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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용서 (눅 23: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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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중표 목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용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천년 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 가운데서 한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이 그토록 극악한 강도 곁에서 죄인들과 함께 죽으셨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죄 없는 분이, 한번도 악을 행한 일이 없고, 불의를 범한 일이 없으며,  남을 해롭게 한 일이 없는 주님께서 왜 그토록 무서운 죄의 형벌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이것은 이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인류의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는 왜 고난을 받으셨을까 왜 그토록 선하신 하나님의 아들, 거룩하신 분이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고난을 겪어야만 했을까 이것은 끊임없는 우리의 질문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누구입니까? 빌라도, 유대인들, 당시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십자가에 못 박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못을 박았으나 결국 못 박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요, 사람들이 그를 고통 가운데 처절하게 만들었으나 그를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는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질문은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사 53:10).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당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롬 8:32). 자기 아들을 이미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장안에 화제가 된 영화 "The passion of Jesus Christ"의 원 저자인 존 파이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50가지 이유를 책으로 썼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 죽인 죄를 당시에 로마의 총독이나 군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가롯유다에게서 찾아서는 해답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죽게 하셨는가? 우리의 죄 때문에 죽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자리가 바로 골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로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죽음의 현장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누가복음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눅 23:33)라고 했고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골고다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자기 죄 값으로 죽어가는 해골들, 또 미래에 죽어야 할 죽음의 해골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해 주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에서 흘린 피, 손에서 흘린 피, 발에서 흘린 피, 옆구리에서 흘린 피를 해골이라는 인간의 죽음의 무덤에 흘려 내립니다. 골고다의 땅을 적십니다. 그 죽음이 죄값이요, 심판과, 저주와, 죽음에 처한 인류를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의 피로 적셔 놓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는 친히 이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저가 찔림을 받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저가 상함을 입은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십자가에 상함을 받게 하사" 하나님께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고, 채찍에 맞게 하시고, 피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요 6:38-39)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는 목적도 분명하고 그 기도의 목적도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인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평상시에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는 십자가 상에서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만 그 죄를 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사랑하는 용서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하신 기도를 통하여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확증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쪽에 있는 강도와 함께 죄인들의 무리 속에서 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원수의 죄를 자기 몸으로 지고 대신하여 용서를 받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가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죄사함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사함을 베푸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다 포기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죄인의 몸으로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용서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해 주소서."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런 괴사도 없고,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시며, 남들로부터 고난을 받으시되 참고 인내하시면서 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무리들은 공모하여 거짓되고 날조된 죄를 뒤집어씌워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고통을 주어 죽도록 했습니다. 양쪽의 강도들은 악담을 하고 분을 터뜨리고 있는데 주님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죄의 용서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죄가 있어서 용서를 비는 것도 아니요, 불의해서 용서를 비는 것도 아니요, 잘못해서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악을 홀로 담당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택한 자원적 고난이요, 예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은 죄인의 입장에 서서 이 기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할 때 저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대인들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제비뽑은 로마의 군병들입니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언도한 로마의 총독 빌라도입니까 그리고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함성을 질렀던 군중들입니까 물론 이 사람들이 다 저들 속에 다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들입니다. 예수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을 우리들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다시 말하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할 때 저들은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인 자가 누구냐? 묻는다면 우리들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죽으셨는가'라고 물으면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천년 전 저 예루살렘 거리에서 예수를 욕하고, 비난하고, 침뱉고,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 속에 나도 끼어 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무한하나 그 효험은 믿는 자에 한한다." 이것은 존 칼빈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믿는 자에게만 그 효험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약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약을 마시는 자만 효력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기도는 무한한 능력이 있지만 용서받은 자만 저들 속에 들어 용서의 은총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간구는 높고 깊은 하나님의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산상수훈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던 그 예수님의 사랑을 십자가 상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살리는 용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들은 사람은 이천년 전 바로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 두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강도는 살인 강도요, 로마에 폭동을 일으킨 바라바와 같은 정치범으로 법을 어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범한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고 악질적인 사람으로 죄형을 받았던 것입니다. 저들은 죽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향해서 욕하고 비난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4). 두 강도가 다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에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때 한 강도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이 용서받을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할 때 저들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여' 부르짖는 그 고백 속에는 자기 자신이 용서받을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님은 즉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즉시 골고다 언덕에서 효험을 나타냈습니다. 용서를 비는 그 기도가 그 강도에게 임해서 강도는 용서를 받고 낙원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용서받은 자에게는 낙원이 약속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강도는 자기의 죄는 알지 못했으나 주님은 알았습니다. 자기 악한 것은 그동안 알지 못했으나 주님께서 용서해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를 받는 순간에 그에게 약속된 것은 낙원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한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자는 그 낙원이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강도는 바로 그 시간에 죽습니다. 그런데 그는 낙원으로 갔습니다. 용서받은 자로 갔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용서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용서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불평하거나, 불만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다른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고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은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를 용서해야 합니다. 자기 현실을 용납하지 않고 열등의식을 갖고 운명을 한탄하는 것은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는 그 심령이 낙원이 됩니다. 용서받은 자는 사는 가정이 낙원이 됩니다. 용서받은 자는 삶의 현장이 낙원이 됩니다.

어떻게 용서를 받습니까?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으셨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라는 확신을 가지면 됩니다.
첫째, 용서하면 예수님을 닮습니다. 용서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해치는 자를 용서하고,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면 주님의 형상을 닮습니다.
둘째, 용서하는 마음은 평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얼굴에 웃음이 없는 사람,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용서받은 증거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 속에 용서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얼굴에 상처가 깃들어 있는 사람은 어린시절부터 용서하지 않은 상처가 축적된 것입니다.
셋째, 용서하면 건강해집니다. 모든 건강은 상처의 치유로 이루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병이 깊어집니다.
넷째, 용서하면 다른 사람과 화목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독합니다. 아무도 그를 따라주지 않으니까요. 용서하면 내 마음에 자유가 옵니다. 용서하면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용서는 가정생활을 행복하게 합니다. 가정생활을 원만하게 못하는 사람은 속에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의 문제는 뭘로 풀어야 하느냐? 용서로 풀어야 됩니다. 우리 개인적인 문제도 용서로 풀어야 됩니다. 
강도가 누구입니까? 아담이 강도입니다. 아담이 왜 강도입니까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하나님 보는 데서 따먹었으니까 강도입니다. 모르게 훔쳐가는 것이 절도요, 보는 데서 훔쳐가는 것이 강도입니다. 그 강도의 후예들이 우리 인간입니다.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인류에게 낙원을 회복하러 오신 분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사회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아 낙원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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