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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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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마태, 마가, 누가 이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길잡이요 안내자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좀 다릅니다. “에고 에이미”(나는 ... 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곧 생명이요, 빛이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얻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다는 것도 곧 예수님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7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았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요 14:11)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라기 보다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 라고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에서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이 어렵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마 구원 받을 사람은 그 당시 소수의 사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을 수 있고, 예수님의 피를 마실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 3:18)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한 순간의 고백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멋진 고백을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고 책망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태초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얼굴, 예수님의 손, 예수님의 발, 그런 것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63절,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뭐가 영이고 뭐가 생명입니까? 그래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곧 “나의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고” 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는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내 음성을 듣고” 그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까?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몸입니다. 영이 아닙니다.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행동입니다.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한 번 물어 보십시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까?” 그 대답은, 돈이 있고, 건강하고, 사회 직위도 있고, 아름다운 집, 멋진 승용차, 공부 잘 하는 아이들, 좋은 이웃... 등등. 그런 것들이 갖추어지면 행복이라고 할 겁니다.

보세요. 지금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바로 전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 남긴 것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 온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요 6:26)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병자 고치시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영적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는 영적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먹고 배부르게 하는 떡, 빵만 보는 육신의 눈만 있었던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어찌 믿으며, 하늘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을 어찌 믿겠습니까?
오죽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 14:11) 그러셨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우리가 우리 눈으로 어떻게 예수님 안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것이 보이지 않거든, 그것을 볼 수 없거든,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 곧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은 육신의 눈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요구는 “그렇게 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믿어라. 그러면 산다.”는 겁니다.

우리 표현은 하나입니다. 육신의 생명도 생명이고, 영적 생명 곧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도 생명입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그 열매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도 다 죽었으니까요.
희랍어는 다릅니다. 육신의 생명을 ‘비오스’라고 합니다. 그것은 심장과 맥박이 뛰는 동안 유지되는 육체의 목숨입니다. 영적인 영원한 생명은 ‘조에’라고 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 됨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차피 죽으면 끝이다.”고 말합니다. 물론 육신의 생명인 ‘비오스’는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나 영적 생명인 ‘조에’는 끝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절 이하에 보면 심판의 자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12절 이하에,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13절에,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사망입니다.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다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14-1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영원한 생명인 ‘조에’와 육신의 생명인 ‘비오스’ 둘 다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께 하신 예수님의 요청은 “나를 믿어라.”입니다. 예수님이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기 때문입니다. 그 떡을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려워요? 예수님의 말씀은 늘 쉬웠어요. “공중의 나는 새를 보아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천국은 마치…….”이라는 등 비유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래요. 심지어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도 갈등 합니다. “먹을 것만 주면 얼마든지 따라가겠는데, 그런데 뭘 자꾸 믿으라 하고, 말씀대로 살라고 하니…….” 어떤 사람은 “결국 그렇구먼. 떡 주고 어쩌고 하더니 결국 자기를 믿으라는 거였구먼.” 그래서 여기저기서 수군수군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되 육체로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수준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 보다 조금 더 아시고, 조금 더 훌륭하시고, 조금 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바울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집에 가두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이하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을 길에서 만나신 예수님은 “두 분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 입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련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 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법정에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 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엠마오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건 자체는 사실대로 알고 있었지만, 그들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사건을 보았지만, 그 사건 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거기 30-31절에, 예수님과 그들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축사 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32절에서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33절,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이 이야기 합니다. 

본문 63절에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데도 소용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그렇다고 영만 구원하고 육은 버렸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육신의 잣대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육신의 잣대로 예수님을 본 나사렛 사람들, 또 유대인들, 그들이 수군거리면서 한 말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가?”(요 6:42) 그 정도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으로 알 수 있어요?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영어 성경은 "Spirit that gives life, life giver" 곧 "생명을 주시는 영,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그런 뜻인데,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잣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의 잣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 상반 절에,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고 하신 겁니다.
아직도 인간이 잣대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 아직도 인간의 잣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 그들은 엄격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 즉 멤버일 뿐입니다. 요한 웨슬리께서 말씀하신 ‘Almost Christian’ “거의 크리스천”입니다. 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습니다.
66절,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능력들을 보세요. 앉은뱅이를 예수님께서 일으키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예수님께서 뜨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보았다면 예수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그 정도면 믿겠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다 믿는 것 아닙니다. 육체의 눈으로, 일어난 사건만 보는 사람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 일어난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이 왜 기록되었습니까? 요한복음 20장 30-31절,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게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기적을 쓸려면 이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쓸 목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기적에 대해 쓴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만 요구하는 사람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정작 생명의 주 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해 떠나간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도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일로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 그것은 곧 마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 즉 겉모습만 보지만 예수님은 영과 육을 함께 보십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가룟 유다,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떠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 속에서 마귀를 보신 것입니다.
겉보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홀로 사는 여인이 헌금한 두 렙돈은 극히 작은 보잘 것 없는 액수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그 생활비 모두를 드린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의 중심, 즉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 12만여 명과 육축을 보신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할 때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우리의 겉모습이나 삶은 늘 부족하고 죄 가운데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 중심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여기시고,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인 것을 보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더 이상 얻을 게 없구나.” 그래서 떠났습니다.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겠느냐?”
그것은 곧 “너희는 날 믿느냐?”는 물으심인 겁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예수님 떠난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보다 자기들의 육신에 보탬이 되는 이득을 찾아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너희도 떠나려느냐?”
이때 베드로의 대답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 것은, 눈으로 보는 기적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 것은 주님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해야 할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생명의 말씀이 아닌 곳에서는 단호한 마음으로 떠나야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 다 얻고도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부자 이야기. 그는 일했고 큰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모자라는 곡간을 더 지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도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오해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것 다 없어도 된다. 나는 예수 믿는 믿음, 그래서 주님 주시는 영생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지요. 그러나 돈도 없고, 건강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생명만 있다면 사는 것은 어떨까요?
일부,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아무렴 어떠냐? 세상은 다 그런 것. 믿음만 있으면 되지.” 그럽니다. 그러나 분명히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생명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생명에 대해 강조하는 요한복음. 그럼에도,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요 10:9)고 하셨습니다.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삶에 필요한 꼴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생명인 ‘조에’ 뿐 아니라 육신의 생명이 ‘비오스’도 풍성하게 해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스기야. 그는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이사야도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시나이다.” 하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히스기야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이럴 때 “난 하나님을 믿으니까 천국 갈 거야. 그러면 되겠지, 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15년이나 더 살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백배나 받을 것이요, 또 영생을 상속 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30절, “그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았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길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출발하게 하신 다음에, 길 저 끝에서 영생을 주시려고 앉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그 영생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능력이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게 되고, 예수님을 떠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없게 됩니다. 굳이 무엇을 얻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와 모든 것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마 6:33) 하셨고,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경우든 예수님을 안에서 사십시오.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구원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영생이요 구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그분의 말씀 따라 살면 영생과 구원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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