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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매임과 풀림 (창 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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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인간에게 생명의 위협을 크게 하는 병인 암의 발생 원인이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서도 음식이나 유전적 체질이나 쇼크가 암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전적인 체질은 어쩔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음식이나 쇼크는 예방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음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또 주의도 하고 있지만 정신적인 충격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쇼크를 받으면 마음에 응어리가 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분함, 두려움, 미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있으면 우리는 소위 마음이 아프게 되고 그 마음이 아프면 우리는 몸에 이상이 생기게 됩니다. 작게는 밥맛이 없고 잠이 잘 오지 않고, 근육이 경직되고 두통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계속되면 우리 몸에 여러 가지 이상이 생기는데 여기서 암과 같은 무서운 것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들을 풀어야합니다. 풀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무엇인가 몸에 이상을 가져다줍니다. 몸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인생에 고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요셉이고 또 하나는 요셉의 형들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그 마음이 다름으로 인해서 그 인생이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요셉은 인생의 모든 것들을 다 풀고 살아서 자유롭고 건강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풀지 못하고 살아서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고 옹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이 어렸을 때, 색동옷을 입었다고 요셉을 시기하다가 시기에 사로잡혔고 또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한다고 미워하기 시작하여 미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든 동생을 해칠 궁리만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간식을 가져다주고 안부를 묻고 오라고 하니까, 요셉은 "예"하고 그대로 했습니다. 만일 요셉이 형들이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있기에 가기 싫다고 했다면 그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맺힌 것이 없었기에 그냥 아버지의 말씀에 이유를 달지 않고 형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은 그 미움과 시기를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오니까, 형들이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구나. 이 기회에 저놈을 없애 버리고 아버지에게 가서는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죽었다고 하자" 고 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요셉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은 20에 팔아버렸고 그런 뒤에 13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버려두었습니까? 아닙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서 많은 고생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커다란 복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풀면서 사는 사람, 메여있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많은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맺힌 것들을 다 풀면서 살 때 귀한 은혜가 내리는 것입니다.

당시 중동에는 커다란 흉년이 들었고 가나안 땅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야곱의 식구들도 식량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식량을 사러 왔습니다. 그리고 국무총리가 된 요셉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만일 이때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난 13년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너희들도 감옥에서 고생을 해봐라" 고 할 수 있었고 이들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요셉은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원한에 매이거나 미움에 메여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복수대신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의 이름을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그는 복수 대신에 형들을 불쌍히 여겨서 형들이 당황하거나 무서워 할까봐, 또 애굽 사람들이 보는 것이 싫어서 다 물러가게 하고 형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알린 것입니다.

3절 4절에 보면 요셉이 자기의 이름을 밝히자 형들이 무서워서 어안이 벙벙하고 놀라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당신의 원수가 아니라, 당신들의 아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은 오히려 위로까지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참으로 요셉의 인격이 놀랍습니다. 아니 이것은 요셉의 신앙에서 나온 인격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무 것도 맺힌 것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요셉을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요셉처럼 풀면서 사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형들처럼 맺혀있는 인생입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풀면서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요셉은 과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 어린 가슴에 노예로 팔려가서 갖은 고생을 다 했는데 왜 가슴에 맺힌 것이나 한이 없었겠습니까? 묶여서 애굽으로 팔려갈 때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종살이 할 때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 얼마나 분했겠습니까? "형들이 나를 팔지만 않았더라면...." 하는 마음의 한이 있었을 것이지만 요셉은 다 풀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한심하게도 과거를 다 풀지 못하고 계속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남을 풀어주지 못한 사람은 남이 풀어주어도 못 풀립니다. 남을 용서해주지 못한 사람은 남이 나를 용서해주어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 악들을 다 풀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과거에 매여서 요셉의 형들처럼 평안이 없는 사람, 과거의 죄책에 매여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죄인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데 다 과거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하나도 거절하시지 않고 다 용서해주시고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과거가 잘못된 사람들을 예수님은 한 번도 한 사람도 "너의 과거를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잘못된 과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얻는 축복중의 축복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도말하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과거가 죄악으로 점철되었건, 실수와 실패의 세월이었든 과거에 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욕망에 매여서도 안 된다.

요셉의 형들을 보십시오.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또 아무리 질투와 미움이 부글부글한다고 해도 어찌 동생을 다 팔아먹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자기들의 이익이나 질투나 고집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이익이나 질투나 미움을 풀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는 못을 박게 되지만 자신의 가슴에는 암을 박는 셈이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질투나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없을 수가 없지만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그런 것들을 풀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받아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물질이나 욕망 때문에, 질투하고 오기를 부리고, 미워하며 근심하다가 마음 상하고 건강을 해치고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작은 욕망을 버린 자만이 큰 것을 얻습니다. 현재의 삶에 못 박고 살지 않는 자만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끝없이 우리에게 욕망이나 고집이나 오기나 두려움을 부추기지만 우리는 날마다 은혜를 받아서 이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요셉처럼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커다란 복을 얻게 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얻게 됩니다.

미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셉의 형들은 안타깝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귀여워서 채색 옷을 입혀주는 것을 보고는 장자권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요셉이 꿈꾼 이야기를 하니까, 자기들보다 앞서갈까 두려워했고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니까, 자기들에게 복수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으니까, 또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들의 인생을 보면 평생 두려워하면서 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매여 사는 인생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의 형들보다도 훨씬 어렵고 위험한 인생을 살았는데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에 매이지 않았으니까, 돈 때문에 죄지을 일이 없었고, 잠 못 이루는 일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매인 것에 상처를 받습니다. 장작을 패는 사람은 장작에 다치게 되고, 돈에 애착한 사람은 돈이 그에게 상처를 주고, 사랑에 애착한 사람은 사랑이 그에게 상처를 주고, 자식에 애착한 사람은 자식이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예로 팔려갈 때에도, 감옥에 갈 때에도, 바로 왕 앞에 설 때에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두려움이란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고난이 우리를 삼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우리를 삼켜버린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인생을 삼켜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삼켜버릴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두려움의 천적은 믿음뿐입니다. 이사야41:10을 보십시요."두려워말 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 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엇을 다 가졌다고 해도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이고, 믿는 사람은 설사 아무 것이 없다고 해도 편안히 살 수 있습니다. 돈이나, 건강보험이나, 자식이 우리를 편안히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의 미래를 두려움에서 없애 주는 것이며, 그 믿음이 밝고 더 좋은 미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한마디로 매임에서 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진정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악과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과거의 죄, 미움과 욕망의 응어리, 두려움과 공포에서 우리를 풀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풀어주셨는데 우리는 왜 못 풀고 매어 살아갑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남은 것, 응어리진 것, 속상한 것, 남김없이 다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남도 삽니다. 풀지 않으면 남의 속에서는 못이 되고 내 속에서는 암이 되는 것입니다.

응어리는 풀어진다

너무 아프면 차마 아픈 소리도 못 내듯, 응어리가 너무 크면 응어리가 있음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응어리를 그대로 놔두면 응어리는 몽우리가 되고 결국 몽우리는 덩어리가 되어 나의 삶과 영혼을 병들게 하고 황페케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응어리의 덩어리 됨은 또 다른 부스러기가 응어리 되어 다른 사람의 가슴에 응어리 되게 합니다. 그러니, 나 자신과 남을 위하여 우리는 속히 응어리를 풀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정원과도 같아서 방치하거나 내버려 두면, 금방이라도 잡초로 무성해 지고 해충으로 우글거려 보기조차 흉물스럽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경하고 가꾸어 가면, 두고 보기에도 아까울 정도의 안식처가 됩니다.

응어리도 열심히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포기하거나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우연의 응어리는 없을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응어리의 원인이 구체적으로 있었을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응어리는 반드시 어떤 타력의 충격이나 골이 깊은 상처 또는 저항할 수 없었던 시간들의 산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원인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든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새 피조물로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원인을 찾아 제거하지 않고 세차를 하고 기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우선순위로 먼저 해야 할일은 우리의 삶과 신앙의 질을 떨어뜨리는 응어리를 풀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헌신이며 진정한 의미의 주님의 일입니다. 맺히고 묶인 상태로 봉사하거나 사역하면 오히려 다른 지체들과 주의 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의 응어리를 풀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차의 문제를 알기 위하여 정비 공장을 찾듯, 우리의 응어리를 풀려면 나를 만드시고,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찾아 가야 합니다. 나 홀로의 회복은 없습니다. 목마르면 우물을 찾고 배고프면 식당을 찾고 아프면 병원을 찾듯이 응어리를 품고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응어리를 가지고 사람을 찾아, 기대지 마십시오. 또 다른 응어리만 생길 뿐입니다.

우리의 문제와 병은 울 일이 있음에도 울지 못하고 기도의 제목이 태산임에도 기도하지 못함에 있으며 하나님께 아뢸 응어리가 바다만 한데 그냥 끌어 앉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건조한 곳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식물도 자라지 않으며 곡식도 열매를 맺히지 못하며 나무도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몸부림에 여러분의 눈물을 채우신다면 그곳에서 주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또한 무수한 응어리를 수없이 하나님으로 해석하십시오. 여러분의 응어리는 누구 때문이 아니며 무엇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나 되게 하시려고 그 사람을 도구로, 그 일을 방편으로 쓰신 것입니다.  또한 이미 생긴 응어리를 묵상하려 마시고 이후에 우리의 응어리를 푸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신뢰하십시오. 오히려 응어리의 크기가 장래의 믿음의 크기가 되고 쓰임 받음의 크기가 될 것을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좋은 일, 기쁜 일만 생각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지만 기쁨은 만병의 통치약 입니다. 그리고 이제 조용히 내 안에 있는 응어리를 바라보시고 응어리 속에 함께 계신 주님을 찾아내시면 그분이 응어리에 보혈을 뿌리고 성령의 기름을 발라주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다면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기다림이 믿음이라면 조급함은 불신입니다. 감사함이 믿음이라면 불평함은 불신입니다. 응어리까지도 홀연히 선으로 바꾸실,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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