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리석은 유대인들 (롬 2:17-24)

  • 잡초 잡초
  • 555
  • 0

첨부 1


- 설교 :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롬 강해15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제목은 어리석은 유대인들입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인사합시다. “내가 보기보다는 괜찮은 사람이요” 두 주 만에 롬을 대하면서 저는 많은 갈등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말씀의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의 제목은 어리석은 유대인이 아니라 어리석은 종교인들이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갈등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뛰어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길게 잡아 오늘 말씀의 지적을 희석시키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지적 앞에 내가 설교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누가 이 설교를 하고 누가 들어야 하는 것인지 마음을 들킨 것만 같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설교하며 성도들의 눈을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도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 주님의 긍휼, 주님의 인내와 기다려 주심을 믿고 죄송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목사인 제가 먼저 십자가를 붙들지 않으면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 앞에 굴복하지 않고는 오늘 말씀을 접할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유하십시오. 편하게 들으셔도 됩니다. 혹 설교를 잘 듣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말씀은 목사인 제가 성도님들에게 하는 설교이기보다는 목사가 목사 자신에게 하는 설교로 들으시면 됩니다. 요즘에 유행되는 말들 중에 얼 짱, 몸 짱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얼 짱, 몸 짱 소리를 듣고 싶어 화장하는 기술을 배우고 얼굴을 가꾸는 기술을 배우고 심지어는 성향수술까지 합니다.
또 몸 짱 소리를 듣고 싶어 먹고 싶은 것 먹지 못하고 하루 종일 헬스클럽에 가서 씨름들을 하곤 합니다. 얼 짱 몸 짱에 이어 짱들은 계속됩니다. 마음 짱, 건강 짱, 믿음 짱, 실력 짱, 분위기 짱 등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들을 갖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각자 하나 이상의 자부심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도 자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짱, 출신학교 자녀 요즘은 교회도 한 몫을 합니다.
이런 자부심들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긍정적 자부심이라 하는데 이 자부심은 우리 삶에 큰 유익을 줍니다. 이 긍정적 자부심은 때로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기도 하고 행복하게도 합니다.
왜 대학마다 학생들에게 대학배지를 만들어 주고 달고 다니게 합니까? 이는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라는 이유입니다. 우리교회가 왜 성도들에게 교회배지를 달게 합니까? 이는 안산빛나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긍정적 자부심은 우리 삶에 활력이 있게 하고 서로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들이 부정적으로 자리 잡게 되면 사람이 자기역할도 감당 못하게 되고 쓸데없는 교만 속에 헛된 몽상에 사로잡혀 그 인생이 망가질 위험성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 있을 때 한 가정의 삼남매를 신앙적으로 돌 볼 경험이 있습니다. 삼남매의 엄마 아빠를 위해 많이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 아빠는 서울대를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문리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그로 하여금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작은 직장이라고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하고 일하기 싫다고 자신을 위로합니다. 그러다 유망하게 사회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창생들과의 만남이 있기라도 한다면 자격지심으로 술을 의지하다 알콜 중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정은 매일 다투고 불화는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고 사정을 안 전 그 아이들과 손을 잡고 기도해야만 했고 함께 울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기도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아이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아빠의 알 콜 중독을 치료하게 했고 사회적 학식에 대한 자부심도 깨뜨려 버리시고 서울 우유대리점을 하면서 땀 흘려 사는 비결을 배우고 가정을 회복시켜 가는 과정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헛된 자부심 헛된 교만을 깨뜨리셨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들이 모인 곳은 박사들의 모임이나 장관들의 모임 국회의원들의 모임 등 소위 사회적으로 엘리트집단이 아니라 합니다. 가장 교만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바로 정신병원이라 합니다. 전부 다 자기중심이고 자기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최고라 합니다. 누가 나 사장이야 하면 난 회장이다 라고 답을 한답니다. 다른 사람은 나는 왕이다 하면 내가 언제 너 왕 시켰지 난 너 같은 아들 둔적 없다 합니다. 자부심에는 긍정적 자부심도 있지만 사람들을 아주 교만하게 하여 망가트리는 부정적 자부심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민족들 가운데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민족이 있다면 아마도 유대인일 것입니다. 저들의 민족주의를 보십시오.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23%가 유대계 인들입니다. 중동의 화약고 한 복판에서 매일 테러와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속출하는데도 여전히 이스라엘에는 사람들이 몰려 늘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저들의 자부심은 신앙적인 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입니다. 지금은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나 직경 20cm 되는 빨간 색의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신분표시입니다. 전쟁터에서 조차 철모 속에 이 모자를 쓰고 다닐 정도입니다. 이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런 유대인의 특권의식에 선민의식에 헛된 자부심이라 하며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헛된 몽상에서 벗어나 예수그리스도께 오라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복음 안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복음주의의 신앙인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첫째: 오늘 말씀은 17절에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이렇게 시작합니다.(17-18)
이는 유대인의 자부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요 유대인이라 하는 너희는 율법을 의지하는 자 요,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요, 또한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 되었구나, 그리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자들이 되었구나, 이런 사도바울의 표현은 어찌보면 멋진 말입니다. 율법을 의지하는 자 요,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요, 또한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 요, 그리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자들인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믿는 유대인들의 삶 그냥 보면 가장 멋진 저들의 신앙이 사도바울에겐 왜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선민사상 그리고 특권의식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선조들을 통해 율법을 전수 받았습니다. 저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12살이면 모세오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배우고 익힙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 율법자체가 의지가 되어 저들을 천국으로 데려다 줄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적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유대인들은 율법의 참뜻을 잊어버리고 율법을 마치 부적처럼 적어가지고 조그마한 통에 넣어가지고 다녔으니 그것을 [필라 틀]이라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손목에도 매고 다녔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네피림]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이마에도 멨으니 사람들은 그것을 [메주자]라 했습니다. 이렇게 율법의 말씀들을 가지고 다녔을 뿐 아니라 문지방에도 문설주에도 율법의 말씀들을 써 붙 혀 놓고 마치 그것이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의 내용이 아니라 율법자체를 의지하고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은 외면하고 성경자체를 믿어 나는 성경이 머리맡에 있어야 잠이 와. 배 아픈데 성경을 올려놓으면 나아 한다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율법자체에 메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자랑하며’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저들은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은 이방인의 살육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기며 하나님을 독점했던 것입니다. 랍비들의 글에도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이 땅에 존재케 했는가? 지옥의 땔감을 위해서 준비했다고 적혀 있을 정도입니다.
이 특권의식으로 이방인들을 짓밟아 버립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상종하지를 않습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은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자랑하며’는 하나님을 내세워 자기들의 원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묻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는 나입니까?
유대인들의 최고의 자부심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땅 바닥에 돌을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혈통이나 특권의식을 믿지 말고 진정,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큰 교회라는 특권의식이 있습니다.
큰 교회 다니면 그것이 자기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요즘 성도들은 ‘교회자랑은 있어도 헌신은 없다’라고 말을 합니다. 교회 자랑은 있어도 영성은 메말라 버렸다 합니다. 가슴은 텅 비어 있으면서 교회를 자랑한 들 그것이 진정 믿음일 수 없습니다.
우리교인들 숫자가 유재명 목사입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고 제가 압니다. 교회가 좀 컸다고 작은 교회보다 나은 것은 아닙니다. 성도수가 많다 하며 적은 수의 교회보다 결코 나은 것은 아닙니다. 많다 적다라는 기준은 인간의 기준이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또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하면서 자신은 무너져 있으면서 부모의 신앙만 자랑합니다. 내가 지금 신앙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있을 때 부모의 신앙은 자랑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무너져 있다면 부모들의 믿음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모태신앙을 모태출석이라고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아이가 무슨 신앙이 있어 신앙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문제는 지금도 모태 출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믿음을 따라 아내 믿음을 따라 억지로 나오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의 믿음이나 조상의 믿음이 아니고 다만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삽자가의 구속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내안에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요1: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바울은 가슴은 텅 비어있는 채 형식주의 그리고 선민사상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이여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머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슴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의 척도는 직분이 아닙니다. 가슴이 비어있는 목사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가슴이 비어있는 장로 권사 안수집사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둘째: 이제 유대인들의 헛된 자부심속에 자리 잡고 있는 착각을 보겠습니다.(19-20)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율법의 지식과 진리를 통달한 자신이야 말로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으니 성경공부를 많이 했으니 성경을 많이 알고 있으니 규모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리아이의 선생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스스로의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식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선생 노릇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오래 대하다 보면 형식주의에 빠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믿음이 생깁니다. 내가 율법과 성경을 알고 있는 것이 신앙인줄 압니다. 직분을 맡아 봉사를 오랫동안 하고 있으면서 그 직분이 신앙인 줄 압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면 그 설교가 잘 되었기에 내가 훌륭한 사람인 줄 착각합니다. 설교를 잘 하면서도 가슴이 텅 비어 있을 수 있고 설교를 잘 하면서도 나와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주하는 말이지만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고 사역을 하다보면 스스로 착각하고 스스로 믿음이 생깁니다. 목사인 나에게 잘해야 복 받아 주의 종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야 이것은 은혜 받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지 합니다.
목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섬김을 받는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마음껏 섬김을 받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없습니다. 나 섬기면 복 받아 라고 말을 하지만 어찌 목사뿐이겠습니까?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 우리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목사라고 해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발을 씻어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물며 목사이겠습니까? 그런데 주의 종들이 섬김을 받는 데에 만 길들어져 있고 주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바울의 지적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아 너희가 나는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를 믿으나 실상은 너희가 소경이구나, 너희가 어두움에 있구나, 너희가 어리석은 자 이구나 너희가 어린아이 이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안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형식주의를 깨고 오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가슴에 자리 잡으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내 가슴이 텅 비어 있습니다. 내 신앙이 언제부터인가 형식에 매여 있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어리석은 유대인들에게 던져진 하나님의 질문을 보겠습니다.(21-24)
21절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합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만 했습니다. 말씀이 지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지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고전9:27절에 바울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니라고 두렵고 떨림으로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동시에 자기에게 전했고 남에게 가르칠 때 마다 함께 자기를 가르쳤습니다. 시끄러운 교회를 가보면 목사가 성도를 지적하고 성도가 목사를 지적하고 자기는 묻어버립니다. 자기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나는 죽는다 합니다. 먼저 자기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모든 말씀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목사가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바울은 공격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이는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외침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죽하면 마23:3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느니라. 말씀합니다. 행함이 무너져 있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지적입니다. 주경학자 매튜헨리 박사는 바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덧 붙혔습니다. “설교단에서 설교를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강대상에서 내려오면 형편없는 생활을 하는 것은 딱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다시 강대상에 올라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습니다. 성도를 가르치고 공격을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부족한 이 목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없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제가 도적질 하는 자요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말하면서도 그리 살지 못한 자요
기도하라 하면서도 기도에 전혀 힘쓰지 못한 자요
성경을 읽으라 하면서도 성경 묵상을 충분히 못한 자요
전도하라 하면서도 전도에 힘쓰지 못한 자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보혈의 공로가 아니면 전 여러분 앞에 서 있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여자 성도님이 이혼을 해야 하겠다 하며 자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믿음도 있는 분입니다. 꼭 이혼하셔야겠습니까?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물으니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있기는 있지요 내가 무조건 죽으면 됩니다. 내가 참으면 되지요 그래서 저는 답은 알고 있군요 그러면서 주님과 함께 환경을 이겨 봅시다.라고 위로 한 적 이 있습니다. 알기는 알지만 그렇게 행하기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럴싸한 믿음의 포장지을 벗어버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형식주의 특권의식의 틀을 깨야 합니다.
신앙이 가슴에 자리 잡게 해야 합니다. 가슴이 비어 있으면 신앙인으로 승리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경건의 시간을 갖고 이것을 위해 기도의 시간을 갖고 이것을 위해 섬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더 이상 말로는 안 됩니다. 자녀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보여주는 목사, 보여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의 모범, 섬김의 모범, 용서의 모범, 사랑의 모범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24절을 읽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모독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이 작은 예수이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기대입니다.

-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