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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는 군대가 되라 (겔 3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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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진회숙이란 분이 쓴 '클래식 오딧세이'라는 책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피에타의 이야기가 아닌 또 다른 피에타의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상입니다. 로마의 베드로 대 성당에 들어서면 오른쪽 복도 입구에 유리벽 안에 보호되어 있는 위대한 인류의 걸작품을 만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끌어안고 세상을 떠나간 그 아들 예수님을 처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조각상입니다.

그런데 진회숙이란 분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받지 못했던 놀라운 감동을 베를린을 여행하다가 베를린에서 또 하나의 피에타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베를린 출신의 여류 민중 판화작가요 조각가인 캐테 콜비츠가 또 하나의 피에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역시도 비탄에 잠긴 한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마치 동물처럼 통곡하고 있는 통한의 모성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진회숙 씨는 이 조각상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받은 그 이상의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조각이 주고 있는 처절한 감동은 아마도 2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1차 대전 때는 자기 아들을, 2차 대전 때에는 자기의 손자를 잃어버린 작가인 캐테 콜비츠 자신의 슬픔이 그대로 이 작품에 투영된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두 개의 피에타 작품에는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통한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작품에는 본질적으로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성모의 품에 안긴 예수님에게서는 부활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캐테 콜비츠의 작품에는 일체의 희망도 없습니다. 그냥 세상을 떠나가 버린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몸부림치는 통곡이 그대로 베어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는 처절한 사건입니다. 일체의 희망을 등져버린 죽음을 오늘 본문에서는 마른 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것도 슬픈데 마른 뼈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마른 뼈로 이리 저리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는 어느 날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신에 이끌려서 골짜기로 가게 됩니다. 거기에 가 보았더니 마른 뼈들이 가득히 쌓여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 환상을 접한 시기가 주전 580년경입니다. 그때의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재기의 희망이 없는 이스라엘 민족, 그래서 희망을 접어버린 그 시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이 비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굴러다니고 있는 이 처절한 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의외로 이상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에스겔아, 이 뼈들이 능히 살아날 수 있겠느냐?"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날 것 같으냐?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나겠느냐? 하나님의 이 질문에 아마도 에스겔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인지 무척 고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농담하십니까? 이 뼈들이 어떻게 삽니까?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자기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예,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에는 현실적인 상황이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습니다. 골짜기의 모습이 너무 처절합니다. 'YES'도, 'NO'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있을 때에 갑자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아주 절묘한 대답을 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어느 신학교의 신학생이 시험을 치르는데 교수님이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전혀 대답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백지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백지를 낼 수는 없고, 그래서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에스겔의 이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빈 시험지에다가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몇 일 후에 채점을 한 시험지가 자기에게 돌아왔는데 교수님이 이렇게 채점을 했다고 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 아래에 주님=100점, 학생=0점.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조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죽었다'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죽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 그러니까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희망은 '하나님과 함께'입니다. 반대로 인생의 절망은 '하나님 없음'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순간 그는 영원한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코드를 하나님께 맞추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코드를 세상으로 맞추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세상을 향해서 코드를 맞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이 땅은 분열의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무너짐이라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죽음의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어쩌면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 뼈들의 골짜기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똑 같은 질문을 이렇게 던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이 다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 민족이 다시 살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금 우리 민족이 부흥의 닿을 올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마른 뼈들처럼 앙상하게 말라져 가는 이 땅의 백성들을 어떻게 다시 살려낼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저들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살을 입히고, 살갗으로 덮고, 생기를 불어넣어 다시금 회복의 영으로 충만하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1절부터 3절에서는 진단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는 범죄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들에 대한 영적인 상태에 대한 진단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적인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4절 이하에서는 이것을 치유하는 처방이 나와 있습니다. 의사는 환자에 대해서 먼저 진단을 합니다. 진단이 정확해야 올바른 처방전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진단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는 마른 뼈와 같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마른 뼈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면서 희망을 접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면서 더 이상의 어떤 기대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들이 이렇게 앙상한 마른 뼈들의 골짜기가 되고, 그래서 희망을 잃어버린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그들의 삶은 그 사실만으로도 절망이었습니다.

마른 뼈, 마른 뼈들의 골짜기. 이것을 신약적으로 적용할 때에는 불신자들의 상태를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가리켜서 '죽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이미 영벌의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인생, 하나님이 없는 나라와 민족을 가리켜서 우리는 마른 뼈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른 뼈와 같이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 어떻게 해야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들에게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희망이 있습니까? 동일한 질문입니다. 허물과 죄악으로 가득한 이 땅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향하여 마른 뼈들이 살아나고,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 생기의 바람이 불어오는 회복의 역사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아울러서 이것은 오늘 우리의 민족을 살리고, 우리의 사회를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함으로써 영적으로 죽은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다시 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마른 뼈들의 골짜기처럼 절망적인 이 땅을 어떻게 하면 다시금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고 희망으로 가득차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첫째로, 이 땅의 마른 뼈들의 골짜기처럼 절망적인 이 땅을 변화시키고 거룩한 회복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람인 저와 여러분들이 주의 말씀을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에스겔을 마른 뼈들의 골짜기로 이끌고 가신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주라고 하십니다. 더 쉽게 말하면 죽은 자들에게 가서 전도하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산에 있는 영락 공원 묘지에 가서 전도하라면 그래도 가서 전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낸 그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전한다는 것은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영락 공원에 있는 화장터에 가서, 그것도 화장하고 나온 한줌의 뼈들을 향해서 전도하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화장하고 남은 마른 뼈를 향해서 설교를 해라. 여러분, 이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할만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마른 뼈들을 향해서 그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물기가 하나도 없는, 먼지만 날리는 마른 뼈들을 향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말씀을 대언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그러면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내가 하겠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붙잡아야 할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너무 우리의 인간적인 이해와 경험에 의해서 전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이성과 경험에 맞지 않을 때에는 과감하게 거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합시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마땅히 원해야 하는 그것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유명한 흑인 인권 운동가인 미국의 루터 킹 목사님이 활동하던 때의 미국은 남부의 여러 주에서 아직도 흑인 노예가 있었습니다. 당시 흑인 아이들은 백인 아이들의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흑인들의 소망은 주인의 눈에 띄어서 좀더 주인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루터 킹 목사님은 흑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 우리는 좀더 주인님의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을 원합니다" 이때 루터 킹 목사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그것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원해야 하는 것은 주인과 동등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원해야 하는 그것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른 뼈처럼 희망을 잃어버린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예수만 믿는다면 무좀 걸린 발바닥도 핥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인은 말하기를 "육신의 나이는 주름살을 만들지만 삶의 열정이 사라지면 영혼의 주름살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믿음의 열정이 사라지면 결국에는 우리의 영혼은 시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입만 살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입만 움직입니다. 말만 무성하게 만들어냅니다.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불평을 가장 많이 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인도 간디의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시험에 빠져서 허덕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험에 빠지는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시험에 빠지는 것이지 말을 잘못해서 빠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가 말을 잘못해서 여러분이 시험에 빠집니까? 그렇다면 목사가 한 말이 비성경적이라는 말입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에게 말씀을 잘못하셔서 그가 시험에 빠져 예수를 팔았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가장 성경적인 말을 했을 때에 사람들은 시험에 빠집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스스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믿음의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어느 누구도 시험에 빠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시험에 빠지고, 스스로 근심하면서 떠나갈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케리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말을 외우셔도 좋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여러분이 어떠한 일도 시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어떠한 역사도 이루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안에 소원과 열정을 주십니다. 열정이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열정이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 나온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위하여 소원과 열정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사람인 여러분이 천둥소리만 내면 하나님은 축복의 장마비를 쏟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은 축복의 장마비를 맞으며 행복해 할 것입니다. 이 역사와 은혜가 우리 모두와 이 땅의 심령들에게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외치십시오. 한 영혼이 주 앞으로 돌아와 헌신자로 세움 받는 역사를 만들어 가십시오.

오늘 이 땅의 많은 성도들은 영적 게으름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성도들을 영적으로 비만하도록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목사나 교회가 자신들에게 영적으로 일용할 양식을 먹여 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는 성도들을 더 많이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과연 성경적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영적 비만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영적 게으름과 나태함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적용하고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마른 뼈들의 골짜기를 향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일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5절에 보면, "마른 뼈에 생기가 임할 것이다." 그리고 6절에 보면, "마른 뼈에 힘줄이 생길 것이다." 살이 펴지고 마침내 가죽이 덮여 질 것이다. 그리고 7절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여호와의 말씀에 좇아 대언하는 순간,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외치는 그 순간에 마른 뼈들이 맞추어지기 시작을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남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주일마다 경험합니다. 어떤 주일은 완전히 공동묘지에서 해골들을 향해 설교하는 심정일 때가 있습니다. 설교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입신중인 교우들이 적지 않게 보입니다.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아무런 믿음의 열정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 눈에는 그들이 마른 뼈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배당에 들어 올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봅니다. 그 얼굴에 성령의 빛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에 새 힘이 있습니다. 입술에 찬양이 흐르고 있습니다. 부활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 보람 때문에 목회를 합니다. 이 보람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동일한 보람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한 영혼을 주 앞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 친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가 마른 뼈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주께서는 마른 뼈를 향해서도 주의 말씀을 대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할 일은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거부하고 온전히 말씀을 믿고 전하면 됩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갓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교수님이 너무 장황하게 성경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니까 답답해 졌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서서 한 손으로 성경을 흔들면서 물었다고 합니다. "교수님, 교수님은 이 성경이 정말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이때 그 교수님이 조용히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자네가 그렇게 성경을 흔드는 한 아무 일도 안 일어날걸세. 먼저 그 성경이 자네를 붙들어 무릎꿇게 하는 날, 자네의 성경은 그때부터 인간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시작할 것이라고 믿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 말씀을 이웃들에게 대언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전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영적으로 죽은 이웃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둘째로, 마른 뼈들로 가득한 이 땅에 살아남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게 해야 합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말씀의 대언을 따라 마른 뼈들이 맞추어 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입혀짐으로 사람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그 부족한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9절에서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여기에서 생기는 성령을 말씀합니다. 생기를 원어에 보면 루아흐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성령으로 번역되면서 동시에 생기, 혹은 호홉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기요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영혼이나 죽은 공동체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합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이 임하실 때에 죽은 자들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때에 이 땅에는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남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매우 일관성 있게 전도하는 사람들이 말씀과 함께 성령으로 무장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함께 할 때에 말씀은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우선 순위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이나 죽은 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생기이신 성령께서 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이웃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는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닙니다. 산 자가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이 일제히 살아납니다. 골짜기를 가득채웠던 마른 뼈들이 더디어 커다란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놀라운 일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인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 일어날 때 그들은 이제 거대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10절을 읽어보십시오.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한 사람이 아니라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거대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일어나는 환상이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죽은 시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하나님의 명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부흥의 완성입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놀라운 경험, 한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죽은 영혼들이 주 앞으로 돌아오는 이러한 사건을 가리켜서 진정한 의미의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시대에 이 부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군대가 되십시오. 마른 뼈들의 골짜기가 변하여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야 합니다. 마른 뼈들로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가 되면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큰 교회는 그냥 가만히 있었더니 어느 날 큰 교회가 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크게 헌신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큰 교회가 된 것입니다. 큰 교회의 성도들은 드리는 것도 크게 드립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의 성도들은 드리는 것도 작게 드립니다. 큰 교회의 성도들은 헌신도 크게 합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의 성도들은 헌신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서 크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얻는데는 공짜가 없습니다.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을 살리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를 위하여 희생의 잔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907년에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때 우리는 이미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나라를 회복하고자 하는 소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척박한 황폐한 땅에 몇 사람의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평양 땅에 엎드렸습니다. 작은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기들의 죄를 통회하고 회개하며 주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자 그들은 일어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기쁨을 경험하고 길거리에 나가 울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교회를 막론하고 교회마다 영혼들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원산에서 평양에서, 이 부흥의 불길은 서울로, 목포로 전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온 땅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희망이 없었던 이 땅에 갑자기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기 시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민족의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양 대부흥운동입니다. 한국 교회의 기초는 그 때 다 마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양 대 부흥운동은 세계 모든 기독교의 역사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민족의 부흥은 정치적 결단만으로는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역사를 휩쓰는 성령의 바람, 하나님의 생기가 다시 한번 이 땅에 불어오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겸손히 주 앞에 엎드려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순간 역사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주 앞에서 마른 뼈임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습이 해골인 것을 부인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이 말씀을 붙들고 엎드려 회개하십시다. 성령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달라고. 성령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놀라운 경험을 여러분이 간직하면서 다시 살아야 할 또 다른 이웃들에게 이 말씀을 붙들고 뛰어가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사망을 당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임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전인 이곳으로 데리고 나오십시오.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영혼들이 거대한 군대가 되어 일어나는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에 붙잡힘 바가 되어 길거리로, 형제들에게 말씀을 전파할 때에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부흥의 불길은 일어날 것입니다. 역사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우리 교회가, 저와 여러분이 함께 만들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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