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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함으로 크고 으뜸인 자가 되라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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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성철 목사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0:26-27)

많은 사람들이 ‘큰 자’와 ‘으뜸인 자’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큰 자와 으뜸인 자는 대체로 교만한 자들이고 섬김을 받고 권세를 가지고 남을 지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방인(세상)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대인들(큰 자들)이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들이 알고 있다”(2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예수님은ꡐ크고자 하고 으뜸으로 높아지고자 하는‘ 이들의 잘못된 행동들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ꡐ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는 자들ꡑ이고,ꡐ지식과 거짓 거룩함을 자랑하며 교만으로 과시하고, 선행을 자랑하여 드러내 보이려 하는 자들ꡑ이라고 하셨고,ꡐ사람들로부터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랍비(선생)라는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는 자들ꡑ(마태23:3-7)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도 세속적인 방식으로 큰 자와 으뜸인 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큰 자와 으뜸인 자가 되기 위해서 세속적인 방법을 서슴없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인 추구에는 신앙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속적인 시각으로 큰 자와 으뜸인 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에 자기의 아들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큰 자와 으뜸인 자로 삼아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다른 제자들은 분노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왕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 나라의 큰 자와 높은 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데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큰 자와 으뜸인 자가 되게 하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하나님 나라의 크고 으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12절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는 겸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를 붙드시고(시147:6),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시10:7)”고 했고, “겸손한 자의 마음은 배부르고 살찔 것(시22:26)”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저자도 겸손의 귀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잠3:34)고 했고,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고 했습니다. 또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4)고 했으며,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29:23)고 했습니다.
우리는 큰 자와 으뜸이 되게 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큰 자와 으뜸이 되게 하는 그 겸손은 어떤 겸손입니까?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셉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혀 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너희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그 예수님의 순종에 함께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죽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는 것처럼, 나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의 삶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겸손함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큰 자이고 으뜸인 자입니다.
겸손은 주님이 내 안에 사는 삶을 위하여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도록 그리스도를 내 안에 계시지 못하게 하는 ‘육신의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큰 자이고 으뜸이 되는 자입니다.

사람이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것은 육신의 ‘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가 죽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내 안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내 안에 있도록 육신의 ‘나’가 죽을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나를 부인할 수 있고, ‘나’라는 육신의 소욕을 죽일 수 있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큰 자이고 으뜸인 자입니다. 바로 이 겸손을 이루는 우리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숨기는 겸손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구함을 보고 분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자와 종은 자기를 낮추고 자랑스러운 일에 자신을 숨기는 사람입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자신의 공로를 높이고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아니고 으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역사’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겸손한 자로 큰 자이고 높은 자입니다. 왜 겸손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은 자기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닫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내세울 것이 없기에 자신을 낮추게 되고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기에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래는 돌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그러나 그 쓰임새에 있어선 큰 돌이 이에 못 따르고, 큰 바위가 이에 못 미칩니다. 모래의 쓰임새는 다른 어떤 돌보다도 절대적입니다. 그러면 모래는 왜 그처럼 쓰임새가 많은 것입니까? 그 이유는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잘게 쪼개어졌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작아졌기 때문입니다.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눈을 높이고, 목을 곧게 하고 어깨에 힘을 주는 사람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래처럼 쪼개지고 내려가고 작아져서 낮아져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큰 자로 으뜸의 사람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큰 바위시지만 모래처럼 사신 분이십니다. 모래처럼 낮게 오셔서 모래처럼 낮게 살다가 모래처럼 낮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낮추어 작아지고 작아질수록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큰 자가 되고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입니다.

조류에 속한 동물들은 날개가 있어 날 수 있습니다. 독수리 같은 것은 높게 그리고 멀리 날 수 있으나 칠면조 타조 같은 것은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하고 급한 상황에 처할 때에나 몇 발자국 날 뿐입니다. 그리고 새들 가운데는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들도 있습니다. 새들이 노래를 부른다고도 하고 지저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새들이 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나 칠면조나 타조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며 작은 새들이나 갸날픈 카나리아 같은 새들만이 노래를 부를 줄 압니다. 이처럼 작고 힘이 없는 새들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드러내지 않고 숨기며, 작다고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큰 자이고 으뜸이 되는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위하여 사는 겸손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과 그것을 시기하는 10제자의 분열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잊고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는데서 발생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과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시려고 오셨음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 분의 일을 기뻐하며 그 분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내세우며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망각하는데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태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보다 더한 것을 행하는 것을 ‘과욕’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최선을 다해 행하는 것이 바로 ‘겸손의 본질’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명에 대해서 그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이상의 과욕을 행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겸손은 결코 사명의 회피나 사명의 것 그 이상을 행하여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과욕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의 분량에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 책임에 대하여 성실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열심을 다하나 사명에 대한 헌신보다는 자기자신의 실리와 자랑을 위해 과욕을 부리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도외시하거나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을 보고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고 찾아온 무리들에게 분명하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리스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했고,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자”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은 자기보다 인기가 높아 가는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요3:30)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부족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겸손은 하나님의 주신 사명의 길에 최선을 다하는 데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자랑이나 자기과시보다는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데서 세례요한은 겸손함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례요한을 “여자가 나은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의 분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언제나 겸손함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위해 사는 겸손함을 가지십시오. 바울은 빌립보 2장 6-8절에서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라면서 그리스도와 같이 겸손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겸손하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것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리고 이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는 극히 자기 아들들에 대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성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행동을 서슴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삶이 잘못되어있습니다.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의 구함은 잘못된 구함입니다. 겸손하지 못한데서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나 모든 방식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하지 못한 사람들은 분열을 만들어냅니다. 야고보와 요한과 그 밖의 10제자는 분열되었습니다. 겸손하지 못함은 분노를 자아내게 하며 분열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큰 자요 으뜸인 자가 되게 합니다. 자신을 향해서 ‘나는 교만한 자입니다’ 라고 할 수 있을 때 겸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자와 으뜸인 자는 바로 겸손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큰 자와 으뜸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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