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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개혁역사 (히 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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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필재 목사 (갈보리교회)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기독교가 사회에 공헌한 내용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잘못된 내용도 얼마든지 있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있었다는 그 자체가 잘못이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 인간이 모인 곳에는 어디에나 부패 요소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것을 수정해 나가는 작업을 개혁 작업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땅에 존재하는 성전과 하늘나라에 존재하는 성전이 있다는 말이고, 이 지상의 성전의 의미는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의 그림자 역할이 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구약의 제사 방법을 비교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교회는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라는 말로 설명을 합니다. 유형교회란 지상에 존재하는 갈보리 교회와 같은 보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무형교회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나님 나라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또한, 우리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는 불완전의 요소가 있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지상에서 때로는 세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흥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는 불완전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 대표적인 기록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임금이 됩니다. 역군 3만 명을 동원하여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하여 7년에 걸쳐 그토록 장엄한 성전 건축을 완성하였고 하나님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솔로몬 성전도 어느 날 잿더미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 성전 재건 역사가 성경에 무수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의 이름 아래 과거보다 더 장엄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전도 모두 다 파괴되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시면 누구든지 다녀오는 관광코스가 하나 있습니다. '통곡의 벽'이라는 곳입니다. 가보면 그 벽 하나가 얼마나 웅장한지 그 당시에는 건축 장비도 없었는데 사람들의 손으로 한 작업이 어떻게 저런 큰 바윗돌로 그렇게 정교하게 건축했는지 상상이 안갈 만큼 장엄합니다. 그러한 장엄하고 웅대한 하나님의 성전도 지금은 다 무너지고 벽 하나만이 남아서 그 슬픔을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것입니다. 왜 그런가?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한 유형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장로교 교단에서 사무총장을 하시는 목사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 교단에서는 서울과 경기도 지방에서 현재 일년에 200개의 교회가 새로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00개 이상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세운 하나님이 계신 교회가 없어지는가? 하나님도 실패하시는가? 지상의 교회는 어떤 교회든지 다 불완전한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면서 방향이 초점을 잃어버리고 다른 방향으로 갈 때 이 땅의 유형교회는 심판을 받기도 했고 더 좋은 방향의 축복도 받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지금도 필요하고 앞으로도 필요한 거룩한 작업이 됩니다.

종교개혁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잘못 흘러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노아 시대는 대홍수로 타락한 백성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도록 개혁의 역사를 직접 단행하신 것을 볼 수가 있고, 바벨탑을 쌓을 때에는 언어의 혼잡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역사를 그르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흩어져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도록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개혁 작업을 하셨습니다. 또, 구약의 요시야 왕은 부패한 온 나라 백성의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신앙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국민적 종교개혁의 역사를 일으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 유형교회가 가장 부패했던 때는 중세기였습니다. 이때 교회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소원과 딴 길을 가고 있다고 판단되어 많은 신학자들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대표적 예가 되므로 루터를 '종교개혁의 대부'로 취급하는 문화가 교회 안에 생겨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의 역사를 셋으로 구분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종교개혁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받아서 이 받은 구원의 은총을 온 세상 모든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은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을 잊어버리고 세계 만민을 위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구원을 자기 나라, 자기 백성에게만 국한시키는 국수주의 유대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은 그들로 하여금 심한 유대사상에 젖게 했고,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이 민족의 그릇된 신앙과 국수주의를 깨뜨려 버리시기 위해 니느웨로 보내시는 역사가 구약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니느웨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입니다. 앗시리아의 수도입니다. 히브리 민족이 바라볼 때 하나님의 구원에서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모두 크게 감동하여 죄를 회개하고 모두 구원을 받았다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준 이 큰 영적 축복, 구원의 은혜는 너희들이 수고함으로 제사장적 나라와 백성이 되므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빨리 나누어주어서 모두가 다 구원의 백성이 되게 하라"는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만 가지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가장 심판 받아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앗시리아 니느웨로 요나를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밝혀주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자는 히브리 민족이 생각할 때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이방 사람에 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현장에서 그 여인의 요청을 해결하여 구원을 주셨고, 또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로마 군인 백부장을 만났을 때 그의 요청을 들으시고 대답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고집스러운 종교 관념을 깨뜨려버리시는 개혁 작업의 장면을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 첫번째 이유가 무엇인가? 그때까지 그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 내려오던 히브리 민족의 신앙을 뒤집어엎는 작업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십자가로 가는 요인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할 때마다 권위 있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물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인간의 의가 구원을 이루게 된다는 율법주의 사상을 열심히 가르치니까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의로운 일을 하나라도 더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의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만한 만족한 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날마다 자기의 의를 만들어가기 위해 무거운 정신적 고통을 안고 오늘이나 만족할까, 내일이나 도달할까 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로마에 가시면 마틴 루터가 무릎으로 기어오르던 '라테라 성당'이라고 있습니다. 그 계단에 저도 한번 가서 무릎으로 올라가 보려고 몇 계단을 올라가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얼마나 딱딱한지 너무나도 무릎이 아파서 정상적으로 기어 올라가려면 다섯 계단을 올라가기도 힘들만큼 아픕니다. 한 계단 올라가서 기도하면 한 가지 죄가 사해지고 두 계단 올라가서 무릎에서 피가 흐르면 더 큰 죄가 사해진다는 믿음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의를 쌓아서 자기가 구원에 도달한다고 하는 믿음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그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피를 흘리면서 기뻐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자기 의를 쌓아서 구원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노력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그것이 더 심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 율법주의를 버리고 복음 앞으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짐은 쉽고 내 멍에는 가벼움이라." 구원을 위한다면 그런 것은 안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누가복음 5장에는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라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금식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전통적으로 해 오던 것을 왜 안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그리고 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말씀이 예수님의 종교개혁 작업이란 말입니다.

금식기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많은 몫을 차지하는 좋은 기도생활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의 금식기도는 업적 위주의 날짜 채우기로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으로 기도하오며" 업적 위주의 금식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을 갔다 오기까지는 금식기도의 법을 정확히 잘 모르다가 예루살렘에 가서 실제로 보고 확실하게 금식 기도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루살렘에 들어간 날이 라마단 금식기도가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무장군인들이 장갑차를 골목마다 배치해두고 기관총을 걸어놓고 전쟁터같이 삼엄한 분위기가 되는지 '이거, 내가 잘못 왔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베들레헴을 넘어오는데 "당신들, 어디서 왔는지 못 갑니다."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오늘 금식기도가 끝나는 날입니다." "아니, 금식기도가 끝나는 날 왜 이렇게 야단입니까?" "금식기도를 하는 수만 명의 아랍계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밀어닥치는데 어떤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삼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뭐, 가니까 정말 그 거리는 어떻게 지나가지 못할 만큼 군중이 수십만 명이 쏟아져서 거리마다 빽빽하게,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지나가고 군인들은 장갑차를 가지고 감시를 하고 그러니 그때 나는 의심이 생겼어요. '아니, 한 달 동안 금식기도한 사람들이 무슨 힘이 저렇게 펄펄 넘쳐서 폭동을 일으킬 만큼 왕성해 야단인가? 한 달 동안 금식기도 했으면 지금 드러누워 가지고 미음이나 먹고 있던가, 물이나 마시고 있던가 해야지 어떻게 한 달 동안 굶고 나서 저렇게 야단인가?' 그래서 내가 거기 가서 그들이 하는 금식기도를 자세히 알아봤어요. 점심 한 끼 굶는 겁니다. 새벽 6시에 밥 두 그릇 먹고 나가는 겁니다. 해가 떨어지자마자 또 밥 두 그릇 먹는 겁니다. 점심 한 끼 굶으면서 한달 사는 것을 그들이 금식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이슬람교도들이 하고 있는 금식 기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전통적 금식기도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런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씩 했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금식하고 있는데 왜 당신 제자들은 안 합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금식기도는 하지 말아라! 그냥 먹어라. 그렇게 금식 기도하고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기도 했다고 말하지 말아라. 차라리 먹고 기도해라." 이것이 개혁 작업입니다.

여기 결혼식장의 신랑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셨죠?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 풍속도는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바로 떠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은 신부와 신랑은 집안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일주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둘 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면 친구들과 친척, 동네 사람들이 저녁에 항상 몰려와서 음식을 먹으면서 신랑보다는 신부를 즐겁게 하는 풍속도가 있습니다. 그들의 성경인 '탈무드'라고 하는 성경에도 거짓말하는 것은 죄가 되지만 이때는 신부를 위해서는 거짓말 많이 할수록 의가 됩니다. 무슨 거짓말을 하느냐? 예를 들면, 신부가 기가 막히게 못생겼다고 합시다. 하지만 친구들이 저녁마다 와서 거짓말을 계속 하는 겁니다. 그 신부를 여왕으로 만들어 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은 다 갖다 이름을 붙여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와서 "당신은 클레오파트라 같습니다." "양귀비 같고, 춘향이 같고, 모나리자 같고…." 온갖 세상의 미인들은 다 갖다 대면서 "지금 당신이 그렇습니다." 신부가 너무 못생겼는데도 "당신은 너무 예뻐서 우리가 날마다 보러 옵니다." 완전히 여왕으로 띄워 주는 겁니다. 일주일 동안 내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신부도 그 말이 거짓말인줄 압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즐겁습니다. 그 일주일에 신부가 마치 여왕이라도 된 듯, 이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인 듯 착각하라고 거짓말을 해주는 겁니다. 신랑은 그 옆에서 그렇게 예쁜 신부를 데리고 사는 기쁨을 누리며 일주일 내내 신부와 함께 있습니다. 그게 바로 풍속도입니다. "그런 시간에 신부가 금식할 수 있느냐? 너희들의 신랑이 된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 있는데 나의 신부 된 제자들이 잔치 집에 여왕같이 되어 있는데 금식을 하다니 이게 무슨 뜻인가? 너희들이 지금 지키는 그 전통적 금식의 규례는 깨뜨려 버려도 좋다." 개혁 작업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 것이지 새벽같이 하루 종일 견디라고 밥 두 그릇 먹고 나가서 있다가 해가 떨어지자마자 또 두 그릇 먹는 그런 금식기도는 하지 말라!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지, 새 술은 헌 가죽부대에 넣으면 터져서 둘 다 버리느니라." 이게 또 무슨 말입니까? "나의 새로운 복음의 진리는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 낡고 낡은 유대교 전통의 가죽 부대에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터져 버리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릇이 아니다. 진리를 받을 만한 그릇이 못된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물이 귀해서 물을 길러 멀리 다닙니다. 이 가죽 부대란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말리고 목과 다리를 잘라 버리고 나중에 다리 부분을 꽉 묶어 버리면 훌륭한 물통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래 쓰면 낡아서 물은 괜찮지만 만약 거기에 포도주를 담으면 그 효소 되는 힘이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리고 맙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담을 때에는 효소 능력을 견딜만한 새 가죽 부대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라는 낡은 가죽 부대를 집어치워 버려라! 하나님을 믿는 종교를 누가 그렇게 낡은 종교로 만들어 놨느냐?" 팍 깨뜨려 버리시는 겁니다. "구약 성경 말씀에 이렇게, 이렇게 했다고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렇게 하라!"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잡아서 십자가에 죽여 버린 겁니다. 유대교라는 낡고 낡은 제도 밖에 없었던 시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진리로 유대교를 깨뜨려 버리시고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개혁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에서 2,000년 역사를 지금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이 오랜 세월 속에 잘못 되었을 때 루터의 개혁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라테라 성당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다가 그는 성령의 내재를 느끼면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 고통으로 기어오르는 이 계단에 내 무릎에서 흘러내린 피가 나의 의가 된다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십자가 보혈의 능력은 무엇인가?'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게 아니다.' 그래서 걸어 내려왔습니다. '구원이란 십자가 공로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 것이다. 아니, 내가 이렇게 라테라 성당을 무릎으로 기어올라서 내 무릎이 아픈 것을 참고 견디고 내 무릎이 터져서 흐르는 피가 나를 구원한다면 할복자살하는 게 훨씬 낫겠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을 외쳤습니다. 당시에 이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아직 지옥에 가지 않고 중간 정류소같이 '연옥' 이라는 것을 하나 만들어놨는데, 거기 가있는 부모를 천국으로 보내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래서 면죄부 판매가 생긴 것입니다. "당신의 부모들이 연옥에서 천국에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부모를 위해 수고하면 부모의 영혼이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 면죄부를 안 사겠습니까? 면죄부를 구하는 세 가지 방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십시오. 교황을 위해 십자군에 자진 출두해서 십자군 전쟁에 나가 싸우시던가, 거룩한 도시 로마 시를 순례의 길로 다녀오던가, 또 하나는 돈으로 표를 사던가 이 셋 중에 하나를 하십시오." 가장 쉬운 방법이 돈 주고 사는 것이라서 사람들이 여기에 다 참여해서 무수한 돈을 교황청이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1517년 어느 날 교황청에서 파송된 요한 텟젤(Johann Tetzel)이 루터가 사는 위텐버그 지방에 와서 연설을 했습니다. "연옥에서 고생하는 여러분의 부모를 위해서 이 면죄부를 빨리 사십시오. 여러분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 이 함에다 동전을 넣는 그 순간 여러분의 부모님 영혼은 하늘나라로 갈 것입니다." 루터가 그 소리를 듣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교회를 개혁해야 되겠다! 도대체 이게 뭐냐? 저 시장의 장사꾼만도 못한게….' 그래서 교회 개혁을 단행했고, 그 뒤를 따라서 스위스의 쯔잉글리, 존 칼빈(John Calvin)이 신학의 개혁에 합세했습니다. 기독교의 대개혁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교회를 바라보니 너무너무 속이 상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어떻게 하면 이 마귀 새끼들을 멸망시킬까? 생각대로 되지는 않고 마귀들은 많고' 이때 재미있는 게임을 하나 만든 것이 '볼링'이라는 운동입니다. 여러분, 그 볼링공의 핀을 보세요. 맨 위에 좁다란 부분 그게 뱀대가리 모양입니다. 사탄을 상징합니다. 밑 부분 뚱뚱한 것은 다이너마이트입니다. 그리고 내가 굴리는 이 볼링공은 성령의 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탄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잖아요? 성령의 불을 팍 던지면 이 성령이 다이너마이트에 가서 마찰이 되면서 불이 붙어서 폭발하므로 사탄들은 모조리 파괴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볼링 잘 치는 사람을 한번 보세요. 10개의 핀이 한번에 마치 폭탄이 터져 나듯 사방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터져 나가는 것입니다. 볼링 치시는 분은 그것을 알고 치시란 말입니다.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어떤 때는 다 쓰러지고 하나만 남았을 때 저 쓰러지지 않는 마귀 새끼를 성령의 불로 팍 깨뜨려 버리면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이 개혁 작업이라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앞서가는 자는 고달프죠? 닦아놓은 길을 뒤에서 따라가는 자는 쉽습니다. 나는 우리 갈보리교회도 이 시대에 조그만 개혁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얼마나 관료주의에 썩어가고 있습니까? 개혁의 힘은 얼마나 창조적인가? 오스트레일리아는 옛날에 강대국에서 죄수를 잡아다 버린 섬나라 땅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죄수였다는 치욕적 뿌리를 창조적 개혁으로 바꾸어 가는데, 조상들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지금 호주 사람들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사회도 사람이 살 곳인가?" 그렇게 범죄가 없는 도시를 그들의 손에 의해서 창조적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부끄러운 조상들의 이력서를 우리가 창조적인 개혁으로 바꾸자!" 그래서 해마다 조사하지요?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여행하고 싶은 도시가 어디인가?" 시드니입니다. 최고 점수를 받는 도시가 그곳입니다. 그 후손들이 그 도시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개혁이란 잘못된 것을 수정해 가는 힘을 말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의 개혁 작업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을 어떻게 개혁해 갈 것인가? 예수 믿는 사람이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면 순교자 같이 나갑니다. 누구 말도 안 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에 그렇게 진리를 선포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목이 곧은 백성들아!" 오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 예수님 이전까지의 모든 구약의 제사 의식을 말하고 맨 마지막에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 때까지 필요했던 것과 예수님 이후는 예수님의 복음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방향 제시하는 개혁적 작업의 말씀입니다. 창조적 개혁이 있는 사람, 창조적 개혁이 있는 교회, 훌륭하고 거룩한 개혁 사역을 해나갈 수 있는 공동체! 우리는 잘못되어진 모든 것에 대한 훌륭한 개혁 작업을 나 자신부터 해나갈 때 하나님의 역사는 나를 통해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구약 개혁 작업도, 예수님 당시도, 바울 시대도,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는 거룩하고 신선한 개혁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어려운 시대에서 우리 자신들이 나 자신을 개혁해서 나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자들의 삶이 저희들이 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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