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간의 실존(實存) (롬 3:9-18)

  • 잡초 잡초
  • 342
  • 0

첨부 1


- 설교 : 유재명 목사

혹시 아시는지요?
선하게 생겼다는 것과 선한 것은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복이 있게 생겼다 해서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모습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시51: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죄인이었기에 죄로 시작해서 죄로 말미암고 죄로 끝나는 것이 인간의 모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성경의 선언에 대하여 아니라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인데...선한 사람은 있지 않겠나...”그래도 선한 구석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은 단호하게 답합니다. 9절에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재판장에서 내려진 선언은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 아래 있는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세상에는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죄인과 의인이라고 하는 죄인 두 가지 종류의 죄인이 있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호흡하는 모든 사람은 다 죄 아래 있으니 이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사도바울도 지금 앉아 예배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도 예외 없이 모두가 죄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의 모든 인간은 모두가 다 죄 아래 갇힌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상태에서는 모두가 죄의 굴레에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죄 아래서 태어나고 죄 아래서 살거나 죄 아래서 비참하게 죽어갑니다. 그러므로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9절의 죄 아래 있다 는 헬라어 표현으로 [히포아 하마르탄]이란 말인데 이 말은 모든 사람은 죄의 통제아래 죄의 지배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때로는 의로운 일을 행하고 때로는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설사 남을 사랑한다 해도 그 본질적으로는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죄의 통치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히포아 하마르탄]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죄의 힘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죄를 하나의 힘으로 봅니다. 죄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죄 아래 두어 파괴합니다.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죄는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까지 파멸케 합니다. 죄를 짓고 싶어 죄를 짓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기에 죄가 이끄는데로 따라다니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나는 얼마든지 죄를 절제 할 수 있다고 ”“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한번 두 번 죄를 우습게 압니다. 그 죄가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소망 없는 인간에게 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절망상태에 놓인 인간을 구하시기 위한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도 자랑하고 감사하고 노래하고 외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해방되지 않는 한 인간은 죄의 권세에서 해방 될 소망이 없습니다.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슴이니라(행4:12)고 외쳤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독선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종 된 우리의 결박을 끊으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죄의 종 된 상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이제는 죄의 지배가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변화시켜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혹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의 지배 아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깨어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도바울은 10절 이하에 바로 그리스도가 없는 죄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의 사악한 실존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니다. 죄의 우산아래 있는 인간의 실존을 말입니다.

첫째: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성품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10-12)

“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달은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는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말씀은 시14:1-3절이 인용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간을 설펴 보신 즉 아무도 선을 행하는 자가 없었다고 표현합니다.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육체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인정받지 않는 고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한 행실에 대한 도적적인 노력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인간이 의롭게 되려는 피 눈물 나는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죄의 권세아래 있어지는 피눈물 나는 고통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인간에게 죄를 해결할 능력이 있습니까? 인간에게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아니고는 죄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간 안에서 해답을 찾아보려 합니다.

먼저 죄를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를 절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구원 받는다면 나는 저 사람보다 나으니 나는 구원 받는다” 이것을 “상대적의 의”라 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여러분이 지구촌의 60억 인구가운데 가장 깨끗하다 해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다 하여도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죄의 지배, 죄의 권세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노력으로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 됩니다. 최선을 다했다 해서 그것이 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 헛된 해결책은 고행과 공로 사상입니다. 자기 삶을 비교하며 죄가 4이고 선행이 6이면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내가 선한 사람이다 생각하지만 성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에 죄보다 의가 많고 악보다 선이 많다고 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선언 앞에 자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죄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는 노력은 대단합니다. 대표적인 분이 불교의 성철스님입니다.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임은 사실입니다. 결혼 직후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그 이후로 부모나 자식이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가 된다하여 만나주지를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십년동안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16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고 살았다 합니다. 또한 이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8년 동안 좌불 좌상(눕지도 않고 앉아서 잠을 자는 것)으로 생활도 했다 합니다. 자연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노력 또한 대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이런 고행을 쌓고도 심령과 양심에 평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성철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열반송이라는 게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알아듣게 풀어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나는 한 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니 여기서 수미산은 불교의 상징적인 산을 말하는데 불교도들이 오르고자 하는 최고의 경지(112만KM)를 말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산체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려 있도다 했습니다. 성철의 마지막 고백은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헛된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솔직한 고백인 인간의 죄성입니다. 자신 또한 죄인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희망이 있습니까?
여기에 사도바울의 선언은 계속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달은 자도 없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여러 기준 중에 하나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하나 그것은 내가 죄인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이것이 구원의 은혜의 시작입니다.

또한 12절에서는 다 치우쳤다 합니다. 가정적으로 민족적으로 다 치우쳐 무엇이 죄인지 모른체 멸망의 길을 치닫고 있습니다. 한 무리가 되어 함께 하나님을 등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사 지내는 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함께 가족적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돼지 머리에 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른체 문화라는 옷을 입혀 국가적으로 함께 치우쳐 있습니다. 미주에는 동성애와 결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어리석은 죄인지 모르고 국가적으로 이를 합법화 할 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무엇을 성도라 생각합니까? 성도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죄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이렇게 죄인임을 알고 예수그리스를 알고 주님을 노래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십니까? 세상의 어리석음은 나와 봐야 압니다. 그 안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죄악들은 안에 치우쳐 있어 모르는 것입니다.

12절에서는 무익하게 되었다 합니다. 본질이 변질 된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며 에덴동산을 집으로 삼고 자연을 관리하고 다스리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아름다운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시니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그 인간이 어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연 앞에 가치 있는 인간이 언제 가치로부터 멀어져 버렸습니까? 인간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지어놓고 탄식하였습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해야 할 인간이 만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비참한 존재가 되어서 해와 달을 산을 나무를 섬깁니다. 송아지와 돼지 머리와 뱀들을 섬깁니다. 심지어 생명도 바위도 돌과 수목을 섬기는 쓸데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선언하였습니다.

둘째: 사도바울이 해아래 있는 인간이 몸으로 짓는 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13-15)

성경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창조하신 인간의 지체가 예컨대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입과 그리고 발과 같은 것들이 얼마나 악하게 악의 도구로 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사도바울은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이것은 인간의 냄새입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니 무덤이 열려 있으니 그 속에선 얼마나 썩은 냄새가 나겠습니까? 사람의 목구멍을 통하여 인간의 가슴속에 썩어가는 정욕, 시기, 증오의 감정이 쏟아져 나오니 그 냄새가 한이 없는 것입니다. 한국영화중에 한때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워 갈 때입니다. 사람들이 워낙 좋은 영화라 하여 아들하고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나는 아들과 함께 온 것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대사 대부분이 욕으로 말하는 것이 자리를 불편하게 했던 것입니다. 실미도는 더하다 하니 결국 실미도를 보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들이 다 더러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스토리들입니다. 왜냐구요 결국 사람에게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작가들이나 작가들이 쓴 시나리오에 목을 매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매 한가지입니다.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입이 독한 냄새를 풍기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저주하는데 사용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분명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를 찬송하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형제를 저주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니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저와 여러분의 입술은 거듭난 입술이기를 소원합니다. 성령 안에서 다스림을 받는 입술이기를 소원합니다. 언어를 통제할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한다해도 그 기도는 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입만 그렇습니까?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다 했습니다. 발만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도와주고 넘어진 자를 일으켜 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데 사용해야 할 이 손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자식에게마져도 공포의 도구가 될 때가 얼마나 많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은 축복의 입입니다. 여러분의 손은 축복의 손입니다. 주일학교 찬양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내 손이 하는 것을 조심해...내 발이 가는 것을 조심해...내 입이 말하는 것을 조심해...위에 계신 주께서 사랑스레 보시네...
사50:4절에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는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니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 했습니다.

셋째: 죄로 타락한 인간의 결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16-17)

먼저 16절에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입니다.
성경대로 인간의 죄의 결국은 파멸과 고생입니다. 인간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소망이 있습니까? 하늘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무엇을 이루겠다? 이는 결국 파멸과 고생입니다. 또한 성경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 되어 평안이 있습니까, 출세하면 평안이 있습니까? 저는 요즘 자주는 아니지만 시청하는 드라마 프로가 있습니다. 바로 영웅시대입니다. 박정희 시절 삼성과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인데 어쩌다 한번 씩 보는 것이지만 스토리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던 박정희대통령이나 최고의 부를 자랑하던 삼성의 이병철이나 일에 대한 성취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못할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불도저 같이 기업을 일구어 갔던 고 정주영씨나 드라마를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싶어 하고 누리고 싶어 하는 목적을 이룬 사람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단한 것이라 하지만 결국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없으면 어떻습니까, 조금 덜 누리면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으면 이것이 최고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주는 것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겠습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은 아무일 없어야 하는 것이지만 주님이 주는 평안은 아무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하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의 삶속에 강같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넷째: 죄의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합니다.(18)

인간의 비참한 타락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왜 인간이 악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죄의 원인,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마귀는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가볍게 여기도록 하였습니다. “죽을 까 하노라”라는 말에 안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언은 단호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히 요구할 때 아브라함은 그 주권에 순종합니다. 내 아들도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보시고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 하는 줄 알았구나”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담과 달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던 존재였던 것입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만 있고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인류역사를 이어오면서 얻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인이나 국가는 타락할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 결과들이 비참해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포기할 때 인간은 인간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때의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모두가 내가 원하는 것에 목을 매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마땅히 회복해야 합니다. 잠1: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마땅히 하나님이 될 때 인간이 인간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간혹 대표기도자들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해댈라”고 말입니다. 이 민족이 살길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가 왜 성도로써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까 왜 성도가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보십시오. 부모를 모시는 자식이 제 부모를 우습게 여기면 동네 사람들까지 그 부모를 우습게 여깁니다. 그러나 자식이 아무리 부족한 부모라 할찌라도 귀하게 여기고 공경하고 잘 모시면 동네사람들도 그렇게 부모를 높이 받들어 줍니다. 자기 자식을 귀하게 여기면 남이라 해도 그의 자식을 귀하게 여겨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우리가 공경하지 않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겠습니까? 저거 예수 믿는 것들을 보니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알기를 우습게 알더라고 말들을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구나.”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땅에 천만에 가까운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신앙생활의 절반만큼이라도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두려워한다면 이 나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와 같이 절망적인 사실 속에서도 복음으로 보면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절망의 신호가 아니라 소망을 위한 도전이 됩니다. 생명을 위한 도전입니다. 윌리암제이는 “내가 나이가 들어서 나의 기억은 점점 쇠퇴해가지만 그러나 두가지만은 절대로 잊어 버릴 수가 없다 하나는 내가 크나큰 죄인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만큼 위대한 구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에 우리는 절망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그만큼 위대한 구주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케리슨은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를 보여 주심으로 그의 그 큰 자비를 내게 가르쳐 주셨다 적게 용서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할 것이요 많이 용서를 받은 자는 많이 사랑 할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이 아무리 절망이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 악해서 구원 얻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임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면 소망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일찍이 윌리암 로비가 영국에서 목회를 할 때 아무리 생각처럼 목회가 되지 않았다 합니다. 사람들이 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서 목회를 그만 두겠다 하여 포기하고 돌아가려 할 때 그때 무디 목사가 꼭 붙잡고 한마디를 하였다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이곳에는 너무 악해서 구원 얻지 못할 사람들이 있던가?” 이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 내가 목회하는 목회 장소에서 너무 악해서 구원얻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들도 모두가 다 구원을 얻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금 목회를 위해 최고의 생애를 드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죄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새로운 생명과 용서 받은 새 생명의 실존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함이 없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앞에 내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상태는 문제가 안됩니다. 죄인인 인간의 실존이 더 이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냐에 있습니다. 그분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입느냐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안산빛나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뜨거운 영성이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세상 또한 희망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잔인하게도 짓밟아 버리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입니다.
-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