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위원회 헌신예배]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 (히 11:24-28)

  • 잡초 잡초
  • 444
  • 0

첨부 1


- 설교 : 황영복 목사

히브리서 11장을 우리는 흔히 “믿음의 장”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정의하면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에녹이 어떻게 믿음으 로 살고, 노아가 어떻게 믿음으로 살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가 어떻게 믿음 으로 살았는지 말합니다. 이제 모세는 지도자로써 어떻게 귀한 사명을 감당하였는지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 각 위우너회 위우너장들과 기관장들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모세는 영웅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태어나서 생명 을 보존한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가 사막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것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의 통치자 바로와 싸우면서 출애굽하는 장면은 얼마나 위대한 드라마입니까?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했습니다.

그의 비스가산에서의 죽음은 얼마나 신비스럽습니까? 그의 시체는 하나님에 의해 감추어져서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종, 느 10:29, 대하24:9, 대상6:49, 계15:3, 단9:11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질 수 있는 모든 이름 가운데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칭호입니까?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정한 친구와 친교하듯이 모세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하나님과 대면하여 아시던자 - 신 34:10 모세를 향하여).

그러나 반대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 동안 자기들이 주님을 잘 안다고 하였는데 주님께서는 도무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큰 비극이요. 불행한 장면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잘 안다고 고백했는데 주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출애굽기 33장에 ?하나님은 모세를 대면해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34장 10절을 보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라고, 역사상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다시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이 위대한 지도자로써 부끄럽지 아니한 삶을 산 비결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 영광을 얻기위해 수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모세에게 있어서 본문이 교훈하는 믿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모세와 같은 각부위원회 위원장이 가져야 될 믿음은 어떤 믿음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쓰시겠습니까?

1. 거절할 것을 거절하는 것이 믿음입니다(24절).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본문 24절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가 "거절하고"라는 단어라면, 25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더 좋아하고"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에서 자주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더 좋은 선택, 보다 나은 선택을 위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포기하고 거절할 필요를 만나게 됩니다. 모세가 거절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였습니다. 모든 명예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집착하는 명예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명예는 우상이 됩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의 도를 가르치면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고 말씀하십니다.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모, 처자, 형제 자매, 그리고 자기자신 보다 더 소중한 애정의 대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느낄수록 이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은 더 소중한 분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들에 대한 사랑에 빠져 이들을 주신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도 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시험하신 이유가 아닙니까! 모세에게 자기를 길러준 바로의 공주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었습니까?

그러나 그녀가 소중하다고 느낄수록 그녀를 만나게 하시고 그녀의 아들로 자기를 자라나게 하신 섭리의 하나님은 더 소중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맡기시는 사명을 위해 이제는 바로의 공주의 품을 떠날 때가 된 것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라는 존재가 혹은 공주의 아들로서 자기에게도 돌아올 수 있었던 왕권이 그의 우상이 되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의 궁중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명예를 거절하였기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포기하고 버려야 할 우상은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과 저도 우리가 움켜잡은 보잘것없는 그것들(우상들) 때문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더 좋은 선물을 받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손을 놓으십시오. 그래야 자유합니다. 포기할 줄 알아야 더 좋은 것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포기할 것을 포기할 줄 알고, 거절할 것을 거절할 줄 아는 것입니다.

25절-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기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절-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2. 선택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25절-26절).

거절한다는 것이 소극적 차원이라면 선택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절은 거절을 위한 거절이 아니라, 선택을 위한 거절인 것입니다. 거절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선택에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그러면 무엇을 선택하였습니까?

본문 25절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선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26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고난받기로 선택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능욕의 선택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살기로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산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매우중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산다거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위해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해 산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모세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그에게 분명한 가치관이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이상 하나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가가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깨우쳐 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그의 백성들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위로하고 섬기는 일에 기꺼이 자신의 생애를 드리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일이 애굽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가치관을 보려면 그의 선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기업하시는 분들도 기업의 비전과 핵심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돈벌기 위한 기업은 존재할 가치가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로또 복권에 이 나라 직장인의 절반 이상이 참여했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이 땅의 백성들이 가치관을 상실하고 있다는 징후가 아니겠습니까? 한탕 잡는 것-그것 밖에는 인생의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사람들은 가치있는 인생을 살기보다 죄 짓는 인생을 살기로 선택하는 것일까요? 본문 25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답이 있습니다. 죄에는 낙이 있습니다. 곧 쾌락이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죄짓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낙은 잠시 잠간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잠간의 쾌락이 지나가면 죄는 반드시 우리에게 대가를 받아냅니다. 그 대가는 심판이요, 영원한 파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잠시의 죄의 낙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고난과 보람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속에서 만나게 되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기르시기도 하고 그 고난의 배후에서 언제나 하나님은 큰 뜻을 가지시고 우리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애굽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고난의 길로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늘 같이 하셨어요. 모세를 늘 지켜주시고 결국에는 모세를 들어 쓰셔서 잠간의 영광을 버린 이 모세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시고, 애굽의 영광을 버린 모세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주시고, 공주의 아들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고, 바로의 궁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온 인류 역사에 최대의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어 주신거에요. 그것이 바로 짧은 고난, 잠간의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그렇게 모세를 길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당하는 이 모든 고난은 여러분들을 귀하게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줄로 믿어야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어야 우리의 성격과 인격이 다듬어지고, 하나님 앞에는 순종하는 삶이 되고, 의지하고 믿는 삶이 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도 만듭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에 무엇을 우선하는지 삶의 우선순서를 정하는 지혜를 배우게 해줍니다. 그래서 군대가서 고생과 고난이 있어야 부모가 귀한 줄도 알게 되고 가족이 귀하고 교회가 귀한줄 알게되지 않습니까?

건강을 잃어봐야 건강이 귀하고, 몸이 아파 보아야 아픈 사람의 고통이 눈에 들어옵니다. 물질의 어려움이 있어야 물질의 귀함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순전하고 깨끗ㅏㄴ 믿음을 갖도록 회개하도록 도와 줍니다. 그래서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단장하는 것도 고난의 과정을 통과할때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더욱 크게 스시려고 오히려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주셨고,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사랑하셨지만 쉽게 기르시지를 아니하셨습니다.

모세는 짧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궁중 40년의 준비와 광야 40년의 그 고난이, 이스라엘을 수 십만(200만)의 그 군중을 이끌고 나오는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고난을 피하려고 하고 고난이 있으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또 고난 당할 때 누가 이럴 때 좀 도와 주면 얼마나 좋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은 혼자 당해보아야지 나의 인격 성장과 믿음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빨리 지나가면 연단이 적은 금은 순금에 불순물이 덜 정제된 것처럼 가치가 없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은 더군다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실수가??없는 것입니다.

* 영국의 어떤 학자 한 분은 누에고치 속에서 벌레가 고치를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며 나오는 걸 보고 너무 불쌍해서 그걸 잘라 주었답니다. 여러분 고치가 얼마나 단단합니까. 우리말로는 그걸 명주라 하고 요사이는 실크라 하지않습니까. 제일 단단합니다. 칼로도 잘 안 잘라지는 걸 그 약한 벌레가 뚫고 나오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몸부림을 치는 걸 그걸 잘라 주었답니다. 그런데 나와서 며칠도 못되서 날지도 못하고 결국 죽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의 이 어리석은 자비심이 한 생명을 죽게 했으며, 나비의 꿈을 빼앗아 버렸다" 고 말했답니다.

도와 준 것이 결국 못 쓰게 만드는 것이 되었습니다.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이 그게 사랑하고 도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이겨내도록,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이 세상을 훨훨 날 수 있는, 어떤 고난에도 날아다닐 수 있는 힘 있는 자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날개는 언제 만들어지느냐? 그 안에서 몸부림을 칠 때에 날개에 힘이 생긴다는 겁니다.

목회나 교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을 대상으로 구제하다보면 인간적인 자비심과 긍휼은 교인들을 날지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인들에 대한 지나친 애정, 지나치게 불쌍히 여기는 것 때문에 교인을 위대한 십자가의 정병으로 못 기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그대로 두고 일어서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울 만큼 울어야 되고. 땀을 흘릴 만큼 흘려야 되고. 괴롭고 외로운 것을 당할 만큼 다 만나야 만이 우리가 큰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으로 운영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반회사(기업체) 보다도 교회를 맡아 보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겁니다. 일반회사는 돈이 있고, 조직이 있고, 기계를 가지고 하는데 교회는 기계로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조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가지고 운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의 학교를 거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으로 이 교회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대가 밥 맛도 없고 살 맛도 없어서 부정적이고 절망으로, 타락으로 가는 것은 고난이 없어서입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나서도 이렇게 슬프게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고난을 모르고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녀에게는 오히려 큰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모세는 고난 중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상 주심을 바라보았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버린 것은 애굽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리시는 축복을 바라 본 것입니다. 각위원회 위원장과 성도 여러분은 앞날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상주심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26절).

모세는 어떤 가치관을 가졌기에 세상사람들이 다 원하고 부러워하고 놓기를 싫어하는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받는 어려움의 자리로 찾아가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더 큰 영광의 보화로 생각했습니까 이는 그가 인생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영원(영생과 부활이 있음)하다는 관점에서 믿음의 눈으로 인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민족을 위하여 능욕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상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위대한 결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상급이 당장 우리 눈앞에 찾아오지 않다고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 상급을 기대합시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7절을 보십시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고 바로왕에게 요구했습니다. 바로는 몇 번을 가게 한다고 했다가 못가게 하고 모세와 팽팽한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리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애굽땅에 재앙을 내리시므로 바로의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을 누그러뜨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게 하였습니다.

본문에 여겼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분명한 가치관에 의해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믿은 후 잃은 것이 많습니다.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로 장차 일국의 왕이 될 수도 있는 특권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재물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으나 이것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여겼다 는 말은 그렇게 간주했다, 평가했다 는 말입니다. 이 분명한 가치관에 의한 삶이 모세를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모세에게는 분명한 삶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한 가치가 있는 삶을 선택하고 후회하 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는 다니지만 가치관의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가 달라지지 않 고 세상을 향하여 어떤 메시지를 선포하겠습니까? 주님이 정말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변화됩니 다.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값 없이 됩니다. 모세가 이 고귀한 가치를 생각하니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란 명예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재물도 쾌락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새 삶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200만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우리들도 나와 가족, 이웃, 성도, 우리 기관원, 구역원, 소속된 위원들, 나라, 세계 사랑하는 마음있게 하소서., 모세의 마음을 주옵소서라ㅗ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한 사건이 출애굽기 32장 30절-35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신다고 하니...모세가 3천명 가량(28절) 사람을 죽이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주여...저에게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러한 기도를 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33절-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세의 이 위대한 결단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7장 23절에 보면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함과 하나님이 자기를 통하여 그의 민족을 해방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과 저것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더구나 믿음으로 모세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가 명예와 보화, 그리고 쾌락을 버린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민족을 위하여 능욕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이 믿음이 위대한 결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4. 애굽을 온전히 떠나는 것이 믿음입니다(27절).

27절-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주일을 어기면서까지 잘 살아보려는 마음, 돈을 버는 마음과 행동들, 공부하는 것, 오락과 스포츠를 즐기는 것. 일하는 것. 이럭한 것에서 완전히 떠납시다)

애굽을 떠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자유를 의미했고, 새로운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만의 자유, 자신만의 구원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자유, 전체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왕 앞에 나타나 "내 백성으로 가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때부터 모세와 바로의 흥미진진한 대결이 진행됩니다. 더 이상 이 백성을 애굽 땅에 붙들어 둘 수 없다고 판단한 바로는 한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이 전략은 몇 단계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우리는 이런 바로의 전략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온전한 자유를 방해하는 사단 마귀의 전형적인 작전을 간파하게 됩니다.

먼저 출애굽기 8:25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합니다. 가기는 가되 이 땅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자신의 영역 안에만 우리가 머물러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까지는 내가 허락하겠는데 아직은 나의 통치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불가하다고 하자 바로가 또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출애굽기 8:28에 보면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통치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작전인 것입니다. 모세가 불가하다고 하자 다시 새로운 작전이 펼쳐집니다.

출애굽기 10:11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고 합니다.

가기는 가되 어린것들은 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중국 같은 곳에서 진행되는 기독교 탄압정책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중국에서 어느 정도 성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가 있어도 청소년에게 전도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됩니다. 청소년이 넘어가면 공산주의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사단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너희는 믿지만 너희 자녀는 내게 맡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다시 불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마지막 작전이 시작됩니다.

출10:24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고 말합니다.

물질과 재산은 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끝까지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이 바로 동일한 작전인 것을 아십니까? "믿기는 믿되 재물까지 헌신할 생각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끝까지 집착하는 물질에 대한 헌신없이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저는 신앙생활과 목회생활 중에 제 주변에서 물질에 대한 헌신없이 한 사람의 믿음과 인격이 온전하게 성장한 사례를 단 한 건도 보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어떻게 대답합니까?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출10:25-26)라고 대답합니다. 내 물질까지도 더 이상 사단을 위해서는 한 푼도 사용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자유요, 온전한 헌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을 떠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만이 진정한 자유, 진정한 헌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습니다.

당신과 나도 과연 믿음으로 우리의 애굽을 떠날 수 있을까요?

5. 사람과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지도자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27절).

사람과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워할 존재를 두려워하므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의 애굽의 통치자 바로(임금)는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아니 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통치권을 행사했고 그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감히 바로와 맞서서 싸우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용기입니까? 그러나 주목할 것은 모세가 본래부터 타고난 배짱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처음 애굽의 궁중을 떠나 미디안 사막으로 갈 때 왜 그렇게 한 줄 아십니까?

출2:14에 보면 "모세가 두려워하여"라고 기록합니다. 모세는 바로를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본문 27절에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했습니다. 마침내 무서움 곧 두려움을 극복한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인생을 살아갑니다.

무서워 시리즈가 있습니다.??오죽하면 무서워 시리즈라는 유머가 한때 유행했겠습니까?

당신이 무서운 사람은 무서워 유(영어로 You)
남자가 무서운 사람은 무섭군
여자가 무서운 사람은 무서운 걸
만두 먹고 체한 사람은 무섭지만~두
국수 사리 먹고 체한 사람은 무섭사리
비를 처량맞은 사람은 무섭지 비
세상 모든 것이 다 무서운 사람은 무섭다고 한답니다.

그러니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그 대답이 하나라고 말합니다.

27절-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6.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27절).

모세가 온갖 역경과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하여 참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신뢰하는 것(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믿음을 통해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합시다.

시편 56편 3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히브리서 13장 6 절-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이사야 12장 2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지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면 사람과 환경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모세의 시선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아마 모세가 바로왕을 보았더라면 절망했을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원망하고 짜증내는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만 보았더라면 그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실망과 좌절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 기억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실망과 낙담에 빠지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힘을 얻어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올라가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달려가도 고단치 않습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의 군대만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홍해의 넘실거리는 파도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7.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구원의 방편을 보여 주십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구원의 방편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보여 주셔도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결정적으로 애굽 땅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은 바로에게 마지막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것이 애굽 땅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을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처음 난 짐승들이 그리고 모든 집의 처음 아들들 곧 장자들이 심판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의 후계자인 바로의 맏아들에 대한 심판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심판을 경험하면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비로소 해방할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운데서 이스라엘 집안의 장자들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한 방편을 허락하십니다. 속죄의 양을 잡아 양의 피를 문 인방(꼭대기)과 문설주 좌우에 뿌리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의 천사가 그 집을 넘어가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유월절(Pass-over)예식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 사건의 핵심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곧 그의 피 흘림과 피 뿌림이 있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피 흘림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미하며, 피 뿌림의 의미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바울사도는 먼 훗날 이 유월절 양이 오늘의 성도들에게는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유월절의 행사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뚜렷하고 엄숙한 제도이고,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그리스도 였습니다. 요한 복음에는 사도요한은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는데 세례요한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주님, 세례를 받으려고 자기에게 오시는 주님을 보면서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증거했습니다. 이 증거가 참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흠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흠없고 점 없으신 어린 양으로 베드로 전서 1:19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5:7을 읽어보십시오."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속죄양이 되시사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받을 심판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 곧 피흘리심은 우리의 속죄의 근거가 되셨습니다. 히9:22에 "피 흘리심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피흘림 보다도 피 뿌림을 더 강조합니다.

피 흘림이 속죄의 근거라면 피 뿌림은 속죄의 적용입니다. 첫 유월절에 하나님의 명을 따라 어린 양이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흘려진 피를 개개인의 집집마다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전서1:2에 보면 성도들을 가리켜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속죄의 근거가 되었지만. 피 뿌림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개개인이 마음속에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 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집의 장자를 구원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뿌려진 피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마음의 문설주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고 그분을 받아 드리셨는지요?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고 말합니다.

오늘 구원을 얻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다시 언급하고 다시 이 은혜를 새기는 것은 이 구원의 확신 영생의 확신, 사죄의 확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원은 얻었으나 항상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하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3장 17-18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구원의 주님으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믿는 것 뿐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셨으나 믿는 자만 구원을 얻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자만 구원을 얻었듯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 거하는 자, 믿음을 가지는 자만 구원 얻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영생에 들어갔으나 아직도 구원을 얻은 사람 가운데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과 심판의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세상의 소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심령에 감사와 평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죄 용서함의 사죄의 확신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역사하지만, 마귀와 싸워 승리할 승리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유월절과 피 뿌림을 믿어 구원을 얻었던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이 우리의 근거가 됨을 믿음으로 구원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따라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한 채 사막을 헤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헤매어도 결국 그 사막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동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막에 어디에 오아시스가 있는지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가지 않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출40:16에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행하였더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믿음으로 행동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 위원장들고 성도 여러문들이 이러한 믿음으로 승리하며,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