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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따르는 믿음 (요 2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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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서울 안디옥교회 신석화목사님은 교회공동체가 화석처럼 굳어지는 것을 가장 경계한답니다. 그래서 해마다 직분을 재임명하는데, 2000년 1월에는 안디옥교회 집사 200명이 재임명에서 탈락했고, 2001년에는 100명, 2002년에는 20명이 집사 직분을 잃었답니다.
매년 8가지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기준은 이렇습니다.
1) 주일성수를 했는가?
2) 1년에 성경을 1독 했는가?
3) 1년에 한 사람 이상 전도했는가?
4)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가?
5) 부모를 공경하는가? 혹 불효자 소리를 듣지는 않는가?
6) 우상숭배는 하지 않는가?
7) 교회에서 한 가지 이상 봉사하고 있는가?
8) 일대일 양육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떠세요? 집사의 직분 기준인데…….
왜 이런 기준이 필요할까요? 대부분의 교인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워놓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난 이정도면…….”, “이 정도면 되는 거지” 등등. 심지어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도 아내에게 “교회 일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늘 경고성 당부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 스스로 결정해 버립니다. “난 가진 것이 없으니까”, “난 배운 게 없어서”, “난 몸이 약해서” 심지어 “난 믿음이 부족해서” 그리곤 적당한 선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스스로 만족해합니다.

정말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다면, 정말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혼자 사는 여인이 드리는 마음으로 작은 액수지만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몸이 약하지만 “주님을 사랑하기에 제 몸을 드립니다.” 하는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잡하고, 몇 가지 기준을 세울 것 없습니다. 늘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난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곤 한걸음 더 주님 앞에 나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신앙은 포기하는 것 이 아닙니다. 신앙은 해보고, 또 해보고, 또 해보는 겁니다.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세상의 기본은 믿음입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때로는 믿을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믿으려고 애를 씁니다.
더욱이 모든 종교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을 신도 또는 신자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믿음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부처 믿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지도 말라. 미워하지도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나니.” 그런 거 아닙니다. 죄짓지 않기 위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무더운 여름 날, 그늘에 앉아서, 혹은 에어컨 바람 아래서 시원함을 누리는 것이 평안함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일하고 땀 흘리는 것이 진정한 평안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술자리에서 술을 먹고, “오늘은 내가 십자가를 진다.” 하면서 술값을 내는 겁니까? 다들 술 마시고 흥겨운데 운전해야 하기에 혼자만 음료수 마시고 “오늘은 내가 십자가를 진다.” 그것이 십자가입니까? 좀 지나친 예인지 모르지만, 대부분 남이 안 하는 것, 남이 싫어하는 것을 내가 하는 걸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여기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죄인이지만 그래도 사랑하시기에 자기 생명을 희생시킨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믿음이란 십자가 밑에 나가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십자가 밑에 나가 내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일이 있을 때 한 번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영원히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자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스스로 판단해서 “요만큼 했으니 되었다.”가 아닙니다. 따라가고 또 따라가고 또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일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평생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입니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만나신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자나 속회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풀이나 먹이고, 물을 먹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이셨습니다. 목회자나 속회지도자들은 그렇게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인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22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377장,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할 때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1. 내 뜻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18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는 것입니다.(19절)
부름 받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다 한다면, 그의 결국은 평안과 기쁨과 만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표현대로 하면 그는 복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리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죽었겠습니까?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온 인류를 사랑하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참으로 많은 아름다운 찬양이 있지만, 전 이보다 더 아름다고 굉장한 찬양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역시 “다 이루었다.”고 했을 겁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맡기신 일, 내가 생명 다하기까지 할 수 있었다.”는 감격과 기쁨과 만족이 베드로에게 있었을 겁니다. 복은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순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계신 예수님을 스데반이 보았다면 베드로도 보았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끝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곳만이 아니더라도, 내가 원치 아니 하는 곳이라도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부른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이 필요해서 주님을 원한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필요해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죽든지, 살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누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치 않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시면서도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것을 알기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함정에 빠집니다. 남과 자기를 비교합니다.
“나는 원치 않는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이 제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예수께서 사랑하셨으니까 이 제자는 특별할 거야.”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하실 때, “그럼 그렇지. 이 제자는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니까 죽지 않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쁜 겁니다. “난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할 텐데, 저 제자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죽지 않는다니……. 그럼 난 뭐냐?”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마 베드로도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그래요. 예수님께 이 아무개를 이렇게 하셨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아무개를 통해 하시려는 계획이 있듯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하실 예수님의 계획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각자의 길을 가는 겁니다.
“누구 집 아들딸들은 잘 되는데, 우리 집 아들딸들은 왜 이 모양이냐?”고 속상해 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 또한 예수님의 계획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 예수님을 향한 눈길을 돌리니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기왕에 비교하려면 더 잘하려고 결단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하나하나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가 유명하다고 다 베드로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대단하다고 다 바울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누구하고 같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보세요. 쌀밥만 밥입니까? 보리를 좀 넣으면 밥이 아닙니까? 콩을 좀 넣으면 밥이 아닙니까? 팥을 좀 넣으면 밥이 아닙니까? 각 다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겁니다. 이사야 같이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 하고 결단하는 겁니다.
쭈뼛거리지 마십시오. “내 같은 게 뭘 하겠느냐?”고 스스로 낮추지도 마십시오. 가긴 것 없다고, 배운 거 없다고, 주저앉아 탄식하지 마십시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대단한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5천명이 먹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주님 손에 들려졌을 때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 남겼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손에 잡혀 쓰임 받기만 하면 그보다 더한 역사가 나타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치병에 걸렸다가 살아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손에 잡히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복음을 전해서 죽어가는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되었다면 이것이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는 주님의 기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낯선 길을 여행할 때 그 길을 훤히 아는 안내자가 있다면 별 고생 없이 여행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삶에는 지도도 없습니다. 나침판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길을 잃어버려 고생하기 쉽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끝내 멸망에 이르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잃어버리면 고생은 물론 끝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때문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히 12:2)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신 주님을 따르십시오. 예수님의 길이 생명의 길이요, 은혜의 길이요, 복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르면, 그래서 죽기까지 그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교리와 장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슨 기준 같은 건 왜 필요하겠습니까?
믿음을 가지되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래서 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기적들을 체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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