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정직의 함정(3) (마 7:1-5)

  • 잡초 잡초
  • 299
  • 0

첨부 1


- 설교 : 김동호 목사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저는 그것을 ‘믿으면 살고(롬1:17), 죄 지으면 죽는다.’ (롬6:23)라고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궁극적으로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자신의 주(主)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식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란 자기가 자신의 주(主)가 되어, 자기 욕심, 세상 식을 좇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식과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와 우리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고 하였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은 영적인 구원과 삶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은 물론이고 육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직장생활이나, 사업도 믿음으로 하여야만 구원 즉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 그리고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산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깨닫게 되는 문제 중에 하나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살아야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나, 우리의 믿음이 거기서 그친다면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을 이야기할 때, 그 하나님의 뜻과 식을 가장 구체적인 단어로, 설명을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 될까요? 저에게 그것을 물으신다면 저는 그것을 ‘정직’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죄의 삯을 사망이라고 하는데, 죄를 가장 구체적인 단어로 설명을 하라면 저는 그것을 ‘거짓’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식이고, 거짓은 세상 식 곧 사탄의 식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매사에 정직하기를 힘쓰면 됩니다. 우리는 정직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식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직은 율법인 동시에 믿음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은 정직한 자가 고통을 받고 손해를 보는 세상입니다. 정직하면 바보가 되고, 정직하면 손해를 보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식과 뜻을 믿고, 결국에는 정직한자가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좁은 길을 가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는 가장 구체적인 길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 동안 참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귀한 일들을 하여 온 단체 중에 하나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그 동안의 사역을 정리하고 ‘정직’에 집중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일이 많아지고 방대해 짐으로 가장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정직’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역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방대해진 일을 좀 정리하고, ‘정직’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집중적으로 사역을 하자는 의논을 할 때 일부 위원들 중에 ‘정직이 너무 진부한 주제가 아닌가?’하는 의견을 내신 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의견을 내 놓으셨다고 해서 그 분이 ‘정직’을 우습게 여기거나 경홀히 여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직’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절대로 진부해 질 수 없는 근본적인 주제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저의 남은 인생을 보다 정직해 지는 일에 걸겠고,(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해 질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에게 정직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에 걸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가장 구체적인 일 중에 하나라고 믿으며, 사랑하는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주는 가장 훌륭한 일 중에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직’에 도전하십시다. 원죄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절대적인 정직에는 물론 이르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정직하게 살려고 발버둥질 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크리스천하면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수 있도록 정직에 생명을 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우리가 정직하게 사는 사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우리가 형통하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정직하게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에 많은 함정들을 파 놓고 우리를 정직하지 못하게 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정직의 첫째 함정은 ‘정직하면 손해 본다.’ ‘정직하면 바보 된다.’는 거짓을 퍼트리고 그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출판하였을 때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의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 비판 중에는 ‘깨끗한데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느냐?’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이 바로 사탄의 함정에 빠진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깨끗하면 성공할 수 없다. 물론 부자가 되는 것이 성공의 전부는 아니지만, ‘부자가 될 수 없다.’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속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을 통하여 모로 가지 않으면, 서울을 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이 그와 같은 사탄의 거짓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거짓을 사용할 줄 알아야만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타락하고 왜곡된 세상에서 그 말은 실제로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다가 손해를 보고, 심지어는 죽고 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고, 망하면 망한다.’는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그것을 뛰어 넘어야만 합니다.

정직의 둘째 함정은, 교만입니다. 힘들게 사탄의 첫째 함정을 뛰어 넘으면, 사탄은 즉시 그 첫째 함정을 뛰어 넘은 사람들을 위한 둘째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이라는 함정입니다. 그 함정에 빠진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우리의 정직하지 못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의로, 다시 말해서 정직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앞에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정직의 둘째 함정에 빠지게 되면, 남보다 조금 나은 의와 정직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실존적으로 붙잡을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잠 16:18)

오늘은 정직의 함정에 대하여 세 번째로 말씀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정직의 두 번째 함정인 ‘교만’에 대하여 계속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교만의 끝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이후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설픈 정직으로 교만하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이 되어 인간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정직의 함정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번역이 잘 못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심판’ 또는 ‘판단’이라는 말로 번역을 하여야 뜻이 바로 통하는 말씀입니다.

제가 찾아 본 영어 성경은 모두 그 비판이라는 말을 'judge'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판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판단 또는 심판이라고 번역을 하여야 옳습니다. 우리는 비판과 판단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비판과 판단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비판은 judgement가 아니라 critic 입니다. judgement와 critic은 엄연히 다른 말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critic은 해야 하는 것이고, judgement는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과 판단을 구별하지 못하여,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번역을 해 놓은 것입니다.

비판(critic)은 있어야만 합니다. 비판이 없으면 모든 사람은 김일성과 김정일과 같은 독재자가 되고, 모든 나라와 교회와 집단과 사회는 북한과 같이 됩니다. 북한이 저토록 비참한 사회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사회에 건전하고 바른 비판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건강치 못한 교회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도 교회 안에 건전한 비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비판이 사라져가고 있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이 비판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바른 비판에 서툴기 때문입니다. 비판한다고 하면서 대부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심판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비판과 판단을 잘 구별하지 못하여,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비판까지 못하게 하고, 비판이 있어야 한다면 함부로 판단까지 합니다. 나라의 문제도 여기에 있으며, 교회의 문제도 여기에 있고, 심지어는 가정의 문제와 자녀교육의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선친은 탁월한 면이 있으셨습니다. 저의 선친은 제가 잘못하면 때리셨습니다. 제가 어려서 가장 많이들은 말 중에 하나는 ‘하나가 아니라 반쪽이라도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저의 선친은 제가 외아들이어서 버릇없게 되는 것을 많이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매를 들어 때리실 때 저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를 맞을 때에도 아버지가 저를 비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의 선친은 매를 드실 때에 한번도 저를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는 너보다 더 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매를 들 때 흔히 범하는 치명적인 실수는 자식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흥분하여 대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는 어떻게 되먹은 놈이 밤낮 그 모양이냐?’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나 밤낮 그런 것은 아닌데 부모는 흥분하여 아이를 밤낮 그 모양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잘못한 일에 대하여 비판하지 아니하고, 아예 되먹기를 잘못 되먹은 놈으로 비난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와 정직의 치명적인 함정은 비난과 판단입니다. 정직의 함정에 빠진 사람은, 그것도 교만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진 사람은 사람을, 그것도 모든 사람을 다 형편없는 사람으로, 되먹지 못한 사람으로, 쓰레기 같은 사람으로 판단하고(judge), 심판하는 것입니다.

영락교회에 있을 때 교인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존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지내면서 한 목사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에게 한 목사님 외에는 목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목사는 목사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한 경우 다른 목사는 다 삯꾼 목사 같아 보였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게시판 토론방에 어느 목사님에 대하여 비난하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자신은 그것을 비판이라고 생각하였겠지만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비판이 아닌 비난이었습니다. 옳고 그른 것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저는 그 목사님 편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사람 편입니다. 저는 그 글을 올린 사람의 입장이 옳고, 비난을 받고 있는 목사님의 입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글을 올린 사람은 비판을 하다가 흥분하여 도를 넘었습니다. 비판이 비난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글을 ‘야 이 아무개 목사 새끼야’로 맺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 글을 삭제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 게시판은 웬만해서는 글을 삭제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에 보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비판은 하되 (옳다 아니다 하라) 판단과 비난은 하지 말라(이에서 지나는 것은)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아무개 목사님은 그 일에 대하여 옳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옳지 않은 일에 대하여 비판하다가 지나쳐서 ‘야 이 아무개 목사 새끼야’라고 욕을 한 사람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의와 정직의 함정은 잘못하면 그 의와 정직이 곧바로 악한 것으로 변모한다는 것입니다.

비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판단과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정직하려고 힘쓰다가 조금 남보다 정직하게 되었다고 모든 사람을 다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거짓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에 저는 설교를 통하여 매사를 십자가를 통하여 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보면, 자신의 죄가 보입니다.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인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타인을 보면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귀히 여기고 사랑하시는가가 보입니다.

정직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정직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는 최근에도 저는 정직에 대한 내적 갈등이 많았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미국과 독일을 다녀왔습니다. 미국에서는 교회 집회를 하였고, 독일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코스타 집회가 열렸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미국 집회는 사적인 집회였고, 독일 집회는 공적인 집회였습니다. 미국 집회를 위한 비행기 삯은 제가 내는 것이 옳고, 독일 집회를 위한 비행기 삯은 교회가 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비행 일정을 함께 잡으면서 모든 삯을 다 교회재정으로 지불하였습니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독일에서 집회를 하면서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미리 하지 못하고 뒤 늦게야 하게 되었다는 것도 부끄럽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구별하여 떼는 것이 쉽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산다는 것은 한도 끝도 없어 보이는 목표와 같습니다.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저는 깨닫습니다. 발버둥질 치는 것일 뿐 결국은 완전해 질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넘어져도 또 일어서서 가보겠다는 것일 뿐 넘어지지 않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비판은 할 수 있겠으나, 교만하여져서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견디기 어려워하실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만 탓하는, 그리고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 외식하는 자여’라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정직에 도전하십시다. 그러나 함정에 빠지지는 마십시다. 정직하게 살다가 이 세상에서 바보가 되고,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식이 통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주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며 사십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혹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렇게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교만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져 바리새인처럼 되지 마십시다. 형제를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리에 빠지지 마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붙잡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