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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 릴레이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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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동규 목사

지금까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숙도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전혀 이런 특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언제나 좋은 제품에는 유사품이나 모조품이 있기 마련입니다. 요즘은 짝퉁이라고 하죠. 긍휼에도 짝퉁이 있어서 잘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긍휼은 측은감이 아닙니다. 긍휼은 측은히 여기는 감정과 함께 그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까지 동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긍휼은 적당주의가 아닙니다. 범죄와 위반을 보고도 미소 지으며 적당히 눈 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면서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은 서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죄에 대해 절대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의가 없는 긍휼은 짝퉁입니다. 적당히 대충하고 넘어간다는 것은 긍휼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셋째로 긍휼은 날마다 부모처럼 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하자면 날마다 목자처럼 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육하신 후에 그들을 ‘친구’라 하셨습니다. 언제나 한 수 가르쳐 주는 위치에 서 있으려고만 하면서 결코 친구의 자리로 내려서지 않는 자세는 자신과 타인을 병들게 합니다. 항상 윗자리를 유지하면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취함으로서 도움 받는 사람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긍휼은 은혜와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초점이 약간 다릅니다.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에 초점이 있을 때는 ‘은혜’라 합니다. 은혜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고통을 돌아보시는 사랑에 초점이 있을 때는 ‘긍휼’이라 합니다. 긍휼은 고통 받는 자의 고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이라는 말은 짐승에게도 쓰지만 은혜라는 말은 사람에게만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짐승에게 긍휼을 베푸시나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대가없음과 관련이 있고,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은 도덕적 책임을 가진 존재만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신약은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고 구약은 하나님의 공의가 잘 나타나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구약의 율법은 사랑과 대치되는 듯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짐승들, 심지어 자연만물까지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셨는데 형제의 잃어버린 소유물을 발견하면 못 본 체 하지 말고 찾아주며, 곤란을 겪고 있으면 반드시 도와주도록 말씀하셨습니다(신 22:1-4). 형제뿐만 아니라 원수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출 23:4-5).더 나아가 짐승들도 긍휼히 여기도록 하셨는데, 제물로 바쳐질 소와 양도 어미와 함께 칠일 동안은 함께 있도록 하셨고(출 22:29-30), 보금자리에서 새끼나 알을 취할 때, 그것을 품고 있던 어미 새를 동시에 취하지 말도록 하셨으며(신 22:6-7), 짐승을 잡을 때도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도록 하셨고(레 22:28), 염소 새끼를 어미젖에 삶는 요리를 금지하셨습니다(신 14:21). 심지어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 25:4)고 명하셔서 짐승이라 할지라도 실컷 부려먹기만 하고 자기가 수고한 것에 대한 열매를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막으셨습니다. 또한 토지도 6년 동안은 열심히 경작하여 소출을 거두고 7년째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도록 하셨습니다(레 25: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이 삶 전반에 걸쳐 긍휼을 행하는 삶이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족친지나 동포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 또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긍휼히 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냥을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짐승을 부리거나 무엇을 대할 때라도 긍휼의 자세를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삶에서 긍휼이 베어나오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신약에서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이 잘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적당히 눈감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속물로 삼으셔서 철저히 진노를 쏟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철저한 징벌과 함께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긍휼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혹은 긍휼이 크로스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시며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눅 23:34).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여 주심으로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를 용서하신 것보다 더 큰 긍휼은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를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던 것보다 더 큰 긍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러한 긍휼이 있었기에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선포는 가장 우선되면서도 중요한 긍휼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 역시 이웃에 대한 가장 큰 긍휼의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긍휼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긍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를 발견하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스케줄을 변경하여 그가 치료받을 수 있는 장소까지 옮겼습니다. 치료비와 입원비도 대신 지불했습니다. 물론 그가 직접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옆에 항상 있으면서 간호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강도만난자의 회복을 도왔습니다. 스케줄을 약간 변경해서 시간을 내었고, 여행경비를 약간 줄여서 도왔습니다. 이처럼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조금도 내 계획에 차질이 없기를 바라고, 조금도 내 소유에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심정으로는 긍휼을 베풀 수 없습니다. ‘내 것 내 먹고, 네 것 네 먹자’는 독한 마음으로서는 도무지 긍휼히 여길 수 없습니다. 또한 원수에게 까지 긍휼을 베풀려면 ‘용서’의 기도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긍휼을 베풀고 있는가? 이 질문을 세분화하자면,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첫째는 ‘나는 예수님처럼 용서를 베풀고 있는가?’이고 둘째는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와줄 수 있는 입장에 있을 때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돕는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운 자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고상하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원수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빠집니다. 용서가 안 되서 입만 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은근히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깎아 내리게 됩니다. 마음으로 소화되지 않기 때문에 입으로 자꾸 토해져 나오는 것입니다. 원수가 환난을 겪기를 은근히 바라게 되고, 환난을 당하면 고소하게 여기는것이 인간의 본성 아니겠습니까? 또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나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도와주고 끝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자면 왜 긍휼히 여겨야만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해하고 깨닫는다고 해서 반드시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와 깨달음이 선행하지 않고서는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긍휼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아내나 자식도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긍휼히 여김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분명한 인식과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해일이 덮쳐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친구 만나러가던 지하철 안에서 목숨을 잃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 일이 나에게는 안 닥친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사람의 처지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습니다. 어제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가 되고, 어제의 약자가 내일의 강자가 될 수 있습니다. 늘 내 도움이 필요한 것 같던 존재에게, 오히려 절박한 도움을 요청해야 될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실제로 우리 삶에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입장에 있었을 때 긍휼을 베풀지 않았던 사람은 긍휼히 필요한 때에 긍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13절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하겠지만, 긍휼을 베풀지 않은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의 심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항상 남을 돕고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때로는 일방적인 낭비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 다 갚아주십니다. 긍휼히 여기려는 사람은 손익 분기점을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딤전 6:17-19; 고후 9:6, 9-10).

참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맛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깁니다. 그를 통해 긍휼을 맛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긴 사람은 자기도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래서 긍휼 릴레이가 형성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는 이러한 특성을 삶 속에서 잘 나타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해 우리 교회에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일들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올해는 더욱 긍휼이 풍성한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때때로는 긍휼히 행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긍휼히 여기려는 ‘자세’는 항상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장은 행위에 실패하였을지라도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자하는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 행동에서 실패했다고 해도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서로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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