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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기서 해결하시지요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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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철 목사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렇지 않은 뜻에서든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뒤진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1784년 처음으로 증기 기관이 방적기를 돌리기 시작하며 시작된 산업 혁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사람들은 실 잣는 기술에서, 기계를 운용하는 사람이 그 시대의 적응자로 살아 남게 된다. 농업 기반의 사회가 산업 중심 사회로 바뀌며, 생산력의 증대와 도시가 팽창하면서 인간 사회의 혼란스런 격변기를 가져다 주게 된다.

그 뒤로 200년이 가까워 오던, 1981년 8월 12일에 8086과 함께 발표된 인텔 8088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택한 16비트 PC 5150이 판매 4개월만에 5만 여대가 팔리므로 본격적인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게 되고,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정보 홍수의 시대에, 정보의 생산자보다, 정보의 효율적 이용자가 이 시대에 적응하며 살아 남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또한 그 변화의 속도는 그 이전 어느 시대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급진적이어서, 과거 1000년의 변화보다, 최근 20년의 변화의 폭이 더욱 크다고 한다.

목사가 이런 말을 하면, 무슨 소리인가 하며 눈만 껌뻑이며 사시는 분이라면, 어쩌면, 변화하는 세상과 관계없이 내 식대로 사는 것이 최고라고 여기시는 매우 신념이 강한 분이던지, 아니면,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던지, 아니면 아예 뒤쳐지는 사람일 것이다.

그토록 큰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가 얻게 된 하나의 증상이 있다고 한다. 혹시 여러분들이 이러한 증상이 있다고 하면, 현대인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확실히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키며 우리의 감성을 혼란시키며 우리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억력을 둔화시킨다. 그리고 사고력을 감퇴시킨다. 때로 삶의 효율성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의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슬픔을 가중시키고 불안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으로 위험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신체의 메커니즘, 자기 방어현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고혈압, 심장마비, 위궤양, 불면증, 알코올중독 각종 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유형의 현대인들의 질병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80%이상의 원인 제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잘 관리하면 삶의 위대한 성취를 가능하게도 할 수가 있지만 잘못 관리하면 삶의 모든 성취를 한꺼번에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스트레스이다. 그것이 바로 스트레스다.

현대인들은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소위 여가의 문화를 그동안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만으로 인간은 근본적인 치유를 경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병원에 문을 노크하고 있다.
하지만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많고 다양한 영혼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의사 그리고 병원, 의료 이것은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정신 건강과 본질적인 영혼의 치유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특별한 치유자 한 분을 보내주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예수님은 이 천년 전 팔레스타인이라는 조그만 땅덩이에 가난과 그리고 정치적인 여러 혼란 속에서 시달리고 있었던, 소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던 그 당시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이런 말씀을 증거하셨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저는 이것이 이 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민중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아직도 유효한 약속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말한다. Good News 기쁜 소식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거리의 사람들, 여러분과 저에게도 유효하지 못한 약속이라면 오늘로 우리는 교회 문을 닫아야 한다.
그리고 저는 목회 할 필요도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유효한 약속이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는 존재한다.
자, 이런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안식, 진정한 자유, 진정한 행복의 처방은 있는가?

1.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인간에게 쉼이 필요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완전한 천지창조 후 인간을 만드시고 삶을 향유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창 3장에서 사단의 유혹으로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은 후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게 되었다.

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수고가 저주일 뿐,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죽음을 당케 된 인간들에게 노동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까지 우리의 삶이 지속될 수 있었겠는가? 축복인 노동이 우리의 죄 때문에 힘겹게 된 것일 뿐이다.
이후로 인간의 수고는 모든 이들의 고통과 힘겨운 삶의 투쟁이 되었다.

죄 때문에 우리에게 온 이 수고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죄의 해결 뿐이다.
바로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의 죄책을 사유해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시었고, 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만이 우리의 수고를 해결해 주실 유일한 분이시다.
그 분이 아니면 우리의 죄는 사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해결하실 주님께서 그 방법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내 멍에를 메라.

마 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흔히 예수가 청소년 시절에 목수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한 목수였다고만 말할 수 없다. 이는 헬라어로는 텍톤(tekton)이라고 불리웠는데 이 말은 일찌기 헬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호머가 "배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옛날 스코틀랜드의 시골에는 끌, 망치, 톱, 삼각자 따위의 연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서 집을 짓거나 다리를 놓거나 또는 책상이나 의자 따위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텍톤은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만들 수 있는 아주 숙련된 기술자였었다.  예수가 하신 일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소의 멍에를 가장 잘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집으로 소의 멍에를 사러 오는 사람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 영업집에서는 간판을 내걸어서 남을 불러들이는 일도 있었는데 아마 예수의 집 앞에는 소 멍에를 걸어 놓고 "나의 멍에는 아주 잘 맞는다"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가볍기 때문에 메기 쉽다는 말은 아니다. 신이 발에 잘 맞는다든지, 옷이 몸에 잘 맞는 것과 같이 멍에가 메기에 알맞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그런 배경을 생각하고 오늘 본문을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주님께 오면 멍에 메는 것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멍에 메는 일을 면제 받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동일하게 멍에를 메지만, 그 멍에는 잘 맞는 것이어서, 나에게 합당한 것이어서, 다른 표현으로, 내가 멜 만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우리는 죄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죽음의 무게를 지시고, 대신에 우리로 사랑하며,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감당할 만한 멍에를 메고서는 이렇게 하라 하신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데, 바로 그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내게 맞는, 감당할 만한 멍에를 메고 해야 할 것이, 바로 주님을 배우는 일인 것이다.
그 주님을 배울 때, 자의로 행하던, 소위 내 영광을 취하고, 내 삶의 안일을 위하여 살던 삶에서, 온유와 겸손하신 주님을 배워, 이제는 겸손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며, 이웃을 섬기며, 근본적인 삶의 변화와 회복의 자리로 들어 서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특별히 내일부터, 제3회 두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시작한다.

주제는 변화와 회복이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주님 앞에 나오시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해결 받으시고, 기도하며 주님을 배워, 여러분의 삶 속에 권능있는 주님의 자녀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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