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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동하는 믿음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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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영복 목사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5.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야고보가 1세기의 초대교회 성도들을 '형제' 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 역시 주안에서 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형제 자매' 라고 부릅니다.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로 모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가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보낸 이 편지는 1세기의 성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민족과 혈통을 초월하여 예수 안에서 한가족이 된 오늘 우리를 향해 주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행동하는 믿음' 이라는 큰 주제 아래 신앙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다루면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 고 말하는 사람들의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이 과연 입술로부터 나오는 선언으로만 충분한 것인지 그래서 내가 신앙공동체 안에 들어와 '나는 믿네' 노래하고, '믿습니다 아멘' 하고 복창하기만 하면 나의 삶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나의 구원은 보장된 것인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야고보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 단호하게 '아니오' 라고 말합니다.

신앙고백에 따른 행동이 없고 말만 앞세우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고보 시대와 오늘이 2천년이라는 긴 시간의 간격이 있지만 그 시대의 성도들이 사는 모습이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본문 20절에서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탄식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왼발로 노트를 누루며, 왼손으로 써야하는 시, 인고의 고통으로만이 낳는 아이처럼 온몸이 부서질 듯한 아픔으로 한편의 시를 태어나게 하는 지체장애자 손명희씨의 11번째 시집(1988.12.30). ‘그 하나님이 '에 실려 있는 시 “ 믿음은”이란 제목의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믿음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믿음이라

믿음은 보이는 표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증거라

믿음이 없는 행함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한 채 사막을 헤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헤매어도 결국 그 사막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동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막에 어디에 오아시스가 있는지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가지 않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클레이’ 박사가 어느 흑인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그 집회에 은혜를 받은듯한 한 부인이 일어나 간증을 하는데 “신앙이란 참 좋은 것입니다”
“신앙으로부터 받은 안위가 참으로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하여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클레이 박사는 “참 보기 좋습니다”라고 말한 후 “그런데 받은 은혜를 실행하는 면에서는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은혜 받은 후에 부인은 남편을 위해 보다 좋은 음식을 많이 준비하게 되었습니까? 가정에서 친절하고 어진 분이 되었습니까?”하고 물었답니다.

바로 그때 바클레이 목사님의 뒤에서 “목사님, 묻는 것 좀 그만 두어 주세요, 그는 제 아내입니다”라고 간절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클레이 박사는 그 소리가 그 교회 전도사님의 소리임을 알고 더 이상 묻기를 끝내었답니다. 전도사님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 전도사의 이야기를 통해 아내는 말과 행동이 실제로는 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로는 그렇지만 실제 그 받은 은혜와 말씀이 신앙으로 생활화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성도들 가운데 간혹 있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와 같이 잘하지만 실제로 말씀이 생활화 되지 못해서 도리어 교회에, 가정에, 직장에서, 불신자들에게까지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 실천으로 생활화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된 신앙과 믿음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화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믿음으로 예배하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에게 실천하는 신앙,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의 열매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벗이라 불러주신 그 놀라운 칭찬과 평안이 넘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은 기독교인들만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도 믿음의 관계이고 믿음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이 없이는 물 한 잔 마시거나, 밥 한그릇을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아프다고 할지라도 약을 사 먹을 수도 없고, 의사에게 귀한 내 몸을 믿고 어떻게 맡길 수있겠습니가? 생명같이 귀중한 피땀어린 돈을 은행에다가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믿고, 아내가 남편을 믿고, 이웃과 이웃, 친구와 친구, 스승과 제자, 나라와 백성, 이 모든 관계는 믿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말도 믿을 수 없으면 아무리 꾀꼬리 같고, 청산유수 같고, 주옥 같은 말이라도 그 의미를 모두 잃어버리고 맙니다.

믿음은 신뢰요, 확신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추종하는 하는 것을 보면 확신이 있기 때문이고, 실천하는 것이 신뢰하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런 이런 세상적인 믿음 위에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신령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신령한 선물인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생겨집니다. 이 성경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진리영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믿어지는데 이것은 놀랍고도 신령한 하난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따라서 이 성경 말씀을 믿는 것이 성도의 증거요, 구원받은 표인 것입니다.

1. 믿음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단어는 히브리 말로 ‘에문’인데 이 말은 ‘아멘’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말은 ‘참, 진실하다, 확신한다, 과연 그러하다는 응답, 안정, 견고’등의 뜻을 갖고있습니다. 신약의 헬라말로‘피스티스’인데 ‘신실, 충실하다, 안정되다, 견고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진실되게 믿는 마음, 흔들림이 없는 신뢰하는 신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소망, 사랑과 함께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믿음은 능력의 원천이며(막9:23), 믿음으로 의인이 되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마도 신뢰, 믿음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고, 믿음이 없는 곳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서양속담에 보면 두려움이 집에 찾아와서 노크를 하는데 믿음이 대답하기를“지금 여기는 아무도 없다”라고 대답하여 믿음이 두려움을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믿음은 인생의 힘이다”고 말했습니다.

G.맥도날드는 “완전한 믿음은 공포를 절대적으로 벗어나게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 생활에 활력소가 되므로 가정에도 믿음이 필요하고, 사회에도 서로의 믿음을 통해서 평화를 누릴 수 있고, 교회도 각자의 믿음을 통해서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국에 잠시 연구차 머물고 있던 모 대학교수가 책이 필요해서 영국 어느 도서관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 도서관에는 출입증명서가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에서는 대학교수에게만은 도서관 출입이 제한 없이 허용되어 있다는 규정을 들은 그 교수는 사무원에게 자기를 소개하고 출입을 요청했습니다.“나는 대학교 교수입니다”직원이“당신이 대학교수라는 증명서가 있습니까?”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현재 아무대학 교수입니다”

“증명서는 아니더라도 당신이 대학교수임을 밝힐만한 무슨 증빙서류라도 가진 것이 없습니까?”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엄연히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그러자 사무원은 그 말만 듣고서 처음보는 이 한국인에게 출입증명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즉석에서 믿어주는 그 사람이 무척 고마웠다고 합니다. 그러니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서로가 말 한마디로 믿어 주는 사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것을 제일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인간 상호간에 최소한의 믿음이 없다면 이 땅에는 평화가 파괴되고, 싸움과 다툼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믿고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나간다면 이 사회는 맑고 밝은 정의로운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란 우리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물의 기초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일반적인 믿음과 신령한 믿음, 좀 더 어렵게 말하면 자연적인 믿음과 초자연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믿음이란 인간 스스로 믿는 세상에 신뢰를 두고 이루어지는 관계속에서 필요한 믿음을 말하며, 초자연적인 믿음이란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을 말합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한 믿음의 선물로 가능해 지는 사건이요. 나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를 초자연적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해서 굳건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고, 믿음을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저 맹목적인 것이 아니며, 반드시 믿음에 대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대상은 의심할 수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약속해주시고, 계시해 주신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가감없이 신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아는 것입니다.

옛말에 알아야 면장한다는 말이 있듯이 우선 알아야 믿어도 믿는 것이지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진리와 복음을 듣고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가 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가를 알아야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참된 믿음을 배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믿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면 깨달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마련입니다. 또한 회개하여 마음이 청결하여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어지게 마련입니다. 말씀이 믿어지지 아니하면 나의 불신과 죄를 회개하여 깨끗한 그릇이 되도록 하여 진리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나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어야 여기에 말씀의 생명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3)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단순히 머리로 알고 머리로만 그렇다고 믿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범사에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지 혹은 신뢰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길 때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신앙이 생겨지게 됩니다. 본문 21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 그러면 믿음이 왜 필요합니까?

1) 믿음은 인생의 승리를 보장해 줍니다.(21~25)

본문 21~24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믿음은 행함있는 신앙이 되도록 확신과 능력을 공급하여 줍니다.??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려도 살려 주실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으며, 자신의 후사로 이어 주실것을 확신하여 모리아 산에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제물로 바치려는 행합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가지고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고 하시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으로 수풀에 걸린 수양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인정하시고, 여호와 이레의 복을 주시며, 복의 근원이 되게하셨습니다.

25절에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이 멸절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으며, 이방 여인이었으나 믿음으로 붉은 줄의 징표가 이는 방에 모든 가족을 있게하여 약속대로 자신과 가족을 구원하는 복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는 약속이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라합에게 성취되었습니다.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인 인간이 준행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성도는 적어도 약속과 성취를 통해 변함없으신 분임을 알려 주었고, 그 아들을 보내어 주사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 주셨습니다. 역사속에 이루어진 역사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함으로 섬기며 사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 사명입니다. 불순종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부름을 따라 열심히 헌신하고 온힘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감 당하는 것입니다.

3) 우리를 넘어 뜨리려는 마귀의 행동을 방어하는 가장 바람직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는 사탄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4)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요일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되 기브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과 행함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행함만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5)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로 부터 응답을 받게 되므로 믿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살 때 지혜가 필료하면 믿음으로 지혜를 구하면 허락해 주시고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6) 믿음은 사랑과 소망으로 연합하여 가치가 있는 결과를 만들어 줍니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은 거짓에 불과하나 서로의 믿음을 바탕으로 사랑할 때 비로서 온전한 사랑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와같이 믿음을 생각할 때 과연 나의 믿음이 진실된 것인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일까? 다시 한번더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니시는 곳마다 많은 병자를 고치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축복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특히 기적을 행하시는 그 과정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의 행위를 요청였습니다.

마가복음 7:26절에 나오는 ‘수로보니게’여인은 인내하는 믿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실 것을 믿고 구하였지만 처음에는 물리쳤다가 물러나지 아니하는 믿음을 통해서 딸의 병을 고치는 응답을 받았으며, 백부장은 겸허한 복종의 믿음, 주님이 말씀만 하셔도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라는 확신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 하인이 치료받는 응답을 받아 병을 고쳤으며, 소경은 간절한 믿음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제자들의 만류에도 주님에게 전전으로 의지하며 부르짖으며 나아가다가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경말씀에 기록한 모든 사건과 은총과 축복은 행동하는 믿음을 통해서 응답과 증거의 열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5: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육신의 병도 고침받아서 영육간에 건강과 장수의 축복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20절에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고 말합니다. 율법을 행치아니하는 기도는 가증하다고 했습니다. 행함있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 인정받은 축복,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고, 기생 라합은 그자신과 가족들을 구원시킨 것처럼 행함이 따르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다가 영육간의 문제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응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어떤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까?

1) 죽은 믿음과 산 믿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로 믿음의 종류를 말씀하시기를, 길가와 같은 믿음,??돌짝밭과 같은 믿음, 가시떨기 같은 믿음, 좋은 땅에 떨어진 믿음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후에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결실을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어찌보면 다 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죽은 믿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는 삶의 방향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나며 그 결과도 다릅니다. 본문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귀신들도 믿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이기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살아 있는 행함있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마태복음 17:20절에“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겨자씨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 즉, 살아있는 신앙, 실천하는 믿음,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똑같이 교회생활 하면서 똑같은 시간에 설교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어도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하여 발전하고 성장하지만,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성장이 없는 것과 같이 아무런 발전이 없으며, 영적인 앉은 뱅이 처럼 언제나 정지상태이며, 오히려??때로는 사명을 감당해야 될 자리에서 뒷걸음질 치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은 우리에게는 나타나는 믿음의 힘이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됩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살아있는는 믿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행동으로 보여준 아브라함과 라합처럼 살아 있는 믿음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이며 사상가로 1915년에 “쟝,크리스토프”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로망롤랑’은 “그대는 믿지 않고는 살지 못하리라 각자가 믿고 있는 것을다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살아있는 믿음이 부족하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2) 의심하는 믿음과 확신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22절에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나아와 “주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바로 그럴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자세, 이러한 믿음이 의심하는 믿음이요, 미지근한 믿음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할 수 있거든”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에는 주님의 책망을 받고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처음 그의 믿음은 “할 수 있거든”하는 의심의 믿음이 였다면 이제는 그의 믿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확신합니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믿었더니 영적으로 높이 성장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마음 속으로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할 때 역사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3)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이 있습니다.

작은 믿음이란 매사에 염려하는 믿음이요, 무서워하는 믿음이요,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 믿음이요, 연약한 믿음이요, 의심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큰 믿음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처럼 소원대로 되는 것을 믿고, 제자들이 만ㄹ해도, 짐승 취급을 받아도,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받아야만 한다는 자세로 끝까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퀠른’에 있는 한 감방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비록 그것이 빛나고 있지 않더라도 나는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비록 내가 그것을 느낄 수 없다해도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라는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감각적인 생활에 깊이 젖어있어서,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 내가 만지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우리는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든는 감각적인 것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왜?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애써야 합니까?

우리는 이 영적인 큰 믿음에 의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얻고,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믿음을 통해서 법적으로 의로워집니다. 믿음을 통해서 가족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하게 되며, 믿음을 통해서 전적인 은총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믿음을 통해서 지속적인 평강과 안식을 얻으며, 믿음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며, 믿음으로 소속이 천국시민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4) 행하는 믿음과 행치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산 믿음은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내 믿음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됐지 꼭 드러내어 표시해야 하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증명하는데 아무런 거침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믿음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19절에 “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어떤 면에서는 귀신들의 믿음이 죽은 믿음보다 더 앞섭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 앞에서 떱니다. 닥쳐올 진노를 정말 무서워합니다(눅8:31). 그런데 머리로만 믿고 가슴과 손발로 그 믿음을 나타내지 않는 죽은 믿음은 입으로만 믿음을 말하고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듯 세상 속에 파묻혀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본문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절에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먼저 행치 않은 믿음이란 머리로만 생각하고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성경은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하고 잇습니다.

반면에 행동하는 믿음, 행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구원받았음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일을 위하여 헌신하며,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여 자신도 남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삶, 사랑으로 행하며, 사랑을 말하고, 훗날에 심판받을 것을 기억하며 , 하나님께 충성하며, 교회를 섬기며, 사명에 최선을 다하며, 두려움으로 나보다 남을 더 낫게여기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말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진실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옛말에 ‘신심직행’(信心直行)이란 말이 있습니다“즉, 믿는 마음만 있으면 바로 집행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믿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실천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실천해야만 합니다. 행함은 축복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내 몸과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충성할 때 주님께서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채워 주시고 풍성한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축복 받기 위해서라기 보다 이미 구원 받은 은혜를 기억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는 보은의 삶이 마땅한 줄로 믿습니다.

탐험가 ‘콜럼부스’는 1451년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가난한 옷감짜는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탐험의 큰 공적을 세우고 150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콜럼부스의 인기가 너무 좋아지자 시기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하루는“당신이 이번 탐험을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꼭 다른 사람이 했을 것이니 그리대견스러운 일이 아니지 않소”하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콜럼부스’는 아무 말없이 듣고 있다가 테이블 위에 있는 달걀을 보고 그 달걀을 집어 들어“여기 어느 분이 달걀을 책상 위에 똑바로 세울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자 이 사람 저 사람 달걀을 세우려고 했으나 아무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달걀을 들어 한쪽을 깨뜨려서 평평하게 한 다음 책상 위에 세워 보였습니다.”“이렇게 하면 누구나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하지 않았을 때 그것을 생각해 내고 맨 먼저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생각하고 있고 마음 속에 소원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먼저 그것을 실천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과 마음의 뜻을 받들어서, 행동하는 신앙으로 아브라함 처럼, 기생 라합처럼 복의 근원이 됩시다. 내가 먼저 좋은 일을 하고 선을 베풀고 착한 일을 하여야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제는 믿음으로 행합시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믿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알고 있으면 어디에 씁니까? 알고 있고 믿고 있더라도 실천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또 한 사람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라합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들어 온 히브리인 정탐군들을 자기 집 지붕에 숨겨 살려 준 것은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홍해를 마른땅같이 건너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정탐군을 숨겨주면 나중에 자신과 자기 온 가족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생명을 걸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먼 훗날 다윗 가문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내 목숨을 걸만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십니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 내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을 각오하며 믿음생활 할 수 있어야 산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을 믿는 종교입니다. 어제 진 해가 오늘 아침 다시 뜨는 것이나, 이 우주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이 시간 제가 이 자리에 서서 설교하고 있다는 것도, 여러분이 그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도 어찌보면 기적적인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적적인 은혜로 오늘도 일ㅇ어나고 있는 불행한 사태들, 수 많은 사고와 불행과 절망과 천재지변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니다. 우리가 기적을 믿는 신앙을 가졌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신앙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해결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의 원동력은 오직 행동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아벨이나,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들도 믿음의 행위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보람된 삶을 가져왔습니다. 행동하는 믿음, 살아 있는 움직이는 믿음으로 역사의 귀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고, 우리의 정신이 하나로 집중될 때 못한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옛 성인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두 마음을 품거나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권능의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우리의 행동하는 믿음ㄹ 보시고, 산이라도 움직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서도 얼마든지 기적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이나 놀라운 일이 얼어날 것이라고 믿고 행동으로 옮기면 됩니다. 로마의 시인 ‘버질이’“저들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지만 믿음으로는 능치 못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뒤를 돌아보면 한 순간 한 수간이 주님의 인도하심이요, 돌보심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왔다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뿐아니라 천국과 영원한 그 나라까지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삶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주어진 기간이 끝나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짤막한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주의 사명을 다함으로 주님 앞에 영광 돌리고, 새명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을 받고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산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는 운둔의 종교가 아닙니다. 참선과 명상의 종교도 아닙니다. 부지런히 뛰고 일하는 종교이며, 할 일이 있는 곳에 나가 성실하게 일하는 행동하는 종교입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선한 도구로 쓰임 받기 원합니다. 저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사명을 위해 헌신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받는 믿음에는 신분과 성별의 차이나 배우고 못 배우고의 차이가 없습니다. 오직 행함이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이요 모든 민족을 초월하여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그 믿음을 확증하였고, 이방인이요 천한 기생 출신 라합 역시 행함으로 믿음이 인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이왕에 믿는 예수 잘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혼이 없으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유익이 없는 것이나, 행동하는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예수님의 정신으로 십자가라도 질 수 있는 순종의 사람, 행동하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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