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마 5:13-16)

  • 잡초 잡초
  • 555
  • 0

첨부 1


- 설교 : 이광호 목사

인사합시다. “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세상에 희망을 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005년도 섬김과 나눔이 풍성해지는 교회라는 표어를 세웠는데 모든 성도님들이 기도할 때마다 우리 영생교회가 섬김과 나눔이 풍성해지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꿈 꿉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틀림없이 이 표어가 구호로 그치지 않고 실현될 것을 믿습니다. 반드시 섬김과 나눔이 풍성해지는 영생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생각하며 늘 소망하고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곳에 모여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홈피가 개편 중에 있는데 관리자께서 섬김과 나눔이 풍성한 교회 밑에 예수님의 웃음소리가 가득 넘치는 교회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그래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웃음소리가 가득 넘치는 교회야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넘치는 교회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영생교회가 예수님의 웃음이 우리 모두의 웃음이 되어 행복이 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을 꿈꾸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솔로몬 성전에 임했던 하나님의 영광이 여기 우리 가운데 가득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꿈꾸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여기 계셔서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이 위로받고 새 힘을 얻으며 하늘의 평안을 얻으며 축복된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기도처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눈을 들고 귀를 열어 응답하시는 기도의 응답이 풍성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전의 뜰을 밟는 자마다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대로 우리교회에 나오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받고 누리며 나누는 복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넷째는,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며, 벙어리가 말하게 되고, 포로 된 자가 자유함을 얻게 되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증거 되는 교회가 되는 것을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고통과 절망 속에 사는 이들이 이곳에 와서 소망을 얻고, 질병의 아픔을 치료받고, 아름다운 회복의 은혜를 누리는 축복이 늘 충만해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와 같은 소망의 기도들이 응답되고 여러분 모두의 소망과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영생교회는 좋은 소문을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익산 지역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들 속에서 좋은 소문을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교회뿐만이 아니라 이 지역사회에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좋은 소문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참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희망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은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신학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희망만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 헨리의 작품 마지막 잎 새는 독자들에게 희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하나 둘 떨어지는 잎 새를 바라보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소녀에게 화가는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잎 새를 그려 바라보게 함으로 희망을 갖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희망은 살아가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생명을 주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희망이 되어야 할 이유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이 사라졌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정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 경제, 문화에서도 희망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종교마저도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 파벌과 권력의 힘으로 움직이는 의회와 총회정치 속에도 희망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건물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가 세상의 희망입니다.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기독교의 신학은 희망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희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희망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도 말합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축복이 아닙니다. 십자가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희망을 주고자 한다면 잃어버린 십자가의 고난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주는 교회는 십자가를 회복하는 교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는 말씀이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해야 할 교회의 사명과 도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자기를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며 교회가 있어야 할 존재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존재 목적과 이유를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는 말씀은 곧 세상에 희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나, 빛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나. 결국 이 모든 것은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곧 교회는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영생교회는 절망하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살리고 구원의 빛을 만방에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곧 교회의 영적 갱신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1. 교회에 일어나야 할 영적 갱신은 말씀의 회복입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각성을 일으킬 때 강력한 말씀의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모든 백성들은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회복의 출발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임하는 자리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정 말씀이 삶에 들어오면 회복의 기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말씀의 회복입니다.
성령 충만은 정신이 혼미해지고 이상한 말을 하며 어떤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받으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면 가고, 말씀하시면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면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증거인 것입니다.

교회 속에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이 공허한 외침이나 메아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건성으로 듣고 지나치는 말씀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를 얼마나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설교하느냐의 문제는 더욱 아닙니다. 설교를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말씀 회복은 유창하고 감동적인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밭을 기경하여 옥토되게 하는 것입니다.

2. 교회에 일어나야 할 영적 갱신은 사랑의 회복입니다.

분열과 다툼이 있는 교회는 결코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시기하고 분쟁을 일삼고서야 어찌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지체들을 소중히 여기며 감싸주어야 합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며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미움과 다툼을 버릴 때 그 진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금에 짠 맛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쓴 맛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금이 정제 되어야 제대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귀하고 비싼 소금은 아홉 번 대나무에 넣고 구운 소금입니다. 그 소금은 만병의 치료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소금이 가진 모든 독성을 제거해 내면 가장 귀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얼마든지 부정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성령의 불로 사르고 사랑이라는 정제된 소금을 만든다면 세상의 희망을 불어 넣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있는 쓴 맛들을 성령의 불로 소멸시켜야 합니다. 불에 사르지 않고는 독성이 빠져 나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셔서 실험해보십시오. 천일염을 사다가 후라이펜에 놓고 볶아보십시오. 파란 연기가 올라갑니다. 독하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성령으로 우리 속에 있는 나쁜 독성과 찌꺼기들을 제거하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실 때 우리 영생교회는 아름다운 맛을 내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성령은 훼방하는 영이 아닙니다.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영이시며 하나가 되게 하시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회복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우리를 사랑으로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3. 교회에 일어나야 할 영적 갱신은 십자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과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오욕과 능멸과 수치의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가장 아름다운 헌신이며 희생과 사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꼭 있어야 할 십자가가 사라졌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자리에 오직 영광과 승리와 축복만이 있을 뿐입니다.
80년대로부터 교회 부흥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오직 신유와 축복의 메시지로 충만했습니다. 멋진 꿈과 비젼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구름 때처럼 그 설교를 쫒아 옮겨 다녔습니다. 부활의 영광과 승리, 기적과 축복을 외치는 교회는 놀랍게 부흥했습니다.
실제로는 교회 부흥이 제자리를 걷고 있는 동안 영광을 찾아다니는 성도들로 인해 또 다른 교회 부흥의 역사들이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십자가는 마음속에서 지워졌고 교회의 메시지에서 사라졌습니다. 십자가의 회복은 이제 교회 갱신의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먼저 성도들 속에서 자기 부인의 회복들이 선행되어져야 합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아서 나를 힘들게 하고 스스로 올무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편안해 지는데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모든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면 모든 것이 문제가 아닌데 결국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잃고서 방황하기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데, 그리하여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아서 여전히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소금과 빛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거는 자기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소금이 소금 그대로 있으면 결코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심지가 타고 초가 녹지 않고서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희망입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방법이 교회입니다.
세상에 교회가 희망이 되고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 갱신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 갱신은 말씀의 회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 갱신은 사랑의 회복을 통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 갱신은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회복입니다.

우리 영생교회 속에 영적 갱신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말씀의 회복과 사랑의 회복 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서 화해와 협력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성령의 불로 태워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세상의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작은 것이 더욱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봅니다. 들녘에 피어 있는 이름 없는 들꼿의 아름다움에 반한 적이 있습니다. 가까이 드려다 보니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갖 잡초와 풀 더미 속에 묻혀 있습니다.
교회에도 이런 들꽃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들꽃들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사실 목회의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숨겨진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이제 그아름다운 들꽃들이 드러나야 합니다. 온갖 잡초와 풀 더미들을 거둬내고 진정 아름다운 것을 세상이 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희망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가 이 땅에 방법이며 대안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그렇습니다. 이제 교회가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강렬한 불빛이 되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일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힘으로 일어서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되비추는 것입니다.
빛이라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대표적인 물체는 태양입니다.
태양이 빛을 발산하는 과정을 보면 태양은 항상 자신을 불태우고 거기에서 빛을 내어 세상의 모든 것을 비취고 그것에 생명력을 공급하고 온갖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중요한 것은 만일 태양이 자신을 불태우는 일을 멈추면 태양은 태양으로서의 생명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불타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태양은 태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태양은 무한한 자신의 에너지를 생산하여 끊임없이 불꽃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사명과 교회의 생명력을 잘 표현한 비유입니다.
끊임없는 자기희생과 갱신만이 교회가 교회되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자기희생과 갱신만이 세상을 뒤덮는 온갖 죄악과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고 환한 세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일치를/ 절망과 슬픔이 있는 곳에 소망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냉소적이고 도식적인 곳에 온화하고 유연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가 가득한 세상에 너를 생각할 이타주의를 심어야 합니다.
교만과 허세가 있는 곳에 겸양과 성실이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의 빛된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모습입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의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어떻게 이 땅에 희망이 되고 방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5-16)

착한 행실은 거듭난 성도의 삶입니다.
착한 행실은 말씀이 회복되고 사랑이 회복되고 십자가가 회복된 성도와 교회의 모습입니다.
착한 행실은 세상에 드러나는 교회의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착한 행실은 가정과 자녀의 비젼이며 하나님의 선교의 비젼을 성취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외칠 것입니다.
“그래 우리의 희망은 교회야”
“그래 저 교회들의 모습 속에는 우리의 희망과 자녀들의 미래가 있어” 라고 감격하며 외칠 것입니다. 할렐루야

섬김과 나눔이 풍성해지는 영생감리교회!
예수님의 웃음소리가 가득 넘치는 영생감리교회!
세상에 희망을 주는 영생감리교회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