 건너가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수고는 여러분과 저가 했지만, 여러분이 삶이나 가정이나 사업이나 더욱이 교회는 여러분과 저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큰 풍랑을 만나 아무리 애써도 헤쳐 나갈 수 없게 되자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일어 나셨고,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금방이라도 배를 날려 보낼 것 같던 바람이 그치고, 금방이라도 배를 삼켜 버릴 것 같던 파도가 잔잔해 졌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악한 귀신들린 사람 고치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중풍병 환자를 고치고,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칠 때 이분은 예사로운 분이 아니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달리 권위가 있는 말씀이기에 이분은 보통 분이 아니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람과 바다도 그분에게 순종합니다. 바람을 꾸짖었다고 바람이 그쳤습니다.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그렇게 말씀하시자 정말 고요하고 잔잔해졌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
  “저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순종하는가?”
  저분이 누구시기에?

예수, 그분은 누구십니까?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무엇’이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주로 예수님이 내 자신의 이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깊이가 생기면, 즉 신앙이 성숙해지면 ‘무엇’ 이라는 질문에서 ‘누구’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예수님은 누구신가?”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진정한 확신과 고백이 없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예수님께 무엇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는 이분은 누구신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저 분은 누구일가
바람과 바다도 복종하는 저분은 도대체 누굴까?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저분이 바람을 지으신 분이 아닐까?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저분이 파도를 지으신 분이 아닐까?
그렇게 물으면서 제자들은 비로소 인간 예수에게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을까요? 병자고치는 능력?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는 능력? 심지어 죽은 자 살리는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들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곧 모든 것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곧 구원 그 자체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을 열고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모셔 들여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문밖에 세워 둡니다. 그리곤 급하면 문 열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말합니다. “예수님 지금 이렇거든요. 이것 좀 도와주세요.” 그리곤 그 문제가 해결되면 또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 둔 채 문을 닫아버리고 맙니다.
마치 풍랑을 만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상관없듯이, 예수님이 주무시든 깨어계시든 상관없듯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삽니다.
아버지께 아들을 돕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밖에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밖에서가 아닙니다.
쌀독에 쌀이 가득하다고, 냉장고에 고기가 가득하다고 그것이 곧 나에게 힘이 되는 것 아니다. 그것들이 음식이 되어 내 안에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될 때 나에게 힘이 되며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렇듯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밖에서 우릴 돕는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내 안에 들어와서 그분 자신이 곧 생명이요 힘이 되어주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예수 믿고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 받았다 하더라도 그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그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린,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주실 줄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우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곧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구약은 시23편처럼, 하나님은 목자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내 밖에서 나를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내 밖에서 나의 손을 잡고 인도 하시는 분 그런 분이셨습니다.
신약은, 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주님 내안에, 주님 내안에, 내 안에 계시고.”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내 살은 생명의 양식이요 내 피는 생명의 음료”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젠 내 밖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젠 내 안에 곧 내 살 내 피 속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과 내가 하나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보다 엄청 크시기에, 이제는 내가 아니라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에게 있어 누구십니까?
아직도 저 밖에서 무엇인가를 주시는 분이십니까?
그래서 그분이 필요하면 교회도 잘 다니다가, 풍랑을 만나면 도와 달라고 기도하며 그러다가, 필요가 없으면,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싶으면, 그냥 잊어버리고 사는 그런 분이십니까?
  이젠 질문을 바꾸십시오.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주실까?” 이런 질문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라고 질문을 바꾸십시오.
이젠 기도를 바꾸십시오. “주님 나에게 무엇을 주실 줄 믿습니다.”가 아니라, “주님 나의 모든 것은 주님 것입니다.” 하고 기도를 바꾸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의 도움이 되십니다.
여러분의 능력이 되십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되십니다.
여러분의 구원이 되십니다.
여러분의 기쁨과 평안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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