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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부를 돌본다는 뜻은? (딤전 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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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과부를 특별히 돌보시는 하나님>
오늘 말씀은 참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의 구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는 말씀입니다. 특히 교회가 어떻게 과부를 돌볼 지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초점을 과부에 대한 구제 사역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과부가 되는 일은 퍽 괴로운 일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특히 성서가 쓰여졌던 고대 근동 지방에서 더 더욱 그러했습니다. 철저히 가부장적인 상황 속에서 여성들은 도무지 인격적인 취급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남성의 부속물 정도로 홀대받기가 일쑤였던 것이지요. 이런 시대를 살았던 여인들이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홀로 사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누군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생계가 막연해져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슬람교를 믿는 모슬렘들은 한 남성이 최고 4 명의 여성과 합법적인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율법으로 정해 놓고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편견을 가지고 중동 지방의 일부다처제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모슬렘들이 호색한(好色漢)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여자들을 많이 거느린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사회보장 차원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수없이 많은 전쟁들이 일어나서 수많은 남편들이 목숨을 잃는 일들이 다반사(茶飯事)로 일어났습니다. 그 때 과부가 된 사람들은 누군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은 한 남성이 최고 4명의 여성들과 혼인할 수 있도록 법을 정해 놓았는데, 두 가지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들을 돌볼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만 하고, 둘째는 모든 아내들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슬렘들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는 것은 살길이 막막해진 과부들에 대한 인권보장 정신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 역시 아주 일찍부터 '과부'와 '고아'에 대해서 아주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고아'가 '과부'와 함께 선정된 이유는 고아 역시 돌볼 사람이 없을 경우 살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 22: 22-2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과부와 고아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똑같은 방법으로 무서운 벌을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신약에 와서 약 1: 27 역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이 진정한 경건을 테스트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 밖에도 수많은 성경 구절들이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아주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으로서 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고아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교회 공동체가 아주 일찍부터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 6: 1-6 말씀에 보면 초대 교회 안에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과부에 대한 구제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파 과부들이 헬라파 과부들보다 더 구제를 많이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헬라파 신자들이 불평을 토로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구제할 물질, 즉 헌금은 제한되어 있는데 도와주어야 할 과부들은 많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제한된 구제 헌금으로 어떻게 하면 공평무사하고 균등하게 구제 사역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초대 교회의 아주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던 것이지요.

<에베소 교회의 구제 명부에 올릴 '참과부'의 선별 기준>
자, 그렇다면 바울 사도를 대신해서 에베소 교회를 치리했던 디모데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요? 본문 말씀을 정독(精讀)해보면 에베소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와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과부들을 도울 수 있는 구제 헌금은 제한되어 있는데 혜택을 받아야 할 과부들의 숫자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명확한 기준 없이 아무나 구제 혜택을 받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명한 기준을 세워서 공평하고 균등하게 구제를 베푸는 것이 디모데에게 아주 중요한 목회 과제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목회의 대선배요 인생의 대스승인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 안의 과부를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에 대해서 충고한 말씀이 주조(主潮)를 이루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참과부'(truly widows)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교회가 구제를 꼭 해주어야만 할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여 있는 과부를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는 구제 헌금이 넉넉지 않으므로 아주 궁핍한 형편에 놓인 '참과부들'을 선별해서 그들에 한해서 우선적으로 구제 사역을 해야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바울이 제기하는 첫 번째 질문은 '참과부'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교회에서 구제를 받기 위해 참과부는 또한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성품이나 행위가 비난받을 소지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로부터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참과부'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본문 9절에 나오는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라는 표현을 주목해야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반드시 도와야 할 '참과부들'의 이름을 기록한 구제 명부임에 틀림없습니다. 교회 헌금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 다 도울 수는 없었고 어떤 자격기준을 통과한 참과부들만 선별해서 명부에 올려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참과부로서 구제 명단에 올려야 할 과부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은 무엇입니까?

① 4-5절 말씀을 보면 참과부는 의지할 데가 없이 홀로 사는 이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도와줄 가족이 있거나 세상 연락(宴樂)에 빠진 과부들은 참과부 명단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먼저 어떤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을 경우, 이 가족들이 일차적으로 과부된 여인을 돌보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바울은 어떤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을 경우 그 가족들이 과부된 여인에게 효(孝)를 다하여 보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8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홀로 된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자식은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불신자보다도 질이 더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홀로된 어머니를 돌봄으로서 자식들은 한편으로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교회안의 구제 헌금을 절약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교회 재정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양할 가족들이 있을 경우 비록 과부 되었다고 할지라도 에베소 교회의 구제 명단에 올라갈 참과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아무 의지할 데 없는 과부라고 해서 무조건 도와줄 수는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합니다. 5절을 보세요.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逸樂)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둔 채 기도와 간구에 전념하는 사람이야지 참과부의 명단에 들 수 있는 것이지 세상 향락에 빠진 사람은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비록 살았으나 죽은 사람과 진배없다는 것입니다. 7절 말씀에 보면 바울은 비록 아무 의지할 데 없이 홀로된 참과부라고 할지라도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 향락에 빠져서 책망받지 않도록 엄히 경계하라고 디모데에게 권(勸)하고 있습니다.

  ② 9절 말씀을 보면 참과부는 예순 살 이상이 된 이로서 한 남편의 아내였던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참과부의 기준을 설정할 때 나이 제한을 두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1세기에 지중해 연안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과 비교할 때 결코 오래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처럼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60 세 이상이면 그 당시 기대 수명으로 볼 때 꽤 장수했던 노인 축에 끼인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60세 이상이라는 연령 제한을 둠으로서 교회는 두 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재혼할 수 있거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젊은 과부들을 구제 명단에서 배제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다음에 구제를 해야할 참과부의 숫자를 대폭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가 그만큼 구제 헌금이 넉넉지 못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구제 명단에 올라간 참과부들 역시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줍니다.

그 다음에 참과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남편의 아내였던 사람, 즉 오직 한 남편에게만 정절(貞節)을 지킨 여성이라야 했습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해서 결혼 생활이 난잡(亂雜)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사실과 한 사람 밖에 없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 그야말로 의지할 데가 전혀 없는 외로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③ 10절을 보면 참과부는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착한 행실을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10절을 보면 착한 행실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크게 집안과 집밖에서 다섯 가지 선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먼저 집안에서는 자녀를 잘 길러야 하고 나그네 대접을 잘 해야 합니다. 집밖에서, 특히 공동체 생활을 할 때에는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환난 당한 자를 구제 잘 해야 하며,' '모든 선한 일을 열심히 쫓아 행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성도의 발을 씻긴다'는 표현은 극도의 겸손과 섬김을 의미합니다. 죄많은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뒤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준 행위(눅 7: 36-50)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모습(요 13: 5-14)은 모두 극도의 겸손과 섬김을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참과부의 명단에 올라갈 사람들 역시 교회안의 여러 성도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잘 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교회 안에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잘 도와주어야 할뿐더러 모든 선한 일에 몸을 바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도 바울은 참과부가 가정이나 교회에서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윤리적인 태도들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참과부로서 구제 명단에 올라가야 할 사람들의 자격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참과부는 60 세 이상 된 노인으로서 남편을 잃은 뒤 남편이 물려준 유산은 물론이고 의지할 자식이 하나도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사는 모범적인 신앙인이어야만 했습니다. 교회가 돕지 않으면 그야말로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딱한 과부들을 선별해서 구제 사역을 하라는 당부인 것이지요.

<거짓 과부들을 경계하라>
그런데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참과부'와 정반대 되는 말이 하나 나옵니다. '젊은 과부'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상하게도 디모데에게 '젊은 과부'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다. 참과부에 비교할 때 이들은 거짓된 과부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11절을 보면 젊은 과부는 일절 구제 명단에 올려서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첫째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슬러 정욕에 이끌리면 결혼을 하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볼 때 이것은 처음 서약, 즉 재혼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기도에 전념하겠다는 서약을 저버리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더 심각한 데, 13절 말씀을 보세요. 젊은 과부들 중에 일부는 게을러져서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면서 빈둥거리며 수다를 떨고 남의 일에 참견하고 해서 쓸데없는 일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기는커녕 교회 공동체를 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들 젊은 과부들이 절대로 구제 명단에 올라가서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들은 에베소 교회의 안정을 해칠 뿐 아니라 쓸데없이 교회 재산만 축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15절 말씀을 보면 실제로 일부 젊은 과부들은 이미 곁길로 나가서 사탄을 따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우려했던 그대로 신앙 공동체에 해를 끼치고 교회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갔다는 것이지요.

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14절에 이런 충고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젊은 과부들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재혼하도록 만드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실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독신(獨身)을 선호했지만 결코 결혼이나 재혼을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처럼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신앙생활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절제할 수 없거든 주 안에서 결혼하라고 적극 권면했습니다(고전 7: 8-9, 39 참조).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바울은 에베소 교회 안에서도 젊은 과부들이 믿음의 길에서 일탈(逸脫)하여 빈둥거리며 수다를 떨고 정욕에 이끌려 여러 가지 죄를 짓는 것보다 재혼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홀로 사는 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세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본문 말씀은 에베소 교회의 구제 제도, 특히 과부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에 대해서 퍽 흥미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바울과 디모데가 활동했던 시대와 우리 시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때의 과부와 우리 시대의 과부는 분명 다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제시하는 기본 정신은 시대와 상황의 차이를 뛰어넘어 여전히 똑같습니다. 과부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잘 돌보아야 한다는 가르침, 이것 하나만큼은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60 세 이상의 홀로되신 분들을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오늘 우리 주변에 65세 이상 되신 분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홀로 사시는 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사실 관심을 더 많이 기울여할 분들이 아내를 잃고 홀로 사시는 홀아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말씀을 과부이거나 홀아비이거나 간에, 연세 많으신 분들 가운데 홀로 사시는 분들을 잘 돌보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12살 먹은 소년 밥(Bob)이 사는 집 옆에 95세 된 할머니가 아무 일가친척도 없이 홀로 되어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열어서 간신히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어머니가 이 할머니를 딱하게 여긴 나머지 뭐 살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들에게 이 할머니 집에 가서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할머니는 신경통으로 다리도 절고 계셨고 지팡이에 의지한 채 겨우 몇 걸음 정도밖에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이 할머니 가게에 갈 때마다 외로운 할머니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때마다 소년은 할머니가 싫지 않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이야기 상대가 없던 할머니는 이 소년을 귀여워했고 또 고마워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가게문을 나설 때마다 할머니는 25 센트 짜리--100원 짜리--동전 하나를 밥의 호주머니 속에 넣어주었습니다. 그 때마다 소년은 그 동전으로 사탕도 사먹고 아이스크림도 사먹곤 했습니다.

어느 날 또 어머니 심부름을 간 밥에게 할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열심히 해주었습니다. 20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일, 필라델피아에 조카가 하나 사는데 소식이 끊어졌다는 이야기 등등 외로운 이야기들을 해주었습니다. 이야기가 다 끝난 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동전 하나를 또 밥의 호주머니 속에 넣어주었습니다.

소년은 이 동전으로 뭘 사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할머니 생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밥은 즉시 문구점으로 달려가서 시골 풍경이 그려진 생일 카드를 하나 샀습니다. 문방구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습니다. "여자 친구에게 줄거니?" 소년은 즉시 "아니오" 라고 대답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어 "네, 맞아요. 제 여자 친구에게 줄 카드예요."

카드를 사서 생신을 축하드린다고 쓴 다음 즉시 할머니 댁으로 갔습니다.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이 카드 받으세요." 카드를 받아들고 천천히 봉투를 여는 할머니의 손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할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밥, 정말로 고맙구나." 밥은 할머니가 기뻐하시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주 후 아주 추운 겨울 오후에 할머니가 사는 집에 앰뷸런스가 왔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할머니는 평안히 주무시듯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침대 곁에 있던 테이블 위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었는데 밥이 마지막 생일 선물로 할머니에게 주었던 시골 풍경이 그려져 있는 외로운 생일 카드 하나를 조용히 비추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변에 배우자를 잃고 가족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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