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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자 (시 8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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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성홍모목사

  오늘은 주님의 날이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억하면서 작은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금도 생명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계명이요, 십계명의 제4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일주일에 하루 주일로 지키는 것은 창조의 귀한 섭리요, 인간을 만드시고 너무나 인간을 잘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위하여 지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2:2-3절에는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토요일의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 해가 떨어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해가 떨어지기 최소한 30분 전부터 안식에 들어가야 넉넉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되기에 해 지기 전 30분에서 시작하여 토요일 해가 지고 나서도 30분이 지나야 안식일을 끝낼 정도로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이 되면 대중교통이 운행되지 않고, 상점도 문을 닫으며, 무엇을 살 수도 없고, 무엇을 즐길 수도 없습니다.  21세기 현대 문명 사회에서 어떻게 문명의 이기를 모두다 포기하고 하루를 지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태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면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안식일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유태인으로 시인은 아하드 하암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더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가장 좋은 음식을 준비하여 식사를 즐기고 온 가족들이 모여 찬송하고 대화하면서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일주일 중에 가장 소중한 날로 보내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엿새동안 창조의 사역에 힘쓰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졸지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깊이 생각해보면 이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한 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한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날을 복되게 하신 것도, 이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도 모두다 인간을 위한 날이었습니다.  이 날에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은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일에서 손을 놓으셨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히브리 대학에서 성경을 전공하시고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들이 몇 분이 되지 않는데, 전주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김경래박사가 그 중의 한 분입니다.  그의 저서 중에 "나의 왕 나의 창조주"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일곱째 날]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한 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날이요, 창조주 하나님은 일을 멈추시고 모든 피조물 중에서 머리인 사람으로 충분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루를 기다려주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여섯 째 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일하신 날  중에 맨 마지막 날에 지음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첫 사람 아담은 지음 받자마자 일곱째 날을 맞아 안식에 들어가고 그 다음 날부터 일을 하도록 정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요, 창조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을 쉰 다음에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일을 마치신 다음에 일손을 놓으시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지말고, 먼저 쉰 다음에 일하는 존재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의 전통을 버리고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이 주일에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은 나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을 생명처럼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 주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 성도들의 제 일장 일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자"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의 말씀은 고라 자손의 시로, 지휘자를 따라, 깃딧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 신학자로 시편을 연구하신 유명한 궁켈은 이 시편84편을 대관식의 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궁켈이란 구약신학자는 그의 불후의 명저로 알려진 시편개론에서 150편의 시를  6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1) 찬송시 2) 대관식의 시 3) 민족의 탄식시 4) 제왕의 시 5) 개인의 탄식시, 6) 개인의 감사시  이렇게 크게 6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관식의 시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만군의 하나님으로 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통치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위에 강림하시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높임을 받습니다.  대관식의 시들은 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예배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대관식의 시들은  1)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와  2) 우리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는 즉위식 노래가 있으며  3)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찬양하는 시온의 노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84편을 지은 시인은 고라 자손이었습니다.  고라 자손은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의 한 집안으로 주로 성전에서 찬양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으며, 성막에서 문지기와 수종드는 일을 맡아 봉사하였습니다. 

  오늘 읽어본 시편은 성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이 곡은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레위 족속 찬양대원들과 함께 합창으로 올리는 찬양곡이었습니다. 여기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우상화 할 정도로 극찬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높이는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지은 시인은 성전에 올라가고 싶어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구구절절이 담아내고 있습니다.  짧은 한 편의 시에 위대한 신앙을 다 담고 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이 내려주시고 베풀어주시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복 주시지만, 구약의 저자들은 시온에서 복을 주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시128:5-6)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한 성전에 나아오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의 말씀은 "복이 있나이다"라는 말씀을 3번 말씀하셨습니다.  1)  4절에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셨고,  2) 5절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3) 12절 말씀에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집에 살며, 주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이 되고, 주님만 의지하는 중에 복 받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1)  주의 장막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거처, 장막, 성막이란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하나님의 법궤는 장막에 보관되고 있었고, 장막 앞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로 한 장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화려한 집이 아니라, 장막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뵈옵고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주의 장막뿐이 없습니다. 

  2)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했습니다.  2절에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에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라고 했습니다. 
궁정이라는 곳은 왕의 저택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습니다.  정원이 아름답게 가꿔져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안뜰이 있었고, 왕이 거처하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정원이 있었고, 성전 주변에는 아주 큰 뜰이 둘려져 있었습니다.  이 궁정도 성전의 한 부분입니다.  성전의 본 건물과 궁정을 포함하여 보다 큰 의미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3)  주의 제단을 사모하였습니다.  성전이 있다고 하면 제단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전은 제사 드리기 위하여 있는 곳인데, 제단이 있어야 성전입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것은 제단에 제물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4) 주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집이라고 한 히브리어 '바이트'라는 말은 집, 건물, 또는 가정, 가족을 의미하였습니다.  우리의 집에는 부모님들이 있고, 형제들이 있고, 우리 집에는 사랑이 넘치고 안식이 있는 장소입니다.  성전에 간다고 하였지만, 마치 우리 집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안식이 있고, 형제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2.  우리는 성전에 올라가야 합니다. 

  그는 주의 장막을 바라볼 때마다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성전에 올라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맞아 다음으로 미루고 보니, 얼마나 섭섭하고 약이 오르고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뒤로하고 바벨론에 끌려가 70년 간 포로생활하던 끝에 성전을 건축하려는 열망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시인은 매년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절기만 되면 올라가던 성전인데 이젠 몸이 병들고 불편하여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하여졌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올라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영혼은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쇠약해질 정도라면 다 꺼지고 소멸되고 사라질 정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애간장이 타서 녹아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부근에서 마음껏 날아다니면서 성전 위에 올라가는 참새와 제비가 부럽다는 생각까지 가졌습니다.  주의 제단에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집에 살면서 마음껏 목청 높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3.  우리는 끝까지 성전에 올라가야 합니다. 

  성전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5절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온의 대로라는 말은 시온의 순례길에 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성전에 올라갈 때에는 뒤에서 잡아끌어 앉히려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결심하고 발걸음을 옮겨 성전을 향하여 일어나 걷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하나님이 붙들어주십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도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이며,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란 말은 원문에는 '바카 골짜기'라고 하였는데, 울음의 골짜기라고 하여 성전에 올라갈 때면 이곳을 지나가기에 너무나 힘들고 목이 타고 어려워서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장소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샘물을 솟아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향하여 출발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성전에 도착하여 엎드려 기도할 때면 하나님의 그 엄청난 위로와 은총이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4.  우리는 성전에서 봉사해야 합니다.

  10절입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라 자손의 시인데, 그들은 그의 조상 고라와는 달랐습니다. 

  그의 조상 고라는 성전 제사장직을 원하였지만, 자손들은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 한 절만 가지고도 은혜가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가장 주인공은 제사장 같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보니 성전에서 문지기로 있으면 어떻습니까?  내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여도 그는 감사찬송이 우러나오고 감격이 넘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종을 치면 어떻고, 화장실 청소하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성전에서 은혜를 받고 위로부터 주시는 힘을 얻어 살아야 이 세상을 힘있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전을 가장 사모한 사람은 어린 예수님이셨을 것입니다.  12살 때에 성전에 올라왔는데, 부모님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예수님은 성전 마당에 남아 여러 율법 교사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하는 것이 더욱 좋았습니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정말 귀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이 말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배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11-12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나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도록 정직하게 행하며 또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내촌감삼과 친구들 여섯 사람이 일본 북해도 농대에서 4년 간 철저히 주일을 성수하여 시험공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4년간 주일을 쉬고 보니 총200일 이상 공부하지 않은 셈인데, 그들의 성적이 1등부터 7등까지 독차지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프랑스 혁명이란 것은 사실 무신론의 혁명이었습니다.  혁명이 끝난 후 혁명 주체들이 사람들의 노동량을 조정하였습니다.  일 주일 단위로 6일간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을 10일 단위로 늘려서 9일간 일하고 하루를 쉬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일을 많이 하여 낙후된 그들의 산업을 발전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0일 휴일제를 실시한 뒤에 전국적으로 40%의 결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제도로 환원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에 인간의 육신을 일주일에 하루를 쉬어야 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군에 갔을 때에 12월 18일이었습니다.  한 주간동안 고된 훈련을 받고 군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잘 다니고 봉사하고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교회의 전도사로 봉사하던 중에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군에 와서 처음으로 주일을 맞이하였는데 연대본부가 있는 연병장을 가로질러 영 외에 빨간색 지붕으로 된 연대 소속 군인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날이 12월 24일 성탄축하예배로 드리면서 시내의 한 교회가 성가대와 함께 와서 빵과 우유를 나눠주고 예배를 드리는데,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눈물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집을 떠나온 이유도 있을 것이고, 군에 와서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감격스럽고, 장가들고 나서 군대에 와서 그런지 그 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날 우리 소대 40명 중에 25명 정도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행진해서 신병교육대로 돌아왔는데, 소대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넓은 연병장을 서너 바퀴 선착순 돌리더니, 병기검사에 들어갔습니다.  전날 다 정비하고 두었는데, 교회에 다녀온 사람만 총기가 불량하다고 때리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맞았습니다.  첫 번 주일은 그렇게 고된 하루로 끝이 났습니다.  그 다음 주일 교회에 다녀올 사람 나서라고 하니 절반으로 줄어서 10명 정도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주일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고 돌아오니 소대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관물대 검사한다고 하는데 꼭 교회 다녀온 사람들만 골라내어 추운 겨울날 팬티바람에 연병장에 집합시켜 별의별 기합을 주는데 이것은 정말 인내심을 요구하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주일은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교회에 다녀올 사람들 나오라고 하는데, 5명이 나왔습니다.  절반으로 거기에서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5명이 교회를 다녀왔는데, 5명만 데리고 사역을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세 번째 주일이 지나갔습니다.  네 번째 주일이 되었는데, 교회에 다녀오겠다고 나선 사람은 두 사람이 남았습니다.  저하고 다른 한 친구인데, 그 친구는 다른 교단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교회에 간다고 나서니 다른 사람들이 근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잘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대장이 하는 말, 이제부터 이 두 사람은 모든 일에 봐준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저녁 예배까지 드리고 와도 좋고, 일과 후에 교회에 다녀와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군종병들을 도와주면서 은혜스럽게 훈련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주님의 날이요, 이 날 우리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복 주시기로 예비하신 날입니다.  성수주일은 우리 성도들의 가장 기본에 속하는 날입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리고 예배하고, 은혜를 받아야 우리 영혼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주일 출석에 힘을 쓰시고 충성스럽게 신앙생활하셔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을 받아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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