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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엡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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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

어제와 오늘 의료선교를 위한 바자회를 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선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시는 준비하며 수고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 . . 여선교회에서, 그리고 주 5일 근무제라 청장년들도 나와 수고하는 것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것이 참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에클레시아” 곧 교회라는 말이 60번 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교회 곧 모든 지역 모든 나라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전체모임을 가르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란? 외적으로는 구원받은 무리들의 모임이며,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인류 인종 차별 없이 주안에서 연결되어, 성령으로 한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고 했습니다. 즉, 여기에서 성도란 성인들, 신앙의 위인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등 그리고 교회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우리 같은 범인들로서는 그들의 그림자도 밟을 수조차 없다고 생각되는 성인들의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하나님나라의 권속, 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그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들이 말입니다. 여러분 그 감격 속에서 살아가십니까?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교인들에게 영안이 뜨여서 그 감격을 맛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우리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계속 성장해 가는 교회입니다. 21절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 .”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거룩한 성전으로 튼튼하게 세워져 사는 교회를 말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완성을 이룬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어져 가는 동사형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라가는 교회입니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생명력 있는, 역동성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1.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화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도 잘 먹고 좋은 집에 산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도 서로 사랑하고 화목해야 행복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건물 크고 돈 많아야 은혜로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화목하게 살아가는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요 좋은 교회입니다.
화목해야 하나님 앞에 복을 받습니다. 화목해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을 받습니다. 화목해야 교회가 은혜스럽고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 예수님은 화목의 직책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주의 자녀로 칭함 받기에 합당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한다는 것은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현장에 뛰어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합니다.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중보를 위해, 평화를 위해, 죄인들의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교회가 화목한 교회, 평화로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무런 십자가도 지지않고 아무런 아픔도 당하지 않고 가만히 불구경만 하면서 평화, 화목이 올것 같습니까?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는 곳에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손해를 보고 오해를 당하고 미움을 당하는 자가 있는 곳에 참된 평화, 화목이 오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22:21) 화목한 삶을 사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이기도 한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 세상에 원수가 많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해도 원수들이 많으면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화목하지 못하여 서로 불편한 관계에서 살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화목하지 않고 은혜로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화목해야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고, 성령이 역사해야 성장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7)
세상에 가장 남들 보기에 민망스러운 것은 형제 사이에 불화한 사람들입니다. 재산 상속무제로,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 . .
누가 잘하고 못하고 간에, 원인이야 어떠하든지 형제 사이에 갈등이 있어 화목하지 못하면 모두 남들에게 비난을 받고 욕을 먹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원인이야 어떠하든지 갈등이 있고 불화 하면 이방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욕을 먹고 하나님 앞에 책망을 듣는다. 성도는 하나가 되어야 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화목한 교회입니다.

2.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섬김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바울은 훌륭한 신학자요 목회자입니다 그는 교회가 건강해 지는 것에 대해서 몸의 지체론을 말합니다. 몸의 각 부위마다 역할과 능력이 다르지만, 그 기능들이 다할 때, 몸이 건강하듯이, 우리 성도들도 각각 다른 은사를 통하여, 서로의 역할을 다하고 하나 될 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은사란 왜 주어지는 것입니까?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은사, 예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치유의 은사. . . 그러나 성경은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사랑이 뭡니까? 섬김입니다.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가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섬김의 은사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에수님의 사랑으로 섬기면 교회는 새로워집니다. 교회는 은혜로와집니다. 교회는 부흥됩니다.
선진국들이 왜 선진국이냐? 돈만 많으면 선진국입니까? 아닙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많는 나라입니다. 국민성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병원이라든가 학교라든가 사회 공공기관에 월급도 받지 아니하는 봉사자들이 많습니다. 봉사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성숙한 모습)

우리나라에도 올림픽, 월드컵 등 큰 행사가 있을 때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수준이 높아져 가고 있는 증거)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도 봉사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 안내위원 - 얼마나 기쁨으로 진심으로, 전문적으로 환영하는지 성전 안팎에서 . . .감동이 됩니다. *식사봉사 - 귀부인들까지 . . * 차량봉사 - 완숙한 신사들이 . .

성숙한 사회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사회입니다. 우리나라는 자원봉사자 비율이 1-2%정도도 안 되지만 선진 국가들은 50%가 넘습니다. 어느 봉사단체의 글에 “자원봉사는 21세기의 패션(fashion)이다”라고 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인 것입니다. 성숙한 사회와 자원봉사자 사이에 연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비성숙한 사회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정성과 몸과 물질을 주어서 그들을 더 빛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봉사는 기독교문화요, 예수님의 정신입니다.(섬기기 위해 오심)

기독교인의 문화는 윗사람이 먼저 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제자들의 발을 닦으심) 누구든지 축복을 빌어주는 데는 나이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먼저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 신자들의 문화입니다.

우리교회가 성숙한 기독교문화를 만들기를 원하시면 축복을 빌어주는 문화, 섬기는 문화,허리를 굽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른이라고 생각되시는 분은, 또는 교회의 어른이라고 생각되시는 분은 먼저 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하고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오늘 교회에 바라시는 기독교문화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회사는 능률이 오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공적인 사람들이고 수준 높은 사람들입니다.

‘섬긴다’는 말이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입니다. 이 말은 ‘종’이라는 ‘디아코노스’와 같은 어원입니다. ‘디아코노스’는 ‘집사’라는 말도 되고, 때로는 ‘종’이라는 말도 됩니다. 우리교회는 종으로 섬기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얼마나 말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과연 얼마나 종이 되고 있습니까?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종이 되어야 한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교회의 직분은 종의 자세로 자원하여 섬기는 봉사직입니다. 팔짱 끼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발벗고 나서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문제가 있는데 직분을 계급으로 알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얻는 것이 출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화>> 부끄러움을 당한 어느 하사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대에 부대건물을 보수하는 일을 하는대 그 하사관은 공사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무로 된 무거운 대들보를 올려놓기 위해 일반 병사들이 끙끙대며 애를 씁니다. 하사관은 ‘뭣들하고 있어 힘내!’라고 고함을 칩니다. 이때 그 옆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 “왜 당신은 병사들을 돕지 않고 서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저는 하사관입니다.”라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지나가던 그 사람은 “그렇습니까? 당신이 하사관인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하사관님, 한 가지 양해를 구합니다. 제가 저들을 돕겠습니다”라고 말을 한 뒤에, 병사들에게 다가가 함께 무거운 대들보를 들어올렸습니다. 이 일이 끝난 후에 그는 돌아서서 “하사관님, 이런 힘든 일이 또 생겨 사람이 모자라게 되면 사령관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기꺼이 와서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현장을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하사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령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미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로 초대 대통령에 오른 죠지 워싱톤 장군입니다.

적극적인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가 됩니다.
바울은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이나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열심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열심이란 말은 ‘뜨거운 마음으로’ ‘심장으로’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까? 심장은 인간을 살고 움직이게 하는 중심기관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 열심이 없으면 겁데기에 불과합니다.

‘열심’은 Enthusiasm 인데 En + Theus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직합니다. 진실합니다. 섬깁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주안에 살기 때문에 . . .
섬김은 낮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0장 35절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주님 다음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그 때 나머지 열 제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분히 여겼다는 말은 그 열명의 제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다 같습니다. 다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대접받고 싶어 하고,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섬김 받고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에 온 것도 하나님으로써 섬김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왔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언제나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면 주님처럼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됩니다. 섬김이 힘입니다. 섬김이 교회부흥의 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심히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영광과 명예와 욕심을 위한 열심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심장의 무게가 남자는 평균 300g, 여자는 250g이랍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심장(열심)을 저울로 단다고 합니다. 심장을 달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떤 열심히 있던 한 교인이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심장을 재었더니 천국 역사상 최고치인 38kg이 나오더랍니다. 그런데 다시 세분해서 나오는데, 자기 명예(이름)를 위한 열심 4kg, 목사님께 관심 끌고 직분 받으려고 연말에 반짝 열심을 낸것이 6kg, 최집사를 시기하고 질투한 열심 12kg, 박집사와 경쟁하기 위한 열심 8kg, 봉사하면서도 김집사는 일을 하느니 안하느니 간섭하고 전집사는 어떠니 저떠니 비난하고 목사님은 왜 이런 일을 하라고 하느냐고 툴툴거리면서 불평 불만하면서 한 열심5kg. 정집사와 일의 방식과 주도권을 가지고 다투고 싸우면서 한 열심이 2kg, 결국 참 믿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한 열심은 1kg밖에 안 남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위한 마음으로 섬기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한 열심은 아닙니까? 인간적인 욕심으로 하는 열심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식어집니다. 그리고 변질됩니다. 참 열심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불평과 불만의 사람으로 변질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면 불순종자가 됩니다. 거역자가 됩니다.
이시간 주님은 정말 주님을 위한 순수한 헌신을 기다리십니다.

3.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라야 합니다.

전도는 방황하는 나의 형제, 나의 이웃, 나의 친구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인생들이 많습니다. 왜 인생이 방황하는 것입니까? 인생의 인도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못 만나면 방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방탕한 삶을 살았던 어거스틴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방탕자가 성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니까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깡패 김익두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전도자 김익두가 되었습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이며,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또한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전도를 책임 의무를 가집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왜 전도를 해야 할까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죽을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 복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사람을 성공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복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부요하게 만드는 능력이 복음에 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비유에도 보면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마22:9)

초대교회성도들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전도자에게는 복과 유익이 있습니다. 전도하면 자신의 믿음이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이 계속해서 자라게 됩니다.
또 땅에서 영육 간에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4.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순종이 있는 교회라야 합니다.

사람은 매우 영리한 존재 같지만 참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인류의 불행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음으로 불순종하였고 영적인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는데 불순종하고 먹었기 때문에 죽게 된 것입니다.
순종은 쉬운 것입니다. 어렵지가 않습니다. 순종은 ‘듣는것’입니다. 하나님은 말 잘 듣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순종하라는 것은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개구리가 몹시 아파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렇게 병이 깊어질 때까지 병원에 안오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그냥 좀 지나면 나을 것 같아서.” “나 참, 이 약을 하루 세번 드세요.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 죽게 되는 병이기 때문에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개를 뒤로 젖히면 안됩니다.”
개구리는 알았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개구리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약을 먹다가 고개 젖혀서. 순종은 쉬운 것인데. . .순종하면 사는 것인데 말입니다. . . .
토마스 왓슨은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보다는 우리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십시오. 순종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순종은 마귀를 철저하게 무력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순종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아담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순종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에수님께서는 순종의 모델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동등됨 버리시고 자기를 비우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낮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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