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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나타낸 사람 (창 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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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익로 목사

발달된 현대 문명의 특징 중 하나는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옛날에는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들으면서 만족했고, 라디오의 기능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실시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라난 곳은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시골이지만 200여 호가 사는 큰 동네였습니다. 60년대 초 그 동네에 라디오가 두 대 있었습니다. 한대는 초등학교에 있었고, 또 한대는 마을 이장 집에 있었습니다. 이장 집에 있는 라디오는 이장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동네 공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공금으로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라디오 한대로 동내 전체가 듣기 위해 가가호호마다 스피커를 설치하고 그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장이 하루 세 차례씩 라디오를 켰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때가 되면 온 동네가 똑같은 채널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피커를 통해 이장이 마을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장소팔 씨와 고춘자씨의 재치 있는 만담도 듣고, 이광재, 임택근 아나운서의 뉴스와 거침없는 말투의 운동경기 중계방송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지금은 많이 변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이 없습니다. 칠순이 넘으신 숙부님께서 인터넷을 통해 제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교회 예배 설교를 듣기도 하십니다. 이처럼 엄청난 시대의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이 변화는 듣는 것에서 눈으로 보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8의 말씀에“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인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에 이르시기를“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한일서 4:12)고 하셨습니다. 공기가 있지만 눈으로 볼 수없고, 전기나 전파가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고, 소리가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냄새가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역시 사람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칼발트라는 신학자는“하나님은 알 수 있는 분이지 볼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가리켜 증인이라 부릅니다. 증인이라는 말은“확대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분명하게 잘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깨달아 알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여러 가지 기적을 나타 내셨습니다. 바다 위를 걸으셨고, 성난 풍랑을 말씀 한마디로 잔잔케 하기도 하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죄인들을 사랑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음을 깨닫도록 하시고자 무덤에서 살아나셨고, 500여 무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말씀하시기를“(예수께서)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10-1)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승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하나님을 나타내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앞서간 성도들은 하나님의 증인의 삶을 살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세계의 모든 문화는 유럽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럽문화의 특징은 거의가 기독교 문화입니다. 그때 화가들은 그림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자신의 재능을 다했습니다. 음악가들은 자신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영광을 나타내고자 노력했습니다. 문필가들은 글로서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애를 썼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하나님을 나타내려는 증인의 의욕이 지나쳐 잘못된 미혹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수조명 장치로 자기 몸에 빛을 비취도록 한 후 하나님의 빛이 자기 몸에 나타났다고 하거나, 자기 손에 천사의 독수리가 앉았다는 이상한 것으로 성도들을 현혹하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거짓된 방법입니다.

본문의 요셉은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그를 지켜보는 주인의 눈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토록 했습니다. 본문 3절에“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란 사람은 이스라엘 나라의 조상 중 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란 사람이 자기 이름을 고친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이 모두 열두 명이었는데, 그 중의 열한째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효성이 지극하고 착실했으므로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이를 지켜본 형들은 동생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와 미움이 극에 달해 급기야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형들에 의해 인신매매를 당해 노예가 된 요셉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요셉을 지켜본 주인은 요셉의 그 성실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어떻게 주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나타낸 것일까?

1. 요셉의 얼굴 모습입니다.

본문 6절에“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경찰관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직업을 대략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분위기나 그 사람이 늘 생각하는 것들이 은연중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성도, 하나님께 늘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얼굴에는 성도만이 지닐 수 있는 경건함과 온화함이 그 사람의 외모에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모습이 그와 같았던 것입니다. 요셉의 신분은 노예인데 다른 노예들처럼 천박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경건했고, 남다른 온화한 인품이 그의 모습에 배여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스데반이라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에 대하여 기록하기를“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사도행전 6:15)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깊은 신앙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사의 모습을 느끼게 했던 것입니다.

얼굴이 험악하게 생기고 성격이 비뚤어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아름답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러나“당신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없다.”라는 말로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은 인자하게 생긴 가면을 쓰고 다시 청혼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 아가씨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내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서 남편의 과거와 가면을 폭로했습니다. 놀란 아내는 당장 남편의 가면을 벗겼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험악한 얼굴이 아닌 인자한 모습으로 변한 얼굴 모습만 있었습니다. <행복한 위선자>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담고 있는 것에 따라 얼굴표정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처지가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며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기뻐하며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내면의 모습은 외모에 까지 나타나 준수하고 아담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본 주인의 호감을 샀고, 이로 인해 주인인 보다발 장관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명설교가인 영국의 스펄전 목사가 어느 대학에서“설교자의 표정”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는 내용에 걸 맞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천국에 관한 설교를 할 때는 약간 위를 쳐다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면 청중에게 내용이 보다 더 잘 전달될 것이다.”라고 설교자의 표정이 내용 전달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자리에 한 학생이 처음부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도전적인 자세로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이 스펄전을 향해 불쑥 질문을 했습니다.“목사님, 그렇다면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합니까?”스펄전은 인상을 쓰면서 질문한 학생을 향해“평소의 자네 표정으로 지옥을 설명하면 가장 잘 어울릴 걸세”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표정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에 표정이 밝고 잘 웃는 보험설계사는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30%이상 높은 실적을 올린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표정이 밝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사람의 표정에 대해 성경에 말씀하시기를“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하셨습니다. 요셉은 비록 자신의 처지가 형들에게 배신당해 억울한 노예 신세였으나 그는 주안에서 용기와 소망을 잃지 않고 밝게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요샙의 표정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의 눈에 준수하고 아담하게 보였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그 얼굴에 하나님의 사람다움이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뢰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를 귀히 여기게 됩니다.

2. 요셉의 삶입니다.

노예 신분인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그의 재산 전체를 위임받아 관리를 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정직했을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주인이 그의 재산전체를 위임하여 관리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삶의 성실함을 잘 나타내는 기록이 창세기 43:16에 타나나 있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로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때 중동지역 전체에 큰 가뭄이 들어 모든 나라들이 먹을 양식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요셉이 총리가 되어 다스리는 애굽은 미리 가뭄에 대비하여 많은 양식을 예비했으므로 걱정 없이 지냈습니다. 양식이 넉넉했습니다. 이때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고자 애굽에 왔습니다. 자신들이 팔아넘긴 요셉이 그 나라의 총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함께 온 요셉의 형제들 가운데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배다른 형제였으나 열둘째인 막내 베냐민은 요셉의 친동생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할 틈도 없이 생이별한 동생 베냐민이 20년 만에 자기 앞에 나타나 땅에 엎드려 양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베냐민은 당시 최대의 문명국인 애굽 총리가 자기의 형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그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이제 눈앞에 와 있으니 또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당장 신분을 밝히고 부둥켜안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모든 정을 억제하고 있는 요셉에 대해 가록하기를“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그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오정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창세기 43:16)했습니다. 오정에 함께 먹겠다는 것입니다. 공무시간을 피해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동생과 형들을 면회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공과 사가 분명했습니다.

요셉의 삶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처럼 신실하게 살아가는 요셉을 보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보디발의 집안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4-16)하셨습니다. 신자의 위치를 가리켜 숨길 수 없는 산위의 동네와 같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착한 행실로 본을 보일 때, 우리들의 삶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습니다. 기도로 통해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앙 인들은 먼저 믿는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을 빛이라 하셨습니다. 빛은 저절로 발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빛은 반드시 재료가 소모됩니다. 촛불은 자기의 몸을 녹여 태우므로 주위를 밝힙니다. 석유 등은 기름이 타므로 빛을 발합니다. 장작불은 장작이 불에 타 재가 되므로 빛과 열을 발산합니다. 이처럼 희생 없는 빛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희생의 삶을 살므로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희생의 삶, 섬김의 삶, 봉사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으므로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에“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사람을 통해 세상 속에 하나님을 나타내시므로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일본 교토에 MK 택시 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는 한국인 유봉석 회장과 유태식 부회장 형제가 성경적 경영철학으로 운영하는 회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분들의 경영철학은“섬기”과“봉사”라고 합니다. 일반 택시보다 요급이 10%정도 저렴하지만 서비스는 최상이라고 합니다. 교토 시민들은 이 회사를“교토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귀한 손님은 반드시 MK택시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경제의 침체 속에서도 이 회사는 해마다 25%의 매출신장을 기록했으며 신입사원 40명 채용에 8천여 명의 응시자가 몰려왔다고 합니다. 1960년에 택시 10대로 출발한 이 회사는 현재 30개가 넘는 주유소와 수백 대의 택시를 소유한 최고의 운수회사로 성장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섬기라.”는 성경말씀에서 경영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손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손입니다. 섬기신 손입니다. 그러시면서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3-15)하셨습니다.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손과 마음이 주님을 닮은 마음과 손입니다. 낮아진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처 있는 손입니다. 우리들의 손에는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나의 욕심을 채우지 못해 아직도 펴진 손입니까? 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장식된 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못자국난 손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손을 닮은 섬김과 희생의 삶이 어두운 이 세상의 빛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요셉의 깊은 신앙심은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극한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소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밝고 힘찬 모습이었습니다. 요셉은 성실하며 정직한 삶의 자세로 주인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은 주인의 신임을 얻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요셉의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했으며 후대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 복되고 아름다운 요셉의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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