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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편애(偏愛) (창 1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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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부모란 것은 평생토록 자식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께서 어느 목사님 사모님과 만나셨는데, 그 사모님의 아들이 뭔가를 해 보겠다고 하다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봅니다. 그 일을 해결해 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셨던 그 사모님께서 제 어머니께, “자식 가진 것이 죄인가 봐요.”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매사에 보면 자식들은 끝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그 골치 아픈 뒤치다꺼리는 부모들이 대신 나서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아브라함을 택자 이스라엘의 첫 사람으로 키워 가시는 과정에서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리는 인물이지만, 사실 제대로 따져 보면 아브라함도 하나님 속 썩히는 일을 꽤 자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저질러 놓은 일들을 깨끗이 뒤치다꺼리를 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 땅에 와서 새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의 초기 단계에 있을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부부의 이름조차 아직 옛날 그대로 ‘아브람’과 ‘사래’였을 때였지만, 편의상 오늘 설교를 통해서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신 새 이름들, ‘아브라함’과 ‘사라’로 호칭하고자 합니다.

창세기 12장 1절 이하 9절의 말씀에 바로 저 유명한 사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셔서 그 ‘지시하시는 땅’ 가나안에 와서 살게 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그 직후에, 이 아브라함은 당장 ‘한 건’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브라함의 연약한 면모는 오늘날의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꼭 같이, 그리고 자주 발생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아브라함의 잘못을 처리해 주셨습니까?
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신자들은 이 세상 사회를 살면서 여러 가지 실수와 잘못들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얼마나 자상하고 은혜롭게 당신의 자녀들을 뒷바라지해 주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가 자기 양심을 속이는 잔꾀를 부려서 불신자와 상대하려 하면 반드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창세기 12장 10절부터 13절에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약간에 의존하던 가나안은 기근이 흔한 땅이었고, 반면에 애굽은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에 의지하여 농사가 잘 되었으며 예로부터 곡창지대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기근이 닥치자 자연스럽게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영주할 목적으로 애굽으로 간 것이라면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린 행위이며 틀림없는 잘못입니다. 하지만 기근을 벗어나기 위하여 잠시 동안 피난 다녀 올 생각으로 간 것이라면 또 그렇게 무조건 나쁘다고 속단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말할 때 어쨌든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만 가지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났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난의 여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진짜 더 큰 잘못은 애굽으로 내려간 그 자체보다는, 그렇게 가면서 사전에 공작해둔 계획에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애굽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자기 아내 사라가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것 때문에 생긴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에게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고 말을 꺼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세상의 아내들이 자기 남편으로부터 제일 듣고 싶은 말, 평생 매일 들어도 또 듣고 싶은 말일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그런 말을 해 주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75세 이상이었고 사라는 10년 연하였으니 적어도 65세 이상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127세까지 살았으니까 그 당시의 사라는 오늘날로 치자면 삼사십대의 중년 여인에 해당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표지 모델은 새파랗게 젊은 애들이 다 차지하고 있지만, 여성으로서의 무르익은 아름다움은 오히려 중년 지나서부터 더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듣기 좋은 말을 아내 칭찬하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 걱정하느라고 했었습니다. 그런 아리따운 사라를 애굽 사람들이 보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내어놓은 해결책이라는 것이 자기 아내 사라와 함께 애굽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거짓말할 것인지를 미리 짜두는 것이었습니다. 그 거짓말은 바로 사라를 자기의 ‘누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말은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20장 12절에 있는 대로 사라는 아브람의 이복누이로서 아내가 되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소위 ‘반쪽 진실(half truth)’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아무리 반은 진실이라 해도 전체적으로는 역시 거짓말이 될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18절과 19절에서 바로가 항의할 때에 아브라함이 아무 변명을 못한 것도 제 자신이 거짓말한 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튼 아브라함으로서는 제 딴에 잔머리 굴린다고 굴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잔꾀는 오히려 완전 역효과를 보게 됩니다. 14절부터 16절 말씀에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들이 애굽에 도착하자마자 온 동네에, 아니 서울 장안까지 당장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본문에 ‘바로의 대신들이 사래를 바로 앞에서 칭찬했다.’라고, 장관들이 국사를 의논해야 할 국무회의 석상에서 대통령에게 한 여자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게 만들 정도로 사라는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바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당장 사라를 자기 궁으로 데려왔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라고 했으니까 바로로서는 일말의 거리낌을 가질 필요도 없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제 꾀에 제가 빠져 버린 꼴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바로가 처남(?)에게 선물로 준 ‘양, 소, 노비, 암수 나귀, 약대’를 받고 하루아침에 거부가 되기는 했지만 그 기분은 어떠했겠습니까? 자기 아내를 빼앗기고도 자기가 해 놓은 거짓말 때문에 아무 소리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 얼마나 죽을 맛이었겠습니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순전히 자기 꾀로 어떻게 몸보신해 보려고 하다가 당하게 된 자업자득이었습니다.

신자라는 존재는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얕은 꾀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런 꼴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불신자와 어떤 문제로 갈등이나 대립 상태가 될 때, 그 불신자가 이해해 줄 수 있는 말로 적당히 구슬려 보려 한다든지 혹은 그 불신자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게 적당히 양보하고 들어가려 하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불신자와의 대결에서 지레 겁을 먹고 일단 한풀 꺾이고 들어가는 사람은 더욱 헤어날 수 없는 곤란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는 자승자박이 되고 점점 더 연약하게 되며 더 큰 시험에 걸리게 되고, 그럴수록 불신자 앞에서는 그만큼 더 비참한 꼴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자와 정면 대결해야 할 곳에서 그렇게 꼬리를 내리고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주일성수 문제를 두고 불신 사장 앞에 처음부터 당당하게 나가야 합니다. 취직할 때에는 일단 숙이고 들어가고 처음 몇 달 동안은 주일날 일하라는 대로 하다가 나중에 가서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하면 절대로 ‘나중에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설이나 추석 때 조상제사 문제를 두고 불신 부모 형제와 갈등이 생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받을 때 그런 것들은 다 미신이고 우상숭배라고 배우고 고백했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예수님 믿기 때문에 이런 것은 못합니다.’라고 영적 선전포고를 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결단과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난관을 잠시만 피하려고 궁리하고 자기 양심을 속이는 행위를 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진퇴양난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잔꾀 부려서 불신자를 상대하겠다고 하면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의 비양심적인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시키는 ‘반쪽 진실’은 결국 자승자박을 낳게 될 뿐입니다. ‘반쪽 진실’은 ‘반쪽 거짓말’이며, ‘반쪽 거짓말’은 절대로 진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거짓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 거짓말 가지고 겨루는 싸움에 있어서는 신자가 도무지 불신자의 상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불신 사회에 섞여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되는 여러 경우의 갈등과 대립에 직면하게 될 때, 절대로 자신을 합리화시키려는 잔꾀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처음부터 자신의 신앙양심대로 당당하게 대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철저히 당신의 자녀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때 문제 해결을 받게 됩니다.

본문 창세기 12장 17절부터 20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제가 엎질러 놓은 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라를 구출하기 위하여 작전을 개시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일은 순전히 아브라함이 저질러 놓았는데 하나님께서 대신 뒤처리해 주려고 나서셨습니다.
잘못한 쪽은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인데도 하나님께서 그 아내 「사래의 연고」 즉 사라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무슨 벌을 주셨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아니 무슨 꾸중이나 경고를 했다는 말조차도 없습니다. 굳이 그런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만 하면 아브라함은 이미 깨달을 것 다 깨닫고 회개할 것 다 회개할만한 수준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적어도 그 정도로 통하고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오직 아무 것도 모르고 만사 괜찮을 줄만 알고 사라를 데려왔던 바로만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앙’이라는 것은 어떤 전염병이 아닌가 짐작되는데, 하여튼 바로는 자기 왕가에 갑자가 닥친 재앙이 방금 사래라는 외국 여자 하나를 데려온 일과 직결되었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당신 어쩌자고 나한테 거짓말을 해서 이런 변이 벌어지게 만들었소?’하고 항의만 한 번 하고는, 그 아내 사라는 물론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주었던 ‘모든 소유’까지 다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13장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애굽을 떠날 때 그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인제는 더 이상 찝찝할 것도 없이 아주 합법적으로 큰 재산을 한 몫 챙기게 된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전화위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꾸짖는 대신, 일단 그 난관에서 건져내어 주시는 것부터 먼저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애매한 바로만 오히려 재앙을 당하고 욕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잘한 것 하나 없으면서도 한 순간에 거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불공평하게 보이는 일을 하셨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바로의 편을 드실 수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신의 사람이지만 바로는 하나님 모르는 우상숭배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비록 아브라함이 잘못했다 해도 어쨌든 하나님은 무조건 아브라함의 편만 들어 주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미군 부대에 서무병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우리 중대의 상병 고참 하나가 근무 중에 미군 사병과 싸움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가 미군 중대장에게까지 올라오게 되었을 때, 우리 중대에 연락 하사관으로 파견되어 있던 인사계 중사님은 그 상병을 호출해서 일방적으로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무실 벽 뒤에서 그 소리를 듣다가 참다못해서 인사계 앞에 나서서 “인사계님, 혹시 우리 카투사들이 잘못한 경우가 있다 해도 적어도 인사계님은 그래도 일단 우리 편을 들어 주셔야 할 분이 아닙니까? 이런 일이 생길 때 미군 중대장이나 미군 선임하사들은 일방적으로 카투사 쪽을 비난하기 마련인데, 인사계님까지 그러시면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하고 일등병이 중사에게 따지고 들었던 것입니다. 인사계님께서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기현이, 잘 알겠어. 하지만 앞으로 너도 미군 선임하사가 보는 앞에서 나한테 그렇게 대어드는 모습을 보여 주지는 말아.” 하시면서, 그 상병을 그냥 돌려보내었고, 저의 하극상(?)에 대해서도 더 이상 아무 말씀하지 않고 덮어주셨습니다.

자신이 창피한 꼴을 당했을 때 그것을 무마해 주는 사람 - 참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 설혹 내가 잘못했을 때에도 끝까지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 - 정말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잘못을 지적할 때에는 하더라도 우선 분명히 내 편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람 - 정말 우리가 자업자득의 진퇴양난에 빠져 있을 때 그 얼마나 반가운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바로 그런 분이셨고 우리에게도 역시 그렇게 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신자로서 불신자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이고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을 때, 그 부끄러움을 가려 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 그러면서도 아무 야단도 치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람 가운데서 ‘나에게 그렇게 해 줄 사람이려니.’하고 믿었다가는 나중에 실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못나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실제로 아무리 많이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못난 우리가 그래도 당신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택자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원래의 신분 자체가 사단의 자녀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따지기 이전에 먼저 고치고 싸매어 주십니다. 야단치기 이전에 일단 먼저 구원해 놓고 보시는 것입니다. 정말 고마운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이 신자나 교회를 비난하면 이상하게 기가 죽고 저자세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술 더 떠서 그런 불신자들의 비판에 맞장구를 치면서 스스로 교회 비판에 발 벗고 나서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교회가 세상 사회보다 더 못한 것처럼 말합니다. 교회를 운영하는 방법이 불신 회사를 경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부도덕하고 부정직한 것처럼 교회를 난도질합니다. 그렇게 교회와 목사와 신자를 깎아내림으로써 불신 사회로부터 오히려 올바른 기독교인인 것처럼 인정받으려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참 희한한 사람이요 참 이상한 자세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자녀가 혹 잘못해도 끝까지 당신 자녀 편을 들어 주시는데, 왜 불신자들이 함부로 교회를 비판하는 말에 동조하고 나서는 것입니까?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제사장된 기독신자가 불신자 앞에 도대체 꿀릴 이유가 무엇이 있다고 그러는 것입니까? 든든한 하나님 ‘빽’이 있는데 왜 그런 저자세를 취하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도 하나님은 일단 신자 편이시며 끝까지 교회 편이십니다. 불신자들이 제 아무리 멋대로 비난하고 나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있기만 하면 그것만 가지고도 이미 옳고 그름은 다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하여 비난하는 말은 100퍼센트 다 틀린 말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어디까지나 당신 자녀들의 편이시며 당신의 몸 되신 교회 편이 되어 주시는 이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함으로써 불신 세상의 비난과 도전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든든한 배경이나 능숙한 도움의 손이 있는데도 그것을 의지하려 하지 않고 혼자 용쓰다가 망하는 경우를 세상에서도 자주 겪습니다. 자기 꾀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다가 창피당하고 결국 자기가 다 망쳐 놓은 일을 다른 사람이 와서 처리해 주면 멋쩍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세상과 상대할 때 그런 과오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믿음직한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그 주권과 그 도와주심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신자는, 이 불신 사회 앞에서 항상 조금도 꿀리지 않고 항상 ‘제사장’처럼, ‘왕’처럼 당당하게 멋있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는 특히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했을 때에도 전혀 변함이 없으십니다. ‘나의 믿음 약할 때 주 날 붙드네, 나를 귀히 보시고 항상 붙드네, 구원 얻은 사람을 항상 붙드네, 멸망길로 나갈 때 주 날 붙드네, 피를 흘려 샀으니 놓지 않겠네’라는 찬송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그 참되신 사랑을 베푸시나니’라는 찬송 그대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못난 꼴을 보일 때에도,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잔꾀 부리다가 실패하여 난처한 처지에 제 발로 빠지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 참되신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이 하나님 아버지께, 나의 생명이 붙잡혀 보호받고 있음을 믿고 항상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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