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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의 통로 (창 48: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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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축복의 물줄기, 축복의 통로

이스라엘에는 대표적인 호수가 두 개 있는데, 북쪽의 갈릴리 바다와 남쪽의 사해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해보다 규모가 작은 호수이지만 살아 있는 호수입니다. 그곳으로 물이 들어가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나가기도 하기 때문에 언제나 물의 유동이 있어 살아있는 바다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그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사해바다는 그곳으로 들어오는 물은 있어도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바다 밑이 깊고 깊은지 그 많은 물을 다 받아 저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해 바다는 염도가 매우 높아서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죽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하기를 무엇이든 받기만 하면 좋을 줄 알고 또 많이 받으면 행복하고 부자가 되는 줄 압니다. 여러분의 삶이 받기만 좋아하고 나누어 줄줄 모르는 사해바다와 같습니까? 아니면 나누어주며 더불어 사는 갈릴리바다와 같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사람이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축복의 물줄기를 막아버렸기 때문인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축복의 물줄기는 들어오는 물줄기가 아니고 나가는 물줄기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나가는 물줄기가 열려있지 아니하면 그 물은 얼마 안가 썩어서 악취만 풍기는 죽은 호수가 되고 맙니다. 축복의 물줄기, 축복의 통로를 막고 사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축복의 물줄기가 끊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누어 줄줄 모르기 때문
남에게 평생 얻어먹기만 하고 받기만 했지 전혀 베풀 줄 모르고 사는 인색한 사람에게는 삶의 기쁨이 없습니다. 혹 모으는데서 오는 자기 기쁨은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만족은 없습니다. 넝마 주의로 일평생을 보낸 한 할머니가 평생 모은 수억의 돈을 지방대학에 장학금으로 희사했다는 보도를 본적이 있습니다. TV에 비쳐진 이 할머니의 얼굴이 얼마나 밝은지 마치 근심걱정이 없는 부잣집 노인같이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할머니는 평생 혼자 살면서 남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비천한 일을 하며 돈을 모았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장학의 꿈을 가지고 그 일을 했기 때문에 얼마나 보람이 있었겠습니까? 아마 이 세상에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삶의 기쁨이 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축복이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축복입니다. 삶도 죽음도 모두가 축복입니다.  ‘모두가 축복임’을 깨닫고 가슴속 깊이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내일도 시작도 그리고 끝도 다 축복일 뿐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모든 것이 축복임’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이 축복’이 아직 아닌 것입니다. 많은 것을 축복으로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축복으로 여기거나 느낄 수 없는 사건이나 사람을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그것을 불행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꽉 쥐고서 그것을 아픔으로 고통으로 붙들고 있는 까닭에 여전히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바로 그것을 불행으로 받아들여 움켜쥐고 있는 여러분의 내면적 사고와 믿음의 체계가 바로 여러분의 영적 성장과 인생의 여정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자신이 불행으로 받아들여 꽉 쥐고 있는 상태는 마치 엄청난 양의 물이 저장돼 있는 저수지와 같은, 자신 내면의 에너지와 가치체계,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억누르며 틀어막고 있는 장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불행은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내게 가까이 달라붙습니다.

부모의 최대의 기쁨

세상 그 어느 부모든지 자기 자녀가 잘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은 부모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이며 낙이지만 반면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녀가 실패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나 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실생활 속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주어야 자녀가 잘 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녀가 망할 길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몰라서 방치하고 있는 부모도 있고 알면서도 방치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기의 욕심 때문에 자녀 인생 희생시키는 모습도 여러 곳에서 보게 됩니다. 성공적인 생애를 살았던 인물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훌륭한 부모가 그 배후에 있습니다. 사무엘 뒤에는 한나 같은 어머니가, 모세 뒤에는 요게벳 같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에디슨의 부모, 아브라함 링컨의 부모, 아인슈타인의 부모들도 역시 믿음의 부모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죽기 전에 자기 자녀들을 축복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특별히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 부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은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즉,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있는 부모라면, 그리고 구원받은 확신이 있는 부모라면 우리는 자녀가 잘되는 일을 위해 축복을 해 주어야 합니다.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말고 사회에 환원하자는 소리가 이제 많이 들립니다. 자식은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면 됐으니 이제는 저들도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크리스챤 부모들이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겪은 그 고생을 내 자식에게는 절대로 물려줄 수 없다는 심정으로 이 땅의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재산과 돈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자녀들 가운데 아주 잘 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된 경우를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 때문에 형제지간도 견원지간이 되어버린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돈이란 제 손으로 벌어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수고한 만큼 받는 정정당당한 대가! 그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물려줄 유산은 돈이어서는 안 되고 그 무엇보다도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축복 기도하는 것! 그것은 목사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 축복기도 해주는 것! 세상에 그보다 더 귀한 모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삶의 현장, 여기  저기에서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고 축복기도 해주는 모습! 그 모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축복기도를 해 줄 것인가?

오늘 본문 15-16절 말씀에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위해서 축복기도를 해 주고 있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축복기도를 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기도!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축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신앙고백! 그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고백이 전제되지 않고 드려지는 축복기도는 무속신앙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주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야곱은 그 문제를 놓고 축복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흘러야 합니다. 내 代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져 버리면 안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축복이 이삭에게 ! 이삭에게 임했던 그 축복은 다시 야곱에게! 그리고 그 축복은 또 다시 요셉과 그의 후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샘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더 맑고 더 많은 생수가 솟아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임한 축복도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지금 내 안에 임한 하나님의 축복! 축복기도를 통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눔에서 오는 기쁨과 풍성함! 바로 그 기쁨과 풍성함이 여러분의 모든 가정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축복은 사모하는 자의 것

야곱의 생애는 축복을 사모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애를 축복하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모함이 없어서, 갈망함이 없어서 그것을 옆에 두고도 평생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없는 것을 알아서 끝까지 추적해서 갖고야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같이 예배드리면서도 이 예배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해서 그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어쩌다가 주일날 누군가의 힘에 밀려 교회에 나와서 가치 없이, 의미 없이 왔다가 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축복은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야곱은 그 축복을 사모했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한 인생에서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좋아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좋아하고 하나님의 위로도 좋아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좋아하고 하나님의 선물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야곱이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축복을 나를 향해 베푸시는 원천이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형통했습니다. 그는 얍복강에서 씨름하면서 그 분의 실체를 깨닫고 외쳐대기를 "당신이 나를 축복하시지 않으면 내가 절대로 당신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을 힘껏 부여잡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그 때 그 분이 축복을 약속합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너는 나를 이기었다. 그런고로 내 이름을 이제는 야곱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라 하겠다."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져주신 사건입니다. 그의 강청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져주는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로 작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져주셨다는 말,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지는 것은 힘이 없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법칙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만납니다. 져 주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부러뜨립니다. 그는 계책의 사람이었습니다. 노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성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육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환도뼈를 부러뜨립니다. "너는 더 이상 네 육체를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은 네 육체를 통해서 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그 다음부터 야곱은 평생 다리를 절면서 지팡이를 의지해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로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기어코 축복하시는 방법은 환도뼈를 부러뜨려서라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이 어떤 때는 우리에게 아프게도 임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게 수치스럽게도 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 어떤 때는 내 인생 속에 어둡게도 임할 수도 있지만 자기도 모를 엄청난 축복의 준비를 경험합니다. 그는 가나안 복지에서 자기 형과 화해하고 거기서 더 큰 부요를 누렸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났으면 그의 생애는 더 이상 이야기가 없을 터인데, 그가 그처럼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한 소년은 노예로 있다가 감옥의 죄수 되었다가 다음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뿐만 아니라 중동 모든 지방에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지혜로운 통치자로, 이스라엘을 새로운 민족으로 배태하기 위한 둥지를 만드는 사역자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지 전까지는 한 번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져보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부도 가져보았고 사랑하는 사람도 가졌습니다. 갖고 싶었던 하나님의 축복도 끝까지 추적해서 가졌습니다. 양보라는 것이 없고 포기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 아들이 죽으면 죽으리라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그 아들을 맡긴다고 말합니다. 고통 속에서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아픔과 같은 고통으로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인간의 한계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아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동안 준비하신 축복으로 그를 용서해주십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수레를 보내왔습니다.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총리대신의 그 어마어마한 수레를 보고서야 사실인줄 안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내가 살아서 내 아들을 한 번만 보고 죽고 싶다."하고 그 수레에 몸을 맡깁니다. 하나님은 환도뼈를 꺾는 고통 속에서 축복의 역사를 준비하셨다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축복을 안겨 줍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배태시킬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품, 한 민족을 탄생시킬 새로운 둥지를 그의 아들을 통해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축복이 그냥 축복이 아닙니다. 온전히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았던 하나님의 사람, 야곱이 그 때부터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는 그가 다른 사람을 축복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바로를 만나 일국의 대왕을 축복합니다. 자기가 당했던 그 고통의 세월, 또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고통이 그친 것을 회상하면서 손을 들어 바로를 축복합니다. 그 다음에 그는 열두 아들을 축복합니다. 그리고는 애굽에서 낳은 아들,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합니다. 므낫세라는 아들이 오른 쪽에, 에브라임이라는 아들이 왼쪽에 나왔습니다. 축복해달라고 하니 손을 바꿉니다. "아버지, 큰 아이를 오른 손으로 축복해주세요." 라고 말하는데 "내가 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자를 내가 안다." 그러면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하는 요셉의 청마저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하고 있는 야곱을 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형태는 저수지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로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저수지는 그것을 담고 있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수지에 물을 담으면 썩게 되어서 약을 쳐야 되고 걸러내야 되고 많은 공정이 필요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도적들이 와서 뚫을까봐 사람을 세워 지켜야 됩니다. 복잡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축복의 통로가 되니까 지나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형태는 내게 쌓이는 축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는 축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축복의 저장고로 쌓이기만 하니까 축복이 썩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지 않으면 썩은 웅덩이, 터진 웅덩이가 되는데 이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의 환도뼈를 쳐서라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경험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겼습니다. 그 때 그의 생애는 진정으로 축복의 통로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 경배하면서 그의 생애를 드렸습니다. 축복받은 야곱의 생애와 같은 이런 은총의 삶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생애 속에 충만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지금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직장 안에서, 가정 안에서, 이웃 안에서 나에게 지금의 자리를 허락하셨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가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대와 질서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또한 나의 것을 채우고자 남의 것을 취하려는 자세로 인하여 때리고 윽박지르고 싸우는 삶의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서 평안을 끼치는 삶의 방식으로 채움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으로 채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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