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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대교회 기도회 (행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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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설교 : 김성덕 목사

No cross, No crown 이란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왕관도 없다는 말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과정은 고난이라는 터널입니다.
고난을 격지 않고는 신앙의 성숙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사건은 분명히 축복의 사건이지만
축복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진행하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항상 그러하듯이 사탄의 방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사탄의 방해 앞에서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기도로 성령의 사건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사탄의 방해 앞에
초대교회가 어떻게 승리했는가를 배워
나의 신앙의 삶과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능력의 말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럼 성령의 역사로 막 기지개를 펴려고 하는 초대교회에 핍박이 나타나기를 시작합니다. 어떻게 핍박이 시작되어집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행3장에 베드로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고 했을 때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성전에 모인 백성들이 기이히 여기며 놀라 동요를 하니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잡아 심문을 합니다.
[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
그러니 베드로가 하는 말이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노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 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고 기탄 없이 말하니
병 나은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힐난할 말이 없으니
[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 하고는
베드로와 요한을 놓아주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그냥 자라난 교회가 아닙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환난과 핍박 속에서 태어나고 자랍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연구하다 보면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과 축복을 방해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핍박과 고난이 아니라
내부의 위선과 시기와 교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교회의 성장의 걸림돌은 타종교의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믿지 아니하는 종교인들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둔 세력들이 누구입니까?
산헤드린 공회가 누구입니까?
저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건을 기뻐하고 찬양하고 감사해야할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할 지도자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제사장들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사이로 말하면 국회의 여당과 야당 같은 존재들입니다.
저들은 서로 시기하고 적대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하여는 만나서 야합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하고 거부하고 반대했던 그 영이
헤롯과 빌라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리세인 서기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면 살아야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다면
아직도 신앙생활을 해도 성령 받지 못한 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받아 진짜 예수꾼이 되어 살아가려고 하면
세상이 합작하여 방해하고 있다는 점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초대교회 교인들이 저들에게 고난이 다가왔을 때
그 고난을 어떻게 보았으며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과
오늘 우리의 신앙의 삶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현대 교인들은 마치 온상에 자라난 화초처럼
보기에는 시선을 끌만하게 단장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조그마한 문제만 생기면 쉬 신앙을 포기해 버립니다.
똑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데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성령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난에 대한 개념이 달랐던 것입니다.

1) 초대교회 성도들은 저희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우연한 일도 아니고, 하나님이 날 미워해서 주는 것도 아니고,
없어야 할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하나님의 권능과 뜻 안에서 있는 사건입니다.
사도들은 깨달았습니다.
초대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핍박사건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사도들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 초대교회 성도들은 지금 당하는 환난을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27절에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요15:18-19절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그러니 예수 믿고 당하는 환난은
나의 환난이 아니라 주님의 환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저들의 신앙의 초점은 환난에 있지 않고
만유의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라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절대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초대교회 교인들은
움츠려들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소리를 높여
[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이시오 ] 라고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 2편을 인용하며
[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 하며. 저들이 당한 사건을 하나님의 말씀인 다윗의 시편에 비추어 받아 드립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이 말씀 뒤에 나온 말이
[ 하늘에 계신 자는 웃으심이여 ] 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이 말은 세상의 군왕과 관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너희들 아무리 해봐라 나 꺼떡하는지 하고
웃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권력의 최고기관이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는 아무 말도 못하게 입을 털어 막으려고 했지만
저들은 권력자의 위협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저들의 신앙의 삶의 초점은 하나님께 맞추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뿐만이 아니라 삶의 문제 당할 때
우리의 삶의 초점을 어디에 고정하고 있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갈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행7장에 스테반 집사가 핍박자들이 던지는 돌무더기 속에서
만약 저들의 분노한 얼굴을 바라보고 저들의 고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분명히 스테반의 입에서는 살려달라는 비굴한 신음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테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고
저들이 몰라서 그렇사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승리의 개가를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하20장에도 보면 유다 여호사밧 왕 때
모압과 암몬 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유다를 치러 올라 왔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금식기도 하라고 공포하며
대하20:12절 [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도 없고
어떻게 할 줄 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 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하며 싸움도 하지 아니하고 큰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우리도 힘도 없고 어떻게 할 줄도 모를 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42:5절에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초대교회 교인들이 이런 고난과 위협 속에서 모여서 기도를 합니다.
기도의 첫 번째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기도의 내용의 첫 번째는 29절에
[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주의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
위협하는 세력과 역경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그 위협과 역경 속에서도 주의 종들이
포기하지 아니하고, 변명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나 욕심 때문에 기도하지 아니했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가족,
예수 공동체 즉 교회의 승리가 나의 승리인 줄 믿고
하나님 교회가 승리하기 위하여
먼저 주의 종들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생명력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전장에 군인들이
지휘자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걸려 있고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세력들은 베드로 요한을 잡아다가
예수의 이름으로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협박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협박 앞에 서 행4:19절에
[ 하나님 앞에 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고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다 우선적인 기도가
주의 종들로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특히 공중기도 하시는 직분자들이 중요성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꼭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백한 후에는
반드시 먼저 말씀전하는 주의 종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
승리하는 교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줄 믿습니다.
사도바울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기도 당부를 합니다.
[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아리게 하옵소서 ]
제가 여러분들에게 기도 부탁을 드린다면
[ 저의 건강이나 가정보다도
성령의 능력 주셔서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 라고 부탁할 따름입니다.

특히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를 할 때
저들의 기도의 시선이 어디에 맞추어 기도를 했는가 하면

30절에 [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이 기도는 바로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 기도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저들의 병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기도의 핵심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초라한 존재입니까?
자기 자신조차 추스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닙니까?
자기 성품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며 사람들을 변화시킵니까?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배운 지식이 아닙니다.
세상이 부여해 준 권력이나 권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여기 사도행전에서는 그 능력이 병 고치는 것, 기사와 표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능력을 받아야 만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가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있다면
교인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회복케 되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회복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병원에서 병을 고치지 마는
병원이 할 수 없는 병은 교회가 책임을 저야 합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 기도할 때 전에 없는 기도의 형태가 나타납니다.
그 기도 형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31절 [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빌기를 다했다는 것은
1) 기도의 분량을 말합니다.
펜사콜라 브론스빌 교회가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 이유는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미국 교회는
프로그램과 조직 그리고 행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이지,
기도를 충분히 하는 교회는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회장 <죤 길패트릭> 목사님에게
교회의 모든 활동을 점검해 볼 것을 명령하시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고 선포하게 합니다.
그 때부터 브론스빌 교회의 모든 예배는 개혁되었습니다.
특히 주일 저녁 예배는 오직 기도만 하는 예배로 드려집니다.
그 결과, 예배를 드리는 성도수가 늘어나고,
예배 시간이 4-5시간으로 길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1995년 6월 18일 아버지날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충만하게 임한 것입니다
그 후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밤 수천명의 교인들이 모여 기도하며 성령체험을 하고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내일교회도 기도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가 살아 있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리고 여기에 빌기를 다했다는 것
우리는 여기서 초대교회에 나타난 새로운 기도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 없었던 기도입니다.
이렇게 전심으로 일심으로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
오순절 이후부터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백 이십 명이 모여 전심으로 합심해서 기도할 때
방언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놀랍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놀라운 말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기도 중에는 찬양 기도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찬양으로 변합니다. 어떤 사람은 손을 들고 찬양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멜로디가 영혼 깊은 곳에서 넘쳐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음악적인 화음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작곡한 찬송도 아닙니다.
영혼의 노래입니다 새노래입니다. 천국음악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나고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느 집단을 위해 어느 단체를 위해 하나님이 기도를 시킵니다.
즉 영적전쟁을 위한 기도를 시킵니다.
합심하는 기도 속에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기도 속에 있어면 병이 낫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특히 합심기도의 특징은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의 기도가 아닙니다. 가슴의 기도요 성령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소리 높여 기도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소리 높여 부르짖는 합심기도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도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교인도 있습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고 그저 일평생 그렇게 졸 듯 사는 것입니다.
이런 교인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기를 다하는 이 무리 속에 포함되어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빌기를 다할 때 놀라운 체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31절에 보면 세 가지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1. 모인 곳이 진동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끝나자
먼저 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진동이 일어났습니다.
집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지진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한 곳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도 모여서 기도할 때 집이 흔들리기를 바랍니다.
지진이 일어나 사람들이 흔들리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모든 악한 영들과 악한 것들이 떨어질 줄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고
병이 낫거나 기적을 체험할 때
이런 진동의 역사를 체험하며 뜨거운 성령의 불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사건과 똑 같은 사건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의 공식인 것입니다.
이 성령의 공식이 우리 교회에도 임할 줄 믿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어떤 성도는 너무 너무 기쁨이 충만하여
기뻐 뛰며 춤을 추게 됩니다.
지난 월트컵 때 16강 진출하고 8강 진출하고 4강 진출 할 때
어! 한 꼴 들어갔네, 잘 하는데 ~ 하는 사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지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사람, 부등켜 앉고 춤을 추는 사람
환호하며 우는 사람, 얼마나 감격했어면 심장마비를 일으키겠습니까?
성령의 은혜도 너무 강하게 임하면
진동 차원을 넘어 꺼뻑~ 넘어 가버립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한국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바라며 합심하여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무리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담대해 집니다.
특히 믿음이 커 집니다. 지혜로워집니다. 능력이 임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성령충만을
믿음충만 지혜충만 능력충만이라는 말과 같이 사용합니다.
특히 성령충만 받아 담대해 지시기 바랍니다.

3. 주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모인 곳이 진동하며
모인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은혜를 주었습니까?
바로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담대해집니다. 겁이 없어집니다.
어떤 일에 담대하고 겁이 없어지는가 하면
바로 복음 전하는데 담대해지고 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표적과 기적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인도의 유명한 영국 선교사 <윌리암 캐리> 이야기입니다.
그는 열 여덟 살까지는 공부했지만 그 후에는 구두 수선공이 되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구두 수선공이 괜찮을 때입니다.
당시에는 일감이 쌓이고 부르는게 값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성령 받아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손님에게 "예수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하고 확인 한 후에 안 믿는다고 하면 구두를 꿰매고 창을 갈고 그 구두 수선이 끝날 때까지
그 사람을 놓고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 사람에게도 전도를 하고 또 전도를 했습니다.
친구가 가만히 보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요,
한달 두 달도 아닌지라 윌리암 캐리가 그렇게 열심히 전도를 하는걸 보고
[ 자네 본업이 뭔가? 전도하는 것이 본업인가? 구두 꿰매는 것이 본업인가? ]
[ 그 전에는 내가 구두 수선하는 것이 본업이었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이 부업이었기 까닭에
전도를 하게 되면 하고 말게 되면 말고 그랬다네.
그러나 내가 큰 은혜를 체험하고 난 후에는 달라졌네.
나의 본업이 전도요, 부업이 구두 꿰매는 것일세 ] 라고 하였습니다.
윌리암 캐리에게 있어서 구두를 꿰매는 일은 생업입니다.
여러분들은 생업을 본업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전하는 것을 부업으로 삼게 되는 경우는
전도는 하게 되면 하고 말게 되면 말지 않습니까?
사람들을 만나면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말은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예수 믿으라는 소리는 한번도 못합니다.
윌리암 캐리는 열심히 전도하다 나중에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인도에 가겠다"하여 인도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병원 학교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적 선교사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구두 수선공도 성령충만함 받고 나니까
이렇게 전도하는 사람이 되고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 성령에 충만함 받으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핍박 앞에서도 몸을 도사리지 아니하고 되려 저항을 합니다. 왜냐? 신앙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죽은 신앙인지 살아 있는 신앙인지 한 번 점검해 보세요.
1) 죽은 신앙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특징은 죽은 신앙의 특징과 같습니다.
죽은 사람은 숨쉬지 않습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숨쉬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일어나며 가기는 어디에 갑니다.
잔치가 열려도 상관없습니다. 봉사하러 갈 수도 없어요
전도하러 가는 것은 절대 안갑니다.
자신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살릴 수 있습니까?.
2) 반응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웃는 일도 없고 우는 일도 없습니다. 무반응입니다.
어느 여 집사 남편이 드라마를 보다가 곧 잘 웁니다.
[ 여보 남자가 되어 가지고 그까짓 것 가지고 울어요 ] 하니
[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어 ] 하더랍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감정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기쁜 일, 복된 일을 주셔도
기뻐할 줄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찌르고 뒤집어놓아도 은혜 받는 일이 없습니다.
3) 죽은 사람은 양식이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목마른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릅니다.
신앙이 죽은 사람도 말씀을 읽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입맛이 없고 식욕이 없으면
그 사람은 신앙이 죽은 사람입니다.
4) 죽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몰라요.
돌아가신 분들은 입관하면서 보면 옷을 다 벗기고,
몸이 다 드러났는데도 부끄러워하지를 않아요.
신앙이 죽은 사람도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5) 죽은 신앙은 자기주관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냥 뉘여 놓으면 그대로 있고
뒤집어 놓으면 그냥 있고 자기 주관이 없습니다.
신앙이 죽으면 자기 주관이 없고 사탄이 하자면 하자는 대로
죄가 이끄는대로 끌려갑니다.
죽은 물고기는 강물과 함께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결을 거슬려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사람은 호흡을 합니다.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반응이 있습니다. 느낌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양식이 필요합니다.
배고픔을 느낍니다. 먹어야 삽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부그러움을 앎니다. 수치를 앎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주관이 있습니다.
신앙이 살아 있는 사람은
영혼의 호흡인 기도의 사람입니다.
신앙이 살아 있는 사람은
반응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신앙이 살아 있는 사람은
말씀을 사모합니다. 갈급해 합니다.
신앙이 살아 있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앎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써 옷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뜻듯하게 살려고 합니다.
신앙이 살아 있는 사람은
주관이 뚜렷하여 세상과 마귀를 좇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도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세상의 도전과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세상에 맞추지 말고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 맞추고 예수님께 맞추어
온 교회가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 받고 기적과 표적을 나타내며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00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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