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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의 방주 (창 6: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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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섭 목사

거룩하고 복된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여러분 위에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일들이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이맘때면 황사 바람이 심하게 불어와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서부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농토가 사막화 되어가고 건강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 인간들이 자초한 자업자득입니다. 공해를 비롯하여 자연을 돌보지 않고 함부로 다룬 인간들의 무책임이 재난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지난 4월 8일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참회가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이미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둔 분들로써 시간의 덧없음을 고백하며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못한 자신들의 찌그러진 인생을 고백하며 참회했습니다.
오전 7시 강변교회를 가득 메운 400여 목회자들은 이 엄숙한 죄책 고백을 아픈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않았던 자신들의 생을 함께 회개했습니다.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김창인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회와 목사들을 정죄하며 재건파에 참여하던 자신의 감추어진 과거를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한편 후계자 문제로 총회와 갈등을 일으킨 사실도 언급했습니다. 그는 “나의 신앙이 내 열정과 헌신의 결과로만 생각했을 뿐 하나님의 은혜로 늘 생각하지 못한 저였습니다. 귀신을 섬겼던 교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비난를 하고 심지어 밥을 함께 먹지 않을 정도로 그들에 대한 미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내 신앙을 드러내려는 교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부끄럽습니다” 고 참회했습니다.

뒤를 이은 강원용 목사는 개인적인 참회보다는 공적인 활동에 대한 반성을 주로 했습니다. 강 목사님은 지금까지 활동한 모든 것을 되돌아보니 하나님 중심의 일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일을 하는데 집중했다고 반성하면서 이제부터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온전해 지는 일을 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일일이 다 말하면 책 몇 권  로도 부족할 것이라며 말로 한다고 해도 5시간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천주교나 불교 등 다른 종교들과 대화하는데 더 열심을 내다보니 기독교 안에서 대화는 소홀히 했다면서 앞으로는 생명운동에 열심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상에 오른 조용기 목사는 70평생 살아온 뒤를 보니 남은 것은 ‘죄뿐’ 이라고 하시며 “썩어지는 구습을 버리지 못한 점을 다시 고백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본 훼퍼 목사님의 값싼 은혜에 비유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현실에 만족하며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점, 교리적으로는 흠 없이 살았지만 결국 사람 사랑과 사회 사랑을 외면하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죄책감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회악에 대해 침묵한 죄와 사회가 고통을 호소할 때 외면한 죄, 자연의 고통을 무시했던 죄들을 고백하면서 앞으로는 사회구원 사역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 값싼 은혜 속에 안주하는 것을 청산하도록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지도자들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대상이 심판의 대상으로 바뀌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 심판의 예고와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죄악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점점 벗어나므로 영적특권을 상실하자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노아와의 언약을 이행하시므로 죄악 된 자들과 함께 멸망 받지 않고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중단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배입니다. 22절에 보면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앉아계신 자리는 노아의 방주입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자리요, 오늘 우리가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 희망이며, 안전이며,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 밖에 있는 모든 코로 숨 쉬는 것들은 다 멸망을 받았습니다. 반드시 방주에 들어가야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지치고 피 흘리고 상한 심령들이 이곳에서 구원을 받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희망의 방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 째로, 방주는 세상 물결위에 떠 있어야합니다.

배의 기능이란 바다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 바다가 위험하다고 배가 육지에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위험해도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세상 물결이 배에 들어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타이타닉은 초호화 여객선이었습니다. 4만 6329톤이나 되며 길이가 272m나 되는 큰 배였습니다. '떠다니는 궁전'이라 불리울 정도로 모든 기계나 시설이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1912년 4월 14일 영국을 출발하여 미국 뉴욕으로 처녀 항해 중 어이없이 침몰하여 승객 2224명중 1515명이 수장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배에 물이 들어오면 위험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40일 동안 주야로 큰 비가 쏟아져 내려도 그리고 물이 다 걷히고 방주에서 나올 때까지 370일간을 지나는 동안 물 위에 떠 있으므로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내 삶에 풍랑이 있다고 할지라도 물이 배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배는 안전합니다. 그러나 물이 들어오면 안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험한 세상은 복잡하고 혼란하고 거센 물결이 쉬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이 배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풍습이나 세속이 내 삶속에 들어오면 배는 가라앉게 되어있습니다.

랑비 쉬몬 벤 요하이의 비유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배에 타고 있던 어떤 사람이 드릴로 자기 밑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동승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금 뭐하고 있는지요?” “당신이 알바 아니요. 나는 내 자리 밑에서 구멍을 뚫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사람들이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혼자 죽는 것이 아닙니다.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방주는 공동체입니다. 나 하나의 상실로 공동체 전체가 상실될 수 있습니다. 나 하나의 무너짐이 내 가정 전체가 무너짐이 될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며 방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기독교 신문에 실린 마귀의 파복이란 글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마귀의 팔복>
1. 너무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가장 믿을 만한 일꾼이 될 수 있음이요.
2. 목사의 흠이나 과오를 보고 트집만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 받지 못할 것임이요.
3. 자기 교회이면서도 나오라고 사정사정 하여야만 교회에 나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교회 안에서 말썽꾸러기가 될 것임이요.
4.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임이요.
5. 걸핏하면 삐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교회를 곧 그만 둘 것임이요.
6. 하나님의 일에 인색하여 헌금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일을 가장 잘 돕는 자일 것임이요.
7.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임이요.
8. 성경을 읽고 기도할 시간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꾀임에 쉽게 넘어가 마침내 조롱거리가 될 것임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신 차려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은혜 받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능력 받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의 꾀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는 아무리 위험해도 힘이 들어도 물 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

헤드 밀스라는 여인은 영국에서 인기 있는 모델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참 잘 나가던 23세에갑작스런 교통사고로 그만 한쪽 다리를 잃고 맙니다. 그렇지만 “내가 잃은 것은 다리 한쪽  뿐이다. 인생 전체를 잃은 것은 아니다” 라면서 조금도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장애를 통해서 자기 인생의 창고에 특별한 것들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제 그녀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에서 남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단 장애인 모임을 주도하고 크로아티아 전쟁 때는 의족 6천개를 보내는 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현재는 지뢰 반대 운동가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1996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리를 잃은 것은 물론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마치 인생 전체를 잃은 듯 절망하는 것은 잘못된 감정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슨 실수를 했을 때에 냉정하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다리 하나를 잃었으면 다리 하나만 잃은 것입니다. 다른 부분은 다 멀쩡합니다. 물질을 잃었으면 물질만 잃은 것이지 인생 전부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실수를 하면 그 한 가지만 실수한 것입니다. 인생 전체를 망친 것으로 잘못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주는 세상이라는 물 위에 떠 있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8 말씀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했습니다. 견고하게 신앙의 자리에 서 있으므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견고하게 서 있으므로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 째로, 방주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 18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너와는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심판하시되 창세기3:15 말씀처럼 여자의 후손으로 탄생한 거룩한 씨의 보존을 위해 노아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언약’ 이란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는 언약으로 은혜에 대한 약속입니다. 노아 홍수 당시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리 레번 이라고 하는 50대의 미국 해외특파원이 있습니다. 이 분은 레바논에서 취재를 하다가 회교도들에게 잡혀가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무신론자입니다. 이 사람이 감옥세서 독방생활을 했습니다. 사람이 제일 못 견디는 것이 독방 감금입니다. 독방에 가두어 놓으면 나중에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한다고 합니다. 대화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데 장기간 자기와 대화를 하다보면 정신이 나가 90%는 다 미쳐버린다고 합니다.
제리 레번이 자기와 한참 대화를 하다가 ‘아 이러다가는 내가 미쳐 버리겠구나’ 싶어서 자기 외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감옥 안에서 외롭게 혼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자기 아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분과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미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 분과 이야기를 하고 그 분을 생각하며 명상하기를 10일 정도 계속했습니다. 훗날 그가 고백하기를 자신이 고독하고 미칠 것 같았는데 어느 날 한 순간에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활짝 열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해쳤던 회교도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여 나를 해친 사람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 사람들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주님을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방주가 내게 복이 되려면 여기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은 심판이 아니며 평안과 소망입니다.

어느 종합병원에서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여의사 한 분이 대학생 시절부터 복용해 오던 마약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병원에서 사임하고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저녁 자기 집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는 호수로 가서 뛰어 내리려고 할 때 ‘죽기 전에 기도하라’는 세미한 음성이 갑자기 그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는 즉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오 하나님, 저를 구해주세요!”라는 짤막한 기도를 몇 번 반복했습니다. 짧은 기도였지만 그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절규였습니다. 잠시 후 어떤 손길이 그를 만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동안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움이 다 없어지고 온 몸이 날듯이 가벼워 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마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뻐서 집으로 돌아와 새 삶 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의사는 절망에서 심판의 하나님이 아닌 구원의 하나님을, 그를 위해 새 삶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새로운 자기는 하나님과 화해되고, 용서되고, 치유된 건강한 자기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과감히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덧입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방주가 희망이 되는 것은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주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느끼고 그 분과 하나 되므로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째로, 이 방주는 희망을 주는 방주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보면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창문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창문은 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나온 말 가운데 낙바생 이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려우니까 별 희한한 말이 다 만들어졌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듯 취업문을 뚫은 재학생이란 말입니다. 이 시대의 폭풍입니다. 또 한 가지 마음 아픈 일은 최근 들어 사회공포증 환자들이 는다고 합니다. 취업실패, 사업실패를 비롯하여 직장에서 업무가 과중하여 대인기피증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창문을 위에다 만들라고 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1. 사람을 쳐다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2:5에 보면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홍수가 있기 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물 심판에 대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창문 밖에는 물살에 휩쓸려 죽어가는 불순종한 사람들의 모습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멸망 받을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라! 는 것입니다. 때 늦게 후회하는 삶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 늦게 후회 할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일시에 잘 되는 것 같지만 그들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멸망당한 자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2. 험한 파도를 쳐다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오랜 시간 물위에 떠다녔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창문으로 옆을 볼 수 있었다면 노아는 많은 물이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을 뒤덮은 물과 파도를 보면서 노아는 두려움과 공포에 쌓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에게 두려워하지 않도록 창문을 위에다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가 평안히 방주에 있을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밖을 보지 않고 앞으로 있을 것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려움만 바라보지 말고 소망의 주요, 피난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분명 방주 밖의 파도와 물결처럼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 직장에서의 문제, 행여 교회에서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어려움만 바라보지 말고 소망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우리의 피난처이신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한 때 유명한 연예인이었고,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실력파 연기자였던 손창호 씨가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후 TV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연기자로서가 아니라 “병원24시”라는 프로그램에 행려병자의 모습으로 였습니다. 이미 발은 동상에 걸려 절단할 위험에 있었고 얼굴은 술독으로 퉁퉁 부어 보기에도 죽음을 직감할 정도로 위험해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램에서 기자와 대화하던 중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또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우리가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 기억되어진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생명이요 희망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희망의 방주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물결 위에 떠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희망 주는 방주가 되어야합니다. 바라옵기는 오늘도 험한 세상 속에서 우리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희망의 역사들이 온 성도들의 삶 속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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