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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있는 것으로 (행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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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은 특급 장애인입니다. 이 사람은 그야말로 사람으로서 행세하기에는 너무도 큰 장애를 타고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부잣집에라도 태어났더라면 그래도 좀 공평할 텐데, 오늘 본문의 이 앉은뱅이는 너무도 가난해서 그가 손수 구걸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 그런 불행한 사람입니다. 앉은뱅이도 서러운데 거지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이 사람을 두고 어떤 말로도 그 불행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서 나이 40이 될 때까지 구걸을 하며 사는 단골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 미문을 통과합니다. 오늘도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물론 그들을 이 앉은뱅이가 보았습니다. 그저 보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구걸해주지 않습니다. 100명의 한사람, 200명의 한사람이 동전 한 닢 던져주는 그런 확률인데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 주목할 수 없습니다. 그저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거리 나가면 사람을 보듯이, 나무를 보듯이 그저 보는 것입니다.

  달라진 시선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우리를 보라." 그 때 이 사람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 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본 것은 그저 본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그저 본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는 말을 듣고는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바라보았는데 그 때는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시선을 집중하여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본다'는 말이 똑같이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헬라 원어에는 각각 다른 말로 쓰였습니다. 그 의미가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두 번째 의미는 집중하여 본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겠구나!' 하고 집중하여 보았다는 것입니다.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같은 눈으로 보아도 마음을 집중하여 보면 그저 보던 것이 달리 보일 때가 많습니다. 영어의 to see는 그저 보는 것입니다.

  저는 한 장애인의 고백을 이렇게 들었습니다. 자기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었는데 휠체어를 타면서 살고, 집안에서는 목발을 짚고 사는데 자신이 장애인이 되어 보니 온통 자기 주변의 환경이 계단뿐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자기발로 걸어서 예배당을 왔습니다. 계단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집을 나선 그 때부터 계단과 싸우는 것입니다. 온통 주변 환경이 계단뿐입니다. 병원 병상에 누워 있어보면 건강에 대한 시선이 달라집니다. 건강한 사람모습이 달리 보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시선은 달라집니다. 사람은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시선이 달라집니다.

  베드로는 왜 그 앉은뱅이를 주목했을까요? 평소에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자주 올라간 사람이고 그 때도 그 사람은 앉아 있었는데 왜 지금 베드로는 그 사람을 주목합니까? 오늘 본문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을 주목한 것은 베드로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베드로, 성령강림으로 성령 충만을 입은 베드로, 그는 그 앉은뱅이를 주목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내 안에 있는 주, 내 안에 있는 것,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주노라. 명백한 이유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예수는 베드로로 하여금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게 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관심사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최근의 청소년들의 관심사를 분석한 자료가 나왔는데 청소년들 첫째 관심사가 휴대폰을 가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터넷입니다. 인터넷 없이는 못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성친구입니다. 네 번째가 성적입니다. 부모들은 자나깨나 공부, 공부하는데 아이들은 관심이 성적이 네 번째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시선이 달라집니다. 베드로가 그 마음에 주님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 안에 계신 그 예수는 베드로의 시선을 다르게 고치셨던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라." 내게 있는 것으로 주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쉽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가가서 허리를 굽혀 그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면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그리고 앉은뱅이의 손은 땅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허리를 굽혀야 잡습니다. 그리고 잡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과 행동은 우리에게 큰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는 누군가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손을 잡고 일으켜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베드로가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행동이 없었다면, 베드로의 이 동작이 없었다면, 앉은뱅이는 결코 일어나 걷지 못합니다.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고 걷게 하고 뛰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 앉은뱅이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굽혀 손을 잡고 일으키는 것은 베드로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오늘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복음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시선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전건축을 보는 시선이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주님을 품고 성전건축을 보면 기도가 달라지고 관심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섬겨야 되는가 하는 그 원리를 보여줍니다. 다가가야 합니다. 멀찍이는 섬기지 못합니다.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목이 곧은 자세로 네가 굽혀라 하는 곳에서는 섬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앉은뱅이의 그 더러운 손을 잡아 일으켜야 합니다. 주고받는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 행동은 베드로의 생명을 나누는 일입니다. 베드로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앉은뱅이에게 나누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앉은뱅이는 반응을 했습니다.

  스페인 투우를 연상하면, 붉은 천을 투우사가 휘두르면서 소를 흥분시킵니다. 이 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올 때는 의기양양하게 나옵니다.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이 소가 투우사에게 달려듭니다. 그러나 그 붉은 천은 아무리 가서 받아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붉은 천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달려들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잠시 후에 그 소의 죽음이 상징되어 있을 뿐입니다. 네가 지금은 이렇게 날뛰고 돌진하지만 잠시 후에 너는 죽어 나갈 것이다. 그것을 예고하는 천입니다. 사람이 만든 게임은 절대로 소가 사람을 이기지 못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결국은 사람이 이깁니다. 결국 소는 죽어나가고 사람들은 통쾌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소가 투우사를 이기는 길도 있습니다. 소가 흥분하지 않고 투우사에게 달려들지 않으면 투우사가 패배자가 됩니다. 관중들의 야유를 받게 됩니다. 소를 흥분시키지 못하는 투우사는 패배자가 됩니다. 소가 그것을 모릅니다. 소가 그것을 알면 이기는데 그것을 모르고 어리석게 붉은 천으로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 소의 미련한 행동은 오늘 우리 인간들의 미련한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무슨 일에 몰두했습니까? 무슨 일에 달려들었습니까? 무엇을 보고 여러분은 뛰어갔습니까? 투우사의 붉은 천을 들이박고 이 자리에 오지 않았습니까? 허무한데, 허망한데 인생을 소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고받는 거래가 있어야 합니다. 생명을 나누는 거래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주는 것과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반응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산모는 태아를 10개월 동안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상당한 무게입니다. 태아와 그 태아를 감싸고 있는 양수와 그 몸의 구조가 10개월 동안 무거운 것입니다. 만약 태아가 아니고 쇳덩어리를 몸에 달고 다니라고 하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 고통스러운 무거운 짐을 10개월 동안 지니고 다닙니까? 산모의 생명과 그 아기의 생명이 서로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고받는 생명력이 서로 오고 가기 때문에 10개월을 견디는 것입니다. 드디어 아기가 태어날 때도 산모는 아기의 생명과 자기의 생명을 바꾸면서 출산을 합니다. 직장에 가는 가장이 단순히 직장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가족의 생계와 미래와 한 직장인의 생명과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여행을 자주 합니다. 비행기, 고속버스, 열차도 자주 탑니다. 그 승무원들이 참 친절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가십시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고속버스 톨게이트의 요금받는 사람들은 요즘 더욱 친절합니다. 아마 훈련을 잘 시킨 것 같습니다. 톨게이트를 지나는 차마다 "어서 오십시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이 한결같이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0%이상은 그 인사를 받고도 반응도 없이 그냥 다 지나갑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관심이 달라졌습니다. 자주 대하니까 마음이 움직여졌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참 듣기 좋은 말입니다. 그 인사 받고 차를 운전할 때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무언가 반응을 해 주기로 작정하고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수고하십니다" 할 수 있는데 빨리 지나갈 때는 동작으로 보여줍니다. 상대방에게 목례로 표시만 해 주면 됩니다. 표정으로, 얼굴로, 시선으로 답하면 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할 때 고개만 끄떡 해주어도 답이 됩니다.

  서로 나누라

  여러분, 나눔이 있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나누어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가진 예수님을 그 앉은뱅이에게 주었습니다. 그 앉은뱅이는 베드로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일어나 뛰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그 모습은 베드로에게 놀라운 감동과 기쁨과 희열을 주었던 것입니다. 성전 가까이 살던 이 사람, 40세가 되도록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이 사람, 그러나 성전 가까이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이 사람은 한번도 성전 안에 들어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드디어 등뒤로 하고 있던 성전 미문을 향하여 들어갑니다.

  우리는 이 사람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입장입니까? 성전에 들어가는 이 사람 뒷모습을 보고 있는 관중입니다. 우리가 그 성전 앞에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베드로가 이 앉은뱅이를 일으켜서 이 앉은뱅이가 뛰면서 사도들과 함께 성전 미문을 들어가고 있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박수를 보내주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그 모습을 연상하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고 나면 흔적이 남습니다. 우리 인생은 등뒤가 남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이 사람은 사람들 앞에 등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걷지도 못하던 이 사람이 일어나 걷는 그 뒷모습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뒷모습은 어떻습니까? 한 주간 살고 난 나의 뒷모습은 어떻습니까? 내가 살고 온 발자취, 내 등뒤를 보는 사람들의 감정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등뒤를 관리하기 바랍니다. 취임식보다 퇴임식이 더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퇴임식이 사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사람이 매일 거울을 봅니다. 거울은 왜 봅니까? 단장하기 위해서 봅니다. 비판적인 말로는 가장하기 위해서 봅니다. 그런데 거울로 못 보는 곳은 등입니다. 사람의 등은 거울로 자신이 보지 못합니다. 거울 하나로는 등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등은 남이 보라고 남겨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만 보는 앞 치장은 하면서 남이 보는 뒷 치장은 예사로 합니다. 우리 인생은 등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공항의 출발지점에 가면 환송하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가다가 아쉬워서 돌아보면서 "잘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그러면서 들어갑니다. 그 이별하는 장면을 보면 빨리 들어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출구 쪽에 보면 환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출구 쪽에서는 급히 나옵니다. 천천히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악수하고 안기도 하고 서로 좋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날 때 그렇게 기쁘다는 것은 헤어질 때 아쉬웠다는 것입니다. 전송할 때 아쉬워야 만날 때 기쁩니다. 전송할 때 '다시는 이 원수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러면 만날 때 기쁘지 않습니다.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아무렇지 않게 보아도 뒷모습을 볼 때는 침을 뱉어 주고 싶은 사람, 미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뒤가 아름다워야 합니다.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는 아내는 행복합니다. 등교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면 행복한 엄마입니다. 우리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성전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은 놀라운 하나님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뒷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뒷모습을 보여주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아무리 봐도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다고 했습니다. 날 때부터 몇 백억 유산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평생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찌들어 사는 불행한 인생도 있습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대학에 가고 박사가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 시기도 나고 부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머리가 있습니다. 참 불공평합니다. 좋은 부모 만나서 태어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날 때부터 학대받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만 명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습니다. 미혼모들이 출생하고 가난에 못 이겨 함께 동반자살 하는 그런 경우도 있지만, 낳아놓고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생명은 다 존귀하고 평등하지만 환경과 상황은 너무도 불공평합니다. 하나님 앞에 의심이 가는 것입니다. 왜 인간을 이렇게 다스리십니까?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공평합니다. 내가 못 가졌다고 불평해도 아래를 보면 더 못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또 위를 보면 나보다 더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위를 자꾸 보면 안 됩니다. 나보다 낮은 자를 볼 때는 내게 있는 것으로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자에게 부족한 자에게 주라고 머리도 좋게 하고 인물도 잘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멸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자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줄 때 하나님이 계산하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오늘 베드로와 앉은뱅이가 서로 생명을 주고 나누는 이 형식 속에서 대원칙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전 삶이 헌신되어야

  요즘 사회에 전 재산을 기부하고 미담의 주인공으로 뉴스를 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형식으로 살라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평생 모았다가 한번 턱 써서 뉴스의 주인공이 되는 그런 삶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재산을 모을 겨를이 있었습니까? 언제 사도 바울이 모을 겨를이 있었습니까? 한번 뉴스의 주인공이 되지 말고 평생 하나님 앞에 좋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가 하나님이 원하는 삶입니다. 단발적으로 한번 인기인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 생애가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시선을 보고, 다가가고, 허리를 굽히고, 손을 잡아 일으키고, 생명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오늘도 이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맺는 말

  한국교회 안에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전건축을 하는 이 기간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배가 부흥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베드로처럼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우리로 말미암아 행동 속에 나타나는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다가가야 합니다. 손을 잡아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사역입니다. 거기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듯이 우리 주변에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변화하고 부흥하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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