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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레스 웃사의 교훈 (대상 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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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봉수 목사
 
  우리 동네를 왜 ‘상도동’이라 부르게 됐는지 아십니까? 원래 조선시대에는 ‘성도화리’라 불렀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상여꾼들이 모여들어 살게 됐답니다. 그래서 ‘상투굴’이라고 하다가 상도리, 상도정 이라는 이름을 거쳐서 1955년 동설치 조례에 의해서 상도동이라 불려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봉천고개라고 부르는 고개를 살피재라고 불러왔습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해서 도둑이 많이 나타났던 곳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했다고 해서 살피재라 이름을 부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 동네 지명 이름들은 그 유래를 살펴보면 썩 유쾌하지가 않습니다. 자랑스럽거나 길이 가슴에 새길 그런 이름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된 고장으로 만들어 가야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베레스 웃사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역시 썩 유쾌한 이름은 아닙니다. 그 지명 유래 안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베레스 웃사의 지명 유래

  사울이 죽은 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유다지파 외 다른 지파들에게 왕으로 권위가 제대로 세워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여부스 족속에게서 시온산성을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옮기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안정을 찾게 된 것입니다.

  이제 진정한 왕이 되자 다윗은 그동안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해이해 진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 되시는 나라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여호와 중심의 종교적 통합으로 나라를 반석 위에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그동안 법궤는 어떻게 보면 방치되다시피 했습니다. 블레셋에서 빼앗겼다가 돌아온 뒤 벧세메스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왕이 된 후에도 계속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이 왕이 된 후 그러니까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약 70년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전 이 대목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법궤를 대하는 태도는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사무엘 시대에 20년 동안 법궤가 이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있었다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아직 나라의 수도가 있었던 때도 아니고 사사시대여서 누군가가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이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왕이 된 후에 무려 40년을 통치하는 동안 법궤가 개인의 집에 있었습니다. 왕도 나라도 법궤를 외면했던 것입니다.

한 TV 광고가 생각이납니다. 김치 냉장고 광고였던 것 같습니다. 중견 탈렌트 백윤식씨가 김치를 먹으면서 궁시렁거립니다. 김치가 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랑이 식은게지” 아내가 만든 김치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분은 아내의 사랑이 식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시절 하나님께서 법궤를 외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랑이 식은게지...” 이때 이스라엘은 무척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에게 찾아오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기도 시간이 줄어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정말 어려워지게 됩니다.

  다윗은 이 법궤를 옮기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각 지파를 대표한 사람들 3만을 초청했습니다. 법궤에 대한 온 이스라엘의 관심을 회복 시켜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일으키려 한 것입니다.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결속을 든든히 다지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궤를 운반하는 도중에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법궤는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모는 수레 실렸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을 나선 뒤 다윗 성으로 가는 도중 나곤의 타작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이 때 소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소들이 뛰자 수레에 실린 법궤가 굴러 떨어지려 했습니다. 옆에서 수레를 몰던 웃사가 급히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웃사를 치셨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다윗이 너무 놀랐고 더 이상 법궤를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길이 새기기 위해 바로 그 자리 웃사가 죽은 그 땅을 다윗이 베레스 웃사라 이름 붙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두려워서 법궤 운반을 중단하고 일시 오벧에돔의 집에 모셔두기로 했습니다. 그 법궤가 석달 그 집에 머물렀는데 하나님께서 그 집에 큰 복을 베푸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윗의 태도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로서는 하나님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 그동안 70년 방치 됐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웃사를 치셨습니다. 그대로 그렇게 법궤를 옮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은 법궤 운반을 중단했습니다. 3개월 정도 시간을 가지고 재정비하기로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법궤를 모셔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자기는 물론이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말도록 그 자리를 베레스 웃사라 이름하여 그 교훈을 길이 새기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실수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실수를 덮으면 안 됩니다. 그 실수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베레스 웃사라 이름하여 자신의 신앙을 재정비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베레스 웃사의 교훈

  그러면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 말씀대로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웃사를 치셨을 까요? 소가 뛰어 법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대비해서 법궤를 잡은 것이 아닙니까? 그냥 떨어져 상하지 않도록 잡은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려면 모세 오경으로 가야 합니다. 오경에 법궤를 운반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자세하게 규정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두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출 25:13-4입니다.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법궤는 메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민 4:15입니다.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찌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을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법궤는 멜 뿐 아니라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하나는 법궤를 메지 않고 수레에 실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웃사가 법궤에 손을 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법궤를 다룰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고, 말하자면 시범 케이스로 웃사를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아무리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 해도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배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편이주의입니다. 법궤를 메고 가는 것 보다 수레에 끌고 가는 편이 훨씬 편리합니다. 시간도 단축되고 또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고... 그러나 이것은 다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합리주의입니다. 법궤가 떨어지려고 할 때 그 법궤를 손으로 잡아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 이런 편이주의적 발상, 합리주의적 생각들이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이런 세속적 물결이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2. 영적 긴장을 풀지 말고

  지금 문제가 터져서 죽은 사람은 웃사입니다. 그러나 사실 죽어야 할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이 일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영적인 나사가 서서히 풀려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법궤를 옮겨오는 이 중요한 역사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기도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사건건 하나님께 묻던 다윗이 이렇게 중대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거룩한 일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자문을 구한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 일을 어떻게 명하고 계신지 살피지 않았습니다. 13:1을 보면 군인들하고만 의논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종들과 의논하지 않고 군인들과 의논한 것입니다.

  그래서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앞에서 살핀 민 4:15에 나오는 대로 법궤는 고핫 자손이 운반해야만 했는데 아비나답의 아들들에게 맡기고 말았습니다. 법궤를 메지 않고 수레에 옮기는 일도 그렇고, 법궤를 옮길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교육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문제의 근원은 다윗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목동 때와 달라졌습니다. 사울에게 쫓길 때와 달라졌습니다. 또 헤브론에서 다스릴 때와 또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됐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승승장구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영적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신문 칼럼을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한 수도원 원장이 보잘것없는 아이 하나를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시기하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원장이 아이들에게 과제 하나를 냈습니다.

  새 한 마리씩을 주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몰래 해 질 때까지 새를 죽여서 가져오라는 과제입니다. 해 질녘에 마당에 죽은 새 시체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만 그냥 새를 산채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아이 말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 하셔서 아무리 찾아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거기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원장이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래서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한단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긴장이 풀어지면서 서서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곳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일을 처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긴장을 풀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의 눈에 늘 주님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그래도 섬겨야

  웃사가 죽자 큰 소요가 일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12절에서 당시 그 장면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그렇게도 법궤 모셔오기를 바라고 이 거대한 역사를 주도한 다윗이 겁을 먹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모셔 들이기를 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70년 이상 머물던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으로 되돌아가야 할까요? 웃사가 죽었으니 아비나답이 그렇게 하려 했을 리 만무합니다. 목적지로 가다가 다윗이 못하겠다고 손을 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집으로 법궤를 메어갔습니다. 자기가 자원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할 때 그가 나선 것입니다.

  사 6:8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 모두가 꺼려하는 상황에서 보낼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가 자원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벧에돔이 이사야처럼 자원한 것입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이 사람이 가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가드는 지도를 살펴보면 예루살렘에서 아주 먼 거리에 있습니다. 당시 다곤의 타작마당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곳은 다윗 성 근처입니다. 현재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지점입니다. 이미 기럇여아림에서 약 13키로 정도 동쪽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가드는 기럇여아림에서 오히려 서남쪽으로 20키로 더 떨어진 곳입니다. 그러니까 왔던 반대 방향으로 더 먼 거리를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근처에 사는 사람들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그 멀리 사는 오벧에돔에 죽을 각오를 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 오벧에돔 집에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70년이 넘도록 아비나답이 법궤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벧에돔은 불과 3개월 법궤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께 크게 복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자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모두가 피하고 꺼릴 때 오벧에돔은 자원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가족 가운데 또 죽게 될지 모르는 무척이나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래도 오벧에돔은 자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자원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모두가 피하고 꺼려할 때 자원하는 사람 그들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그래도 섬기려 나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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