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보다 더 큰 것을 보리라 (요 1:45~51)

  • 잡초 잡초
  • 492
  • 0

첨부 1


- 설교 : 강구원 목사 (2월 27일 주일 설교 말씀) 

믿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 11:1). 앞서간 선진들은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히 11:2).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는 역사 세계를 B.C와 A.D로 갈라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갈릴리로 나가려고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자기를 좇으라고 했습니다(요 1:43).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요 1:45).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와 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나사렛 동네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나다나엘은 직감적으로 그렇게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극찬했습니다(요 1:47).
나다나엘이 예수께 말하기를 {어떻게 나를 아느냐}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했습니다(요 1:48).

나다나엘이 예수께 말하기를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요 1:49). 이때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0).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이보다 더 큰 일이 무엇입니까?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것은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Ⅰ.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에서부터 점층적(漸層的)으로 계속되는 메시야 사역입니다.

본문 1장 47-48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이란 뜻은 마태와 함께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에 근거해서 말했습니다.
본문 1장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빌립이 율법에 충실했던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나다나엘의 격한 반론을 받고 말았습니다(요 1:46).
나다나엘의 이와 같은 표현은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했습니다(요 1:46). 이 말은 성육신 하신 메시야를 직접 보라는 확신에 찬 말입니다.
우리의 한결같은 관심은 나다나엘을 향한 빌립의 전도입니다. 빌립의 전도는 현명했습니다. 자신의 전통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나다나엘에게 시실주의에 입각한 전도를 했습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은 자기 발로 예수께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나다나엘을 본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요 1 :47). 여기서 참 이스라엘과 간사하다는 말은 대조되는 말입니다.
구약의 야곱은 형의 발뒤꿈치를 잡는 '간사한 자'란 뜻입니다(창27:35). 마침내 그는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창 25:31-33).
그러나 그는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씨름하다가 과거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간사한 야곱의 이름을 개명하여 이스라엘이라 불러주었습니다(창 32:28).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이른바 B.C의 사람에게는 간사라는 수식어가 붙고 하나님을 만나 신앙생활을 거침없이 잘하는 A.D의 사람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간사한 무리들"이라고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시편 32편 1-2절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주님이 그를 먼저 아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예수님은 그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본문 1장 48절에 『보았노라』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알고 있었다는 예지적인 차원을 넘어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 차원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간의 어느 시점을 두고 잠깐 그를 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고백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메시야 도래를 기다리며 율법을 읽던 율법의 사람일 때도 그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고 그가 예수님을 만나 메시야임을 고백할 때도 그는 역시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 믿기로 이미 작정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Ⅱ. 메시야 사역의 실제를 본다는 말 입니다.

본문 1장 5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된 것은 현재 '이'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 가장 먼저 해야 될 과제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선행되어야 할 사역입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고지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1장 51절에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①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8장 12절에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라고 했습니다.

②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며 하나님의 음
성으로 확증되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1-22절에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③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을 본 후에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④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늘이 열렸습니다. 죄로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늘이 열리고" 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온전히 교통하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보다 더 큰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나타나는 수많은 이적이 당연히 포함됩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②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③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④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승천하시던 그대로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가장 영광스러운 모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Ⅲ.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의 미래적 사건은 현재보다 크다는 말입니다.

본문 1장 52절에 {…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더 큰 일을 본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습니다. 마침내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 사역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꿈을 통해 가나안 땅과 자손의 번성을 계시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8장 13-14절에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장차 야곱보다 더 큰 영적 축복을 자신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다나엘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은 예수님의 전지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① 너는 내(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시 2:7).
②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사 9:6). ③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예수 그리스도)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미 5:2).
④ 인자 같은 이(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7:13).

따라서 예수님의 속성 중에는 전지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① 자존성 ② 불변성 ③ 단일성 ④ 무한성이 있습니다. ⑤ 전지성과 ⑥ 전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보다 마지막을 보는 것은 더 큰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보다 부활을 보는 것은 더 큰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보다 하늘로 올라가심을 보는 것은 더 큰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는 승천을 보는 것보다 심판의 주로 오시는 재림을 보는 것은 더 큰 것을 보는 것입니다. 메시야 사역의 미래적 세계는 현재보다 큰 것입니다.
그래서 현세보다는 내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나라보다는 하늘나라입니다. 전도서 7장 10절에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입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입니다. 우리보다는 내 후손입니다. 처음보다는 끝이 좋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욥기 8장 7절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했습니다.
메시야 사역의 더 큰 것을 보는 것은 우리가 받을 축복과 비례합니다. 지금까지 본 것만 해도 놀라운데 장차 더 큰 것을 본다고 하니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무한한 축복으로 넘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