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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되라 (삿 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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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바늘이 가면 무엇이 따라가는지 아십니까? 어제 교회학교 원혁이가 제게 가르쳐 주기를 아무 것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원혁아, 바늘이 가면 실이 따라간단다" 그랬더니 원혁이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목사님, 아니에요. 가위로 잘라버리면 안 따라가요"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돼지 꼬리는 왜 흔들리는지 아십니까? 꼬리가 돼지를 못 흔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웃으십시오. 웃음은 긴장을 이완시켜서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심장박동, 근육 상태, 혈액 순환 등에도 영향을 미쳐서 에어로빅 효과를 낸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울산에 사는 어떤 부부가 대판 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싸운 이유라고 하는 것이 아내가 남편 휴대폰으로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고 합니다. 그날 낮에 아내는 회사에서 열심히 땀흘리면서 일하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니까 문뜩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남편의 휴대폰에 문자를 보낸 것입니다. "여보, 사랑해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편이 다짜고짜 화를 내면서 대판 싸웠습니다. 보니까 아내가 "여보, 사랑해요"라고 보낸다는 것이 이렇게 보낸 것입니다. "여보, 사망해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이 소유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결코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여정을 걸어가면서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자기 존재의 가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가 분명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낍니다. 자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줄을 압니다. 그럴 때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여러분, 부모님이 나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는 것보다 더 힘들고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나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한 기대를 회복하십시오.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사모하십시오.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아닙니다. 내 안에 주의 성령이 함께 하시면 나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나는 다시금 일어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이웃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먼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기대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를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보십시오.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을 보십시오.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리고 세무서장 삭개오를 보십시오. 이들은 모두가 주님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변화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십시오. 그래서 나를 드러내는 영웅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주님의 강한 용사로서의 가치를 발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영웅주의를 거부합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영웅은 자신을 높이려는 데 목적이 있지만 용사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6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또'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또 다시 여호와께서 지켜보고 계시는 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못된 짓을 일삼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태평성대가 지나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서 상당한 기간 동안 고난을 당합니다. 그 고난 속에서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양태는 사사기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관심 있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사사기에는 3종류의 세대가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체험세대와 학습세대, 그리고 망각세대입니다. 체험세대는 자신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은혜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을 했던 세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좀 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살아있는 체험 신앙이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으로 물려주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한 세대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하나님으로부터 고통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사사기 전체에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역사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그리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체험적인 신앙을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체험적인 신앙으로 물려주십시오. 결코 이론적이거나 사상적인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의 세대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세대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체험적인 신앙인으로 위대한 지도자의 길을 걸었지만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그 신앙을 제대로 물려주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그랬고, 사무엘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분명히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선지자는 한 시대를 이끌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패역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 자신이 체험했던 살아있는 하나님을 자녀들에게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그저 학습 세대나 망각 세대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분명히 체험 세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때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제 그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 성취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소원하던 아들도 얻었습니다. 수많은 재물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이 하나님에 대하여 학습 세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망각의 세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서 그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드릴 줄 알아야 한다는 체험적인 신앙을 아들 이삭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기록하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이 한 가지 사실은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없는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만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결단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 자녀들도 만날 수 있게 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이 우리 대에서 끝나는 불행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손 대대로 이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자손 대대에 미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생각해 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려고 미디안이라는 요단 동쪽의 유목민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치십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파종 때마다 찾아와서 농사를 망쳐 놓습니다. 이제 갓 뿌리를 내린 것들을 다 파헤쳐 놓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던 거주지에서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산으로 도망하여 구멍과 굴과 산성을 만들고 토굴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미디안 사람들이 농작물에만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소나 양과 같은 가축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도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숨겨 두기도 하고, 먹을 양식을 감춰두기 위해 산에 굴을 파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비참한 생활이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의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비참함을 당했지만 그래도 그 비참함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주위에는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아야 할 사람들이 그 길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7년 동안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다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사람의 사사를 선택하십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밀농사를 하는 아주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요아스의 아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요아스라는 이름은 본래 '절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가 너무나도 절망적이어서 이름을 절망이라고 붙였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뜻밖에도 요아스의 아들로 태어나서 오브라에 살고 있는 기드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결국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오신 이유는 그를 주님의 강한 용사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신앙적 자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되려면 미래의 가능성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셔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크기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소중한 지식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꿈과 가치관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크기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1960년 6월 2일, 8살 난 소년이 캐나다의 매니토바에서 3-4마일 떨어진 타톤 호숫가의 바위 위에서 아사 직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보름 동안 굶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비행기 여행 중에 추락 사고가 발생해서 탑승자 모두가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있는 바위 근처에 24일 분의 식량이 가방 속에 넣어져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추락 순간 그 가방이 기체에서 튀어나와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소년은 그 가방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열어보지도 않은 채 15일 동안을 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풍성하신 하나님이 곁에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소년처럼 아예 무관심하게 손도 내밀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드온은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비천한 농부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기드온은 자기 자신을 단순히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비천한 자이고 보잘것없는 자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향해서 "너는 큰 용사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기드온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기드온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서 제일 작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서 큰 용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기드온의 현재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는 지극히 평범한 농부도 큰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연약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에게 힘과 지혜가 있어가 그가 큰 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큰 용사가 되고 강해지는 비결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큰 용사로 일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마다, 발걸음마다 늘 함께 동행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도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몬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정서적으로 지극히 불안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변덕이 심해서 일관성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그를 처음 보시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여기에서 중요한 말은 '장차'라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그분 앞에 겸손히 복종하는 삶에 나타날 위대한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기초가 베드로를 통해서 세워질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미래적인 가능성을 보시고 그를 믿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헌신할 때에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고, 어떻게 주님의 사람이 될 것인지를 미리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적인 가능성을 보시고 우리에게 다가와 주십니다. 지금은 지극히 미약하지만 우리의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될 것이라는 우리의 가능성을 믿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주님과 동행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한 미래적인 가능성을 볼 줄 안목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장차 주님 앞에서 큰 용사로 쓰임 받게 될 꿈과 비전을 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의 나보다는 앞으로의 내가 훨씬 더 잘 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되려면 불평을 만족으로 바꾸는 비결을 알아 가셔야 합니다.
위대한 화가 티티안은 예술의 재능을 가진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군인에게 군대생활을 포기하고 그의 재능을 그림에 바칠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야심적으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능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절망 가운데 그는 붓을 집어던졌습니다. 티티안은 절망 중에 울고 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 탁월한 예술가는 이유를 묻지 않고 화실로 가서 그의 그림을 쳐다보고 그 청년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티티안은 붓을 들고 미완성인 그의 그림을 심혈을 기울여 완성시켰습니다.

다음 날 그 젊은이가 티티안에게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화실로 왔을 때에 화실 입구에서 완성된 자기의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실패한 그림을 그의 스승인 티티안이 완성시킨 것이었습니다.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림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티티안을 위해 계속하겠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었으므로 나는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를 위해 살겠다. 이제 그의 명예가 곧 나의 명예이다. 그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므로 나도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그림은 세계적인 화랑에 티티안의 그림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순과 불완전함으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말고 우리의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채워주실 주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을 전하는 생애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불만이 만족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생각하는 기드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을 보자마자 불평부터 늘어놓습니다. 그것이 본문 13절의 말씀입니다.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기드온의 불평을 가만히 보면 이것은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불평과도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이 어려움을 당하게 하고, 이 고통과 멸시 천대를 받게 내버려두시는지를 따지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기적을 지금은 왜 베풀지 않는지를 불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마땅히 기적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드온의 이 불평은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불평이 아닙니까?

기드온의 이 따짐과 불평 앞에서 그를 향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따지고 불평하고 있는 그를 돌아보셨다는 말씀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돌아보았다는 말은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를 주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고통이나 절망스러운 상황도 다 살펴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하소연도 다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찾는 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을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겪는 아픔과 형편들을 다 이야기해 드리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이 듣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여기에서 '체휼하다'는 말은 '동정심을 가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불평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안심하라고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입술에서 불평을 거두십시오. 우리의 입술에서 불평을 거두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주님의 강한 용사로 일어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불평을 거둘 때에 우리에게는 만족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되려면 마음의 동기를 중요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그가 가진 소유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의 자세가 승패를 좌우합니다. 기쁘게 사는 사람에게는 기쁜 일이 일어납니다. 슬픈 일이 있어도 기쁘게 살면 기뻐집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그 마음의 자세가 다릅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기자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사람이 무너집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여호와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떠나는 것입니다. 환경이 헌신과 열심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식어진 것입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땅에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를 보고 있는 내 심보가 문제입니다. 심보만 뒤집으면 행동도 태도도 금방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을 잘 지키고 나가면 새 삶의 방식을 택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성을 다해서 시간마다 때마다 마음을 지키십시오.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기에 대한 기대감이 자꾸 일어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내가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늘 자신을 건전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결코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더 큰 기대감을 가지고 믿음으로 설계도를 그리십시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마음이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먹으면 우리가 알지 못하던 자기 기대감이 일어납니다. 자기 역사도 일어납니다. 자기 성취도 일어납니다. 자기 권세도 일어납니다. 자기 복도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능력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마음먹은 정도에 따라 행복해진다" 휴 다운즈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특정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정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한 어느 누구도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행복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행복의 조건을 선택할 자유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풍요로움은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기드온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 너를 사용하겠다. 너를 쓰겠다" 그러나 이 말만 믿고 지금까지 농사만 짓던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하나님께 이렇게 요청합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는 지금 하나님께 하나님 되심의 징표를 구하고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인 것을 확인해야 믿을 것이고, 그래야 말씀에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세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기드온의 이러한 요구가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참으로 믿음이 없고 괘씸하기까지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마음의 동기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드온의 마음에는 의심을 몰아내어서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하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부르심을 보다 강하게 붙잡고자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택하여 세우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의심을 넘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를 원하는 기드온의 애타는 심정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험을 용납하셨던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딱 한 곳에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에게 복을 내리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을 시험하는 것까지 허락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혼자 젖어 있는 영웅이 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되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가능성을 볼 줄 아는 영안이 열려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되려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김으로써 불평을 만족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인생의 참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동기를 보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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