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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양의 피와 모세의 손을 보시고 (출 12:21-28, 출 14: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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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주제로 19 번째 설교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사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약에 나타난 십자가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구약에 나타난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두 가지 사건은 모두 저주 받을 인간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구원 사건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출애굽의 사건을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했고 신약의 성도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사건이었고 십자가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완성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구약에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출애굽의 사건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출애굽의 사건은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저들을 바로의 학정에서 해방하신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신 구원의 이유와 방식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무슨 이유와 근거로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습니까? 무슨 방식과 방법으로 저들을 구원하셨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내려와서 구원하셨습니다.

  죄인들의 고통 소리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유와 근거입니다. 이미 두 주 전에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죄인들의 고통 소리와 탄식 소리와 신음 소리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이유와 근거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2:23-25).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죄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내려오셔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 속에는 구원을 받을만한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습니다. 우리들 속에는 선함도 착함도 아름다움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들 속에 구원을 얻을만한 한 가지 이유와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와 탄식 소리와 신음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가치 없는 우리들의 고통 소리와 탄식 소리와 신음 소리를 들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강도 만나 매 맞아 쓰러져 죽어가던 한 사람이 도움을 얻은 이유와 근거는 그의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한 강도가 도움을 얻은 이유와 근거도 죽어가면서 지른 조그마한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였을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는 생각하소서”(눅23:42). 예수님은 그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강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과 우리 죄인들이 지르는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히브리 노예들과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고통 소리와 탄식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2,23). 히브리 노예들 속에는 그들을 구원할만한 선함도 착함도 보배로움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온 우주 안에도 그들을 구원할만한 보배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만한 보배로운 재료를 하나 발견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물론 그것을 발견하신 때는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출애굽 전날 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를 자기 집 문에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문 위와 문 양 옆에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he will pass over)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3). 그날 밤 하나님께서 문에 바른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멸망에서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을 넘어가서 (pass over) 애굽 사람들의 집만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의 사건을 유월절 (pass over) 사건이라고 합니다.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신 일은 전적으로 은혜와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양의 피일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 속에는 고상한 인격도 고상한 윤리도 고상한 선함도 보배로운 가치도 마술적인 힘도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혐오스럽게 보이는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신비로운 뜻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보시면서 앞으로 십자가 위에서 흘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를 미리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릴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히브리 노예들처럼 모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를 바르면 하나님께서 최후 심판의 날 그 피를 보시고 우리들을 넘어가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미신 같은 처사였고 무식한 처사였고 저급한 처사였고 비 윤리적인 처사였습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철학자들과 상당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 피의 의식과 피의 종교를 보고 조소하고 무시했습니다. 지금도 상당수의 현대 지성인들이 어린양의 피와 예수님의 피를 보고 조소하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방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예수님의 피를 믿고 의지하면서 그 피를 우리 마음에 바르면 구원을 얻고 그 피를 조소하고 무시하면서 마음에 바르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강도 만나 매 맞아 쓰러져 죽어가던 한 사람이 구원을 얻은 방식은 그의 몸에 포도주와 기름을 부음 받은 방식이었습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가리키고 기름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한 강도가 구원을 얻은 방식도 예수님의 머리와 손과 발과 허리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고 의지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요한은 각각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찬송가 184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실 우리를 보시지 않고 피를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선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고 솔직하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온유하지도 않은 우리들을 보시지 않고 우리들이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들을 지옥의 저주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일은 가장 큰 은혜와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너무나도 귀중한 사실을 꿈에서라도 잊어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안됩니다. 다른 것을 마음과 몸에 바르면 안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고 예수님의 피를 우리 마음과 우리 몸과 우리 집과 우리 일터에 발라야 합니다. 그러면 저주와 심판을 넘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방지일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내 마음의 문에 바르는 것이 피의 복음입니다. 이 피를 바르는 것이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가는 길입니다. 이 피의 표적이 없이 심판을 면할 길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지 않고 그 피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열심, 내 재능을 보시지 않고 그 피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허물을 보시지 않고 그 피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잘 한 것 보시지 않고 그 피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 피는 없고 다른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심판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게 다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그 피만 보시면 심판은 면해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이것이 피의 복음입니다.” 참으로 정확하고 귀한 지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입니다. 피만 바르면 됩니다. 그 다음에 다른 것도 필요하지만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피만 바르면 심판은 면제됩니다. 피를 여러분들 마음에 바르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라암셋을 떠나 숙곳을 지나 홍해 바다에 이르러 그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바로가 말들과 병거들과 마병과 군대를 거느리고 히브리인들을 잡으려고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 놓여 있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출14:11). 두려워하며 원망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구원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구원의 손길을 펴셨습니까? 이번에는 모세의 손을 사용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은 본래 애굽의 모든 보화와 권력을 장악했던 탐욕의 손이었고 애굽 사람을 쳐 죽인 범죄한 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손을 순종의 손으로 성결의 손으로 능력의 손으로 기도의 손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출4:4-7). 모세의 손을 순종의 손으로 성결의 손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나중에는 기도의 손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17:11).

  바로의 군대와 홍해의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출14:26-31).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사용해서 히브리 노예들을 바로의 군대와 홍해의 위험에서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사실 모세의 손은 허물 많은 한 사람의 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보시면서 앞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양 손에 못을 박으시고 피를 흘리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손을 미리 바라보셨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과 별들을 펴신 창조의 손으로 죄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셨고 마지막에서 그 손에 못을 박으시고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내 손을 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된 사도 요한에게 손을 얹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던 사람이 도움을 얻게 된 것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까이 와서 손으로 상처를 싸매주었기 때문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가 구원을 받은 것도 양 손을 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손으로 그를 품어주시고 안아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은 순종과 행동의 표시입니다. 믿음과 사랑 실천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순종과 믿음과 사랑의 손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순종과 믿음과 사랑의 손을 보시고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예수님의 손입니다. 우리의 시대가 주님의 손 안에 있고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458).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무 가치 없는 히브리 노예들을 저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리고 어린양의 피와 모세의 순종의 손을 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가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리고 우리들이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의 피와 손을 보시고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들이 평생토록 잊지 말고 힘써 하여야 할 일은 하늘을 향해서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를 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를 우리 마음과 몸에 항상 바르는 일과 주님의 손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영원토록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여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들의 고통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피의 복음과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순종과 사랑의 손길을 저들에게 펴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도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모세의 손을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족과 여러분들의 이웃과 여러분들의 동포들을 모두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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